“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행동함이요, 행동하면 반드시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반드시 행한다”-다산 정약용- 난민 NGO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난민 조사 면접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난민 분에게 물었다.“인터뷰 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무슨 문제 있으세요?”- “배가 고파요... 돈이 없어서 이틀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눈물이 왈칵 났다. 본국에서 촉망 받던 정치부 기자였다가 투옥되고, 집회 도중 총 맞고 한국으로 망명한 분이다. 어떻게든 인정받게 해드리고자 가망 없는 소송이라도 조력하고 열심히 싸워 드렸지만 여기까지인가 보다. ‘공존, ‘공생’의 위기를 마주하는 현 상황에서 근원적인 원인을 고민하는 이들을 찾기란 쉽지 않다.
당신 마지막 밤에, 그 눈이 오기 전 날눈썹 위에는 그대 손톱처럼 닳은 달이 허옇게 멀뚱하고밤하늘에 걸린 듯이 고양이 울음소리가 났다바래질 만큼 추운 밤,날이 시어지면은 어쩐지 옥수수 생각이 난다알알이 떼어낸 찐 옥수수를 한입에 털어 먹이곤 했던어린 손주를 대하던 흰 구불머리의 당신이 생각난다그 아침엔, 그 흰 머리칼 같은 눈이 굵게도 내렸다어느 샌가 머리도 볶을 수 없었던 당신의, 닳은 손등이 영 굳어진 날삭풍이면 불어 마시던 국화차를 이제는 누가 끓여줄 텐지속이 쓰리다던 믹스커피를 훌쩍 마실 만큼 나는 자랐는데,더해갈 나의 겨울에 당신 앉은 조그마한 자리가 늘어지듯 걸렸다
그 한낮에 비가 내린다더러는 모른 채 젖어가고가만히 선 그림자만이 몸을 떨고 있다어딘가 온기가 남아 있는 까닭은불어오는 바람이 귓바퀴에 휘파람처럼 스며든 탓이다그 바람에 어제의,그리고 조금 더 어제의 네가 있을 까닭이다그 한낮에 비가 내린다길어진 해의 끝에 불콰하여 술집 문을 나서도록 하는 것은미닫이문을 비껴 열고 담배를 피우던 길가의,어느 귀퉁이의 조악한 나무의자에 네가 앉아 있던 까닭이다어쩌면 모른 채 젖어 있던 너였는지,너의 그림자였는지 상기하며목소리는 잃고 고개만 주억거리기 위함이다뵈지도 않는 그 물방울에겉이 닳아 맨들맨들할 수첩의 속마저 젖고눌러쓴 잉크가 울컥 번져간다전할 수 없는 글귀들이 형태를 잃고나조차 잊어 쉬이 읊을 수 없는데
오로라임수빈(문예창작·11)오! 로라혀끝을 입천장에 갖다 대면잠들어 있던 네가 깨어나너는 새벽의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나는 정오의 소음 속으로 걸어가지우리는 어제처럼 오늘도오늘처럼 내일도다른 시침으로 흐르겠지나는 한 번도 불러 본 적 없는새벽의 노래나는 영원히 들을 수 없는새벽의 노래네가 흘린 음표들이 뒹구는게으른 오후음표들을 입 안에 넣어본다입 안 가득 울리는주인 잃은 음표들의불협화음오! 로라혀끝을 입천장에 갖다 대면잠들어 있던 너는더 깊은 잠속으로오, 로라오,오.
감나무 끝에 걸린맛있는 노을아이는까치발 하다까치발 들다동동 구른다홍시 아이의 손에 쥔 잘 익은 노을한 입 가득 베어 물면입 안 가득 번지는가을볕발간노을 맛 노을이 지는 사이땅거미 지는 사이어느새그림자만큼 자라난아이는나의 아빠나의 아버지
차갑게 식은 너를빨간 냄비 뚜껑을 덮고 끓였어부글부글 거리는 물속에서 너는웅크린 채 빙글빙글 돌았어끓였어 나는뜨겁게 열 오른 나는빨간 냄비같이 속을 끓였어 부글부글 거리는 속을 나는끓였어붉은 쇳물을 부어도 너의차갑게 웅크린 어깨를녹이지 못할 걸 알면서
빨주노 초 파남보 정장 입은 고양이들 담 향해 달린다.빨강 눈 뜨고주황 흙 박차며 노랑 빛 가른다 정장 입은 고양이들 초록 담 넘는다 담 뒤는 축축한 달의 세계일정한 간격의 천둥번개 춤추는 고양이 옷 입은 사람들 담 뒤는 축축한 달의 세계 솟구치고 섞이는 파남보
바오밥나무머리에 뿌리가 돋았어. 처음엔 혹인 줄 알았는데, 머리 감을 때마다 자라더라고. 신기했어. 이상했지. 기묘한 사건이었어. 간혹, 뿌리에 리본을 맨 소녀와 마주치기도 했어. 모두의 머리에 뿌리가 자랐어. 빗속 씨앗이 우산을 잊은 사람들 머리 위로 내려앉은 게 아닐까. 나는 우산을 잊은 적이 없는데.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어.뿌리가 소녀의 키만큼 자랐어. 곳곳에서 시멘트를 걷어내는 작업이 시작됐어. 흙을 찾은 사람들은 몸을 거꾸로 세운 채 머리를내리꽂았어. 사람들은 햇빛을 받기 위해 모두 신발을 벗었어. 그렇게 하나, 둘 물구나무섰어. 빽빽이 선 물구나무들 사이에서 소녀의 작은 발바닥이 보였어. 허리를 숙이고, 손바닥을 딛고, 다리를 띄우고, 척추를 세우고,
조랑말 이 시 위에 조랑말이 뛰어놉니다문학은 말들의 똥을 먹고 삽니다해는 떨어질 때 제 덜 익은 머릿속을 흔들고 사람 사는 것이 무엇일까 골몰하며 눈을 감았어요 리듬이란 게 무엇이고 절실한 게 어디 있을까 지금이란 게 수없이도 절 시한테 떠미는데 영영 사라질 편지들이스스로 몸을 찢습니다태평양 한가운데길 잃은 조랑말 한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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