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술(醫術)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기술이기에 ‘어진 기술’, 인술(仁術)이라고도 불린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인술(仁術)을 베푼 인물을 꼽아보라면 단연 장기려를 떠올리게 된다. 장기려는 한평생 아무런 욕심 없이 자신의 의술을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베풀었기에 ‘바보 의사’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장기려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장운섭과 최윤경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했고,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외과 의사 백인제 박사의 수제자로서 수련했다. 이후 1940년에 나고야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평양연합기독병원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한다. 장기려는 1947년 평양의과대학의 외과 교수로 지내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자신의 차남 장가용과 함께 월남하고,
윤희순은 구한말 활동한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다. 윤희순은 1860년 경기도 구리 출생으로, 윤익상과 평해 황씨 사이에서 큰딸로 태어났다. 윤희순은 16세가 되던 1876년에 춘천 의병장 외당 유홍석의 장남이자 팔도창의대장 의암 유인석의 조카이기도 한 유제원과 혼인했다. 윤희순은 혼인 후 시아버지 유홍석의 영향을 받아 의병운동에 뜻을 두게 된다. 1895년 을미사변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 일제는 단발령을 발표해 강제 시행한다. 이것이 조선인의 마음속에 누적된 반일감정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된다. 윤희순의 시아버지인 유홍석도 춘천과 가평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윤희순은 최초의 한글 의병가인 와 등 여러 노래를 창작하고
성균관대학교 중앙학술정보관 앞에는 유학자의 동상이 하나 세워져있다. 일반적으로 유학자의 동상이라면 단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 유학자의 동상은 바람에 휘날리는 두루마기를 걸치고 하늘을 향해 굳게 쥔 주먹을 쭉 뻗은, 역동적인 모습과 신념에 가득 찬 표정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 유학자의 동상은 심산(心山) 김창숙 선생(1879.7.10.~1962.5.10)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김창숙 선생은 1879년 7월 10일 경상북도 성주군 대사면 칠봉동에서 유림으로 명망 높은 김호림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명문가답게 가풍은 엄격했으나 김창숙 선생의 아버지 김호림은 당시 일반 양반과는 달리 상당히 개화된 생각을 가진 유학자였다고 한다(일하는데 있어 귀천을 따지지 않았으며, 고용인
이육사(본명은 원록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의거’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 간 옥고를 치렀을 당시의 수인번호인 264를 따서 지은 필명이다.)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 조국의 독립에 대한 강렬한 염원이 담겨진 작품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민족 시인이자 독립 운동가이다. 이육사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의 전문이 실려 있어, 설령 문학이나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 번쯤 그의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이육사는 윤동주와 더불어 문학을 통해 일제에 저항한 시인으로 꼽힌다. 이육사의 삶과 문학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으나, 이육사의 시가 어떻게 일제의 검열과 방해를 피해 우리에게 전해질
권기옥(1901~1988)의 이름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 붙는다. 그녀가 우리 역사에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비행기 조종사 자격을 땄고, 직접 비행기를 몰아 하늘을 날았기 때문이다. 1901년 평양에서 태어난 권기옥은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공장에서 일해야만 했기에 또래보다 다소 늦은 12살이 되어서야 교회에서 운영하는 숭현소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소학교 졸업 후에는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숭의여학교에서의 생활은 권기옥에게 있어 민족의식을 키우고, 일제에 의해 억압받는 조선이 독립할 수 있도록 하는데 이바지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세울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숭의여학교는 학풍에 있어 민족 주체의식이 뚜렷해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와 더불어 ‘평
윤학자 여사(1912~1968)는 본래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으로 일본 이름은 다우치 치즈코(田内 千鶴子)이다. 윤학자 여사의 한국 이름인 윤학자(尹鶴子)는 남편 윤치호 전도사의 성씨인 윤(尹)에 자신의 일본 이름 치즈코(千鶴子)를 따와 붙인 것이다. 윤학자 여사는 1912년에 일본 고치현에 위치한 고치시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아버지가 조선총독부 소속의 관리로 임명되어 아버지를 따라 조선으로 건너왔다가 아버지의 사후 목포 정명여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일하게 된 것에서부터다. 그즈음 목포에는 윤치호 전도사가 ‘공생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고아원을 세워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돌봐주고 있었다. 윤학자 여사는 공생원에서 음악교사로 봉사를 하다가 윤치호 전도사와 부부의 연을 맺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는 ‘씨 없는 수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사실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아니다.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기하라 히토시 박사로,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만들어 보인 것은 육종학과 농업기술이 얼마나 가치 있고 중요한지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과일인 제주도 감귤도 우장춘 박사의 제안으로 재배가 시작된 것이고, 원예와 농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우리 기후와 토양에 맞는 품종이 개발, 보급된 것도 우장춘 박사의 덕분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시급한 해결과제였던 시절 연구에서 얻은 진리를 바탕으로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가난한 나라를 회생시킬 수 있는 결과를 안겨준 우장춘 박사가 그 자신의 학
강우규 의사(이하 강 의사)는 1855년 평안북도 덕천군의 농가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과 한방의술을 익혔고 1884년 함경남도로 이주해 한약방을 차리고 한의사로 일하며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강 의사는 이동휘 선생과 교류하면서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앞날이 위태로운 조선을 위해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고민한다. 1910년 경술국치 당시 강 의사는 인생의 황혼기라 말해도 좋을 50대 중반이었으나, 가산을 정리해 가족과 함께 만주 북간도로 망명해 조선의 독립을 위한 활동에 동참하게 된다. 강 의사는 길림성 요하현에 한인들을 모아 신흥동이라는 신한촌을 형성, 동광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한다. 신한촌은 훗날 러시아와 북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 중
서울 마포구 합정동 144번지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조선독립과 대한민국의 발전에 공헌한 외국인과 그 가족의 묘가 500기 이상이 있다. 외국인선교사묘원에 모셔진 이들 중 우리가 알 만한 인물을 몇 꼽아보자면, 숭실학당(현 숭실대학교)을 설립한 베어드 박사,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베델, 우리 역사 최초의 근대의료기관인 제중원 의사로 정신여학당(현 정신여고)을 세우기도 한 엘러스 등이 있다. 서양 선교사들의 영문 묘비로 가득한 이곳을 돌아보면 한자로 된 묘비가 하나 눈에 띈다. ‘고아(孤兒)의 자부(慈父)’ 즉 ‘고아의 자애로운 아버지’라 새겨진 묘비의 주인은 소다 가이치(曾田 嘉伊智. 1867~1962)이다. 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힌 수백 명의 외국인 중 유일한 일본인이다. 양화진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옛말 중 파락호(破落戶)라는 표현이 있다. 파락호란 음운한자 깨뜨릴 파(破), 떨어질 락(落), 집 호(戶)로 구성한 말로, 대략적인 뜻을 풀이해보면 ‘집(재산)을 모조리 날려버림’ 정도가 되겠다. 파락호는 ‘권력과 재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이지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허투루 쓰며 탕진하는 난봉꾼’ 혹은 ‘가문을 몰락의 위기로 몰아가는 인물’ 을 지칭하는 말이다.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가 보면 절제되고 점잖아 보이는 말이지만 사실은 욕설과 조롱, 비아냥거림에 가까운 말이다. 세간에서 자기 이름 앞에 파락호가 붙여져 불린다는 것은 불명예이자 수치로 소위 ‘인간 말종’이라 불리는 것과 다름없다. 보통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에서의 평판이나 주위의 눈초리 때문에라도 파락호라는 말을 들
조선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광복 이후를 지켜본 벽안의 외국인 중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한다’는 말을 남긴 호머 베잘렐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년 1월 26일~1949년 8월 5일)는 사후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된 인물이다. 웨스트민스터 성당은 영국 왕실의 대관식과 결혼식, 장례식 등 중요 행사가 거행되는 곳이자, 영미권에서 누구나 납득할 만한 업적을 세운 인물이어야만 묻힐 수 있는 곳인데, 그 웨스터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에 묻히길 원한다는 발언을 보면 헐버트가 한국에 대해 품었던 애정이 대단히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인물이라는 점에서 우리 역사에 큰 의미를 남긴 인물이라는 걸
1910년 8월 29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韓国併合ニ関スル条約)’(조약의 공식명칭. 조약 자체는 22일에 체결되었으나 일본 측이 발표를 미뤘다)이 체결되면서 일제강점기가 시작된다. 우리는 경술년(1910)에 나라와 민족이 치욕을 당했다고 하여 ‘경술국치’라는 치욕스러운 역사로 기록하지만 일제와 당시 일본 국민에게 있어선 자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륙 영토를 확보한 것이고, 많은 자원을 착취할 수 있는 식민지를 얻은 것이기에 일본 제국주의가 전 세계에 선포된 ‘영광과 승리의 날’이었을 것이다. 허나 모든 일본인이 조선에 대한 강제병합을 지지했던 것만은 아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11년,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논문을 쓴 일본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후세 다츠지(1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의 YMCA 강당에서 2.8 독립선언이 조선인 유학생들에 의해 발표된다. 일제의 심장부라고도 할 수 있는 동경에서 독립선언이 발표되자 일제는 엄청난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독립선언을 주도한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모진 탄압을 가한다. 김마리아는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여 연행되었으나 곧 풀려났는데, 풀려나자마자 위험을 무릅쓰고 2.8 독립선언서를 기모노에 감추고 이것을 입은 채로 조선에 반입시킨다(여성에 대한 몸수색이 상대적으로 어렵고, 또 일본 의상인 기모노에 조선 독립선언서를 숨겼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거라는 판단에서였다고는 하나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김마리아는 2.8 독립선언에 뒤이어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미리 귀국해 황해도 지역 만세운동에도 관여했다가 체포,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는 조선을 무력으로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으나, 조선인의 독립 의지와 저항심리가 쌓이고 쌓여 3.1 운동이라는 대사건이 일어나자 무력만으로 조선을 통치하긴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일제는 조선인들의 불만을 잠재워보고자 ‘문화통치’ 정책을 펴게 된다. 이에 따라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가 형식상으로나마 보장되고, 무단통치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헌병경찰제도가 폐지되고 일반 경찰제도가 도입되게 된다. 지방행정기관에 한해 조선인에게 참정권도 부여된다(이마저도 ‘25세 이상의 국세 5원 이상 낼 수 있는 성인 남성’에 한해서만 주어진 것이다. 소수 친일파 부유층에게나 주어진 권리일 뿐, 절대다수의 조선인은 누리지 못한 권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문화통치’는 결국 입에 발린
우리 근현대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인물은 적지 않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이회영 일가(이전 칼럼에서 소개한 이시영)나 백산 상회를 세운 안희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양반 출신 혁신 유림세력 등이 있고 현대에 들어와서도 모범적인 사회 지도층의 사례로 소개할 만한 인물은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허나 우리 사회의 귀감이 될 만한 ‘기업인’으로 선택지를 좁혀 소개하자면 유일한 박사(이하 유일한)와 견줄 만한 이가 없다. 유일한은 선견지명이 있던 아버지 유기연의 결정으로 당시 9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1905년에 미국 감리교에서 선발한 조선인 유학생의 자격으로 미국 유학을 가게 된다(형제들도 러시아와 일본, 중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유일한은 1909년에는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전광용의 단편소설 는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인성을 가진 인간이 ‘배우고 가진 자’로 살아가게 되면 어느 정도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현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소설 는 일제 강점기 후반부터 대한민국 수립 초반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인 이인국 박사는 일제 치하에서는 친일파, 해방 이후에는 친소련파, 미 군정이 들어선 이후부터는 친미파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중에서 묘사되는 이인국 박사의 내면에는 애국심이나 민족의 안위에 대한 걱정은 단 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인국 박사의 머리에는 지켜야 할 신념이나 사상도 없고 오직 일신의 안녕을 위한 냉철한 계산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인국 박사에게 있어 삶의 모든 요소는 자기 보신과 사리사욕의 충족을 위한 도구에 지
어린이의 권리라는 개념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백 년이 되지 않는다. 서양에서 아동권리 역사는 1924년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에서 아동의 권리에 관한 선언을 채택하여 ‘인류는 가장 좋은 것을 어린이에게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선언문에 명시한 것을 기점으로 출발했다고 보곤 한다.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어린아이는 ‘보호 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자기 몫의 밥벌이를 해야 하는 존재’였다. 문명이 태동하기 시작한 고대부터 어린이들은 노동에 참여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가사의 소일거리를 돕거나 성인의 노동을 보조하는 정도였다. 허나 영국을 기점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후, 산업혁명기 초반에는 정신과 육체가 연약하여 통제하기 쉬운 어린아이를 값싸게 부리기 좋은 노동력으로 치부
일제 강점기 당시 나라를 잃어 보호받지 못한 것은 비단 사람만이 아니었다. 일제 치하에서 무수히 많은 능과 유적이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으며 어떤 제재도 없이 무차별적인 발굴이 이뤄지기 일쑤였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고고학자들에게 의뢰하여 식민지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진행했는데, 이것은 말이 발굴이지 실상은 도굴과 약탈에 다름없는 일이 자행되었다. 게다가 당시 발굴은 귀금속류 부장유물의 획득이 주요 목적이었기에, 조사과정에서 유적을 훼손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한반도 전국 각지에서 발굴한 유물은 조선총독부박물관과 경성제대박물관, 각 지역의 박물관 등의 수장고로 들어갔다. 정말 가치가 높은 희귀유물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 본토로 불법 반출되었다. 망국의 슬픔과 열패감에 빠진 조선인
필자가 알기로 동서고금을 통틀어 무릇 군주가 백성의 눈이 어두움을 가엾이 여겨, 백성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문자를 창제하고 새로운 문자에 대한 해설서를 펴내어 문자의 원리와 사용법을 설명하는 것을 나라의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사업으로 추진한 것은 한글뿐이다. 한글창제 과정에서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역할과 비중이 누가 더 컸느냐의 문제는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게 갈리는 주제이다. 허나 한글이 세종대왕의 주도로, 백성을 위해 만들어진 문자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이가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글은 ‘배려의 문자’ 혹은 ‘소통의 문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과학적이고 창의적인 문자’라는 사실도 우리에게 크나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