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도서관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소장자료 검색란에 ‘생각의 경계’를 써넣고 검색 버튼을 눌러 보았다. 아니, 이 책의 대출 횟수가 고작 3회밖에 안 된다니. 베스트셀러의 대출 횟수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너무 박한 숫자가 아닌가 싶었다. 베스트셀러에 편중된 독서 문화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대학생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가 보다. 100번대 서가에서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이 책의 책장 곳곳에 좀 더 많은 학생의 지문이 남기를 바라면서 글을 쓴다. 대출 횟수가 늘어나면 도서관에서 책을 추가로 구입할 것이고, 그러면 언젠가는 이 책을 검색했을 때 c.3, c.4 같은 복본기호를 보게 될 날도 있을 것이다. 실은 나도 이 책을 구입한 지 일 년
고1 때 담임선생님은 여러 이유에서 매우 특별한 분이셨다. 선생님은 자신이 담임인 모든 학생의 생일에 책을 선물하셨는데, 책 안에는 선생님이 직접 쓰신 편지도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공지영 소설가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와 박상우 소설가의 이상문학상 수상작 이 담긴 ≪제2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선물로 받았다.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책장에서 뿌연 먼지에 뒤덮여 있는 공지영 소설가와 해후할 수 있었다. 이 소설에는 대학을 졸업한 후 미래의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는 세 여성이 나온다. 그러나 이들은 결혼하고 나서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갈등하고 상처받는 인생을 산다. 이를 통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억압, 차
외국인 유학생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다 보면 동양 학생과 서양 학생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내가 만난 학생을 모두 셈해도 끽해야 일이천 명에 불과하고 소수의 학생이 각 나라의 대표성을 띤다고 보기 어려울 수 있지만 말이다. 내가 경험한 학생으로 한정한다면, 동양 학생은 공부할 때 어휘와 문법을 중요하게 여기고 교사 의존도가 높은 반면 서양 학생은 말하기를 중요하게 여기고 교사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동양 학생은 혼자 조용히 공부하는 데 익숙하고 서양 학생은 함께 떠들며 공부하는 데 익숙하다. 동양 학생은 선생님을 자신보다 상위자라고 수직적으로 인식하는 반면 서양 학생은 선생님을 자신과 동등한 위치라고 수평적으로 인식한다. 내가 만난 학생은 거개가 그러했다. 여러 심리
1998년, 처음으로 이메일 주소를 갖게 되었다. 쓰는 데 편지보다 힘이 덜 들고 보내는 즉시 상대방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메일이 신통방통하게 느껴졌다. 편지지도 선택할 수도 있고 배경 음악도 넣을 수 있으니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더는 편지도 이메일도 보내지 않게 되었다. 이메일도 구식이 된 시대에 학생들은 카카오톡을 이용해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글을 제대로 써 본 일이 없고 써 볼 일도 없으니 글쓰기가 영 자신 없고 부담스럽게만 느껴지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글쓰기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이 근래 속속 출간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책을 펼쳐 보면 실망하기 일쑤다. 원론적이고 이론적인 내용에 머물고 있거나 글의 구조와 원리를 지루하게 설명하고 정서법을 지적하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
오늘도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은 사람들로 빽빽하다. 핸드폰을 만지는 사람과 잠을 자는 사람 두 부류의 사람이 내 눈에 들어온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책을 읽기 시작한다. 책을 손에 든 이상 다른 일을 할 여력이 없는 데다가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기에도 어색한 장소인 덕분에 책에만 집중하게 된다. 지하철 한 량 전체가 라르고(Largo), 녹턴(Nocturne Op. 9-2), 보칼리제(Vocalise) 같은 클래식 음악이 유유히 흐르는 우아한 도서관으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이곳에서 부담 없이 읽기에 적격인 책을 소개해 드릴까 한다. 바로 오가와 사야카라는 일본인 문화인류학자가 쓴 이다. 책 제목부터가 자본주의 시대를 역행하는 문장이다. 우리는 더 넉넉하
독서의 장점 중 하나는 합법적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견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데 있다. 그것도 퍽 저렴한 비용으로 말이다.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경험과 사유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생각과 의견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현상을 다른 관점으로 보고 사유할 수 있는 눈이 생긴다. 시야가 넓어지고 사고가 트이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2016년 11월의 저자와 마음으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마치 내게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어때?”라고 묻는 듯하다. 저자는 오랫동안 몸담았던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걸어 나와 타인의 운전석에서 대리기사로 살아가며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면서 이 사회를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으로 규정하고 자신이 그동안 대학 강의실에서든 운전석에서든 타인의 욕망을 대리한 대리인간으로
2009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MBC에서 5부작으로 방영된 다큐멘터리 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총 15억 원의 제작비와 9개월의 사전 조사, 250일의 제작 기간을 거쳐 완성된 이 다큐멘터리는 당시에 20%가 넘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달성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마존강 주변에 거주하는 원시 부족들의 꾸밈없는 삶의 모습을 영상에 생생하게 담았는데, 현대인들의 이기와 탐욕으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아마존의 모습과 위기에 처한 부족의 현실을 나란히 보여주어 시청자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이 방영되기 전에 이와 똑 닮은 책이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는 한국어로 치면 “안녕하세
거짓말에도 색깔이 있다. ‘새빨간/새파란/새하얀 거짓말’은 각각 다른 거짓말의 특성을 나타내는 관용 표현인데, ‘거짓말이 새빨갛다/새파랗다/새하얗다’처럼 문장으로 복원할 수 없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들 표현은 거짓말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점을 시사한다. 웃음과 행복의 씨앗이 되는 좋은 거짓말이 있는 반면 눈물과 불행의 씨앗이 되는 나쁜 거짓말도 있다. 인생에서 필요한 거짓말도 있고 불필요한 거짓말도 있다. 가벼운 거짓말도 있고 무거운 거짓말도 있다. 거짓말 속에는 색깔, 감정, 무게가 공존한다. 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 거짓말을 할까? 이게 뭔 공허한 질문인가 싶다가도 주어가 ‘내 남친/내 여친’으로 바뀌고 거짓말의 방향이 ‘나’를 향하는 순간 이 질문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띠게 된다. 상
거리로는 가장 가깝지만 마음으로는 가장 먼 나라. 8시 뉴스와 인터넷 신문 기사에 자주 오르내리는 나라.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속내를 좀처럼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나라. 이산가족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땅, 바로 북한이다. 북한 내부를 촬영한 다큐멘터리가 이따금 방영되고는 있지만 북한 측에서 촬영 장소와 내용을 엄격히 통제하고 주민들과의 대화도 금지하고 있어 현실을 오롯이 담아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카메라에 담긴 수만 장의 풍경이 북한의 실상이라고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 여기 2006년 2월부터 2008년 7월까지 평양 주재 영국 대사로 근무한 존 에버라드의 생생한 북한 체험기 ‘영국 외교관, 평양에서 보낸 900일’이 있
우리는 말을 하고 글을 쓰면서 살아간다. 그 말과 글은 단어로 이루어진다. 텍사스 주립대 심리학과 연구진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남녀 모두 하루에 약 16,000개의 단어를 사용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사람마다 발화 스타일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비유하자면 개인이 선호하는 음식, 운동, 패션이 제가끔 다른 것처럼 단어 또한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사용하기에 한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를 통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엿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자신에 대한 단서와 흔적을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에 남긴다. 이것은 나의 행동과 생각의 ‘잔여물’인 동시에 나의 ‘언어 지문’과도 같은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는 나도 미처 모르는 나의 모습을 밖으로 드러낸다. 그 결과
요즘 사람들은 숫자, 언어, 언론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그동안 수차례 속은 탓에 내성이 생겼거나 인터넷의 각종 지식을 자양분 삼아 분별력이 늘어난 결과일 수도 있다. 이제는 제법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누군가를 믿는 일은 그만큼 더 어려워졌다. 사람들은 객관적인 증거나 자료를 요구한다. ‘인증샷’이나 ‘인증’을 요구하는 행위도 잠깐의 유행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관습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또 속고 만다. 오늘도 핸드폰을 열면 세계 곳곳의 수많은 사건 사고와 정보가 마치 화수분처럼 흘러나온다. 과연 거기에는 진실만이, 정확한 정보만이 있을까? 도처에 ‘가면을 쓴 단어’가 있다. ‘소말리아에 미군 파견’을 ‘희망 회복 작전’으로 표현하거나 ‘폭격’을 ‘방어를 위
지난 호에서는 어문 규정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다섯 가지 정도로 언급했다. 이번 호에서는 대학생들이 자주 보이는 표기 오류를 몇 개 설명한 뒤, 어문 규정을 담고 있는 비슷비슷한 도서 중에서 괜찮은 몇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실 지난 호 칼럼을 읽고서 다소 뜨악했던 것이, ‘떼려야 뗄 수 없는’으로 써 보낸 칼럼이, 편집을 거쳐 인쇄된 지면에는 ‘뗄레야 뗄 수 없는’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역시 규정을 준수하는 것이 녹록지 않다는 방증인 셈이다. 첫 번째, “빈칸에 {알맞는/알맞은/맞는} 답을 고르시오.”와 “국가대표에 {걸맞는/걸맞은} 행동을 해라.”에서 앞 문장은 ‘알맞은’과 ‘맞는’이, 뒤 문장은 ‘걸맞은’이 답이다. ‘맞다’는 동사이고 ‘알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