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여쁜 자매가 나란히 앉아 피칠갑의 흰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장화, 홍련』의 포스터와 달리 영화에는 유혈이 낭자한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귀가 멍멍하도록 울려대는 비명이나 폭음도 거의 없다. 고적한 집과 평화로운 풍경, 잔잔한 음악 속에서 공포를 자아내는 것은 새엄마(은주)와 자매 중 언니(수미)의 적대감, 그리고 곧 희생될 듯 가련한 동생(수연)의 위태위태한 분위기이다. 자매의 아빠와 새엄마, 친엄마의 자세한 사연은 영화 중반이 넘어서야 짧게 드러나지만 그 사연을 알지 못해도 자매와 새엄마의 적대관계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아프리카 어딘가의 어린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다. 층간소음의 주범인 위층 식구를 염려하는 것보다 눈물겨운 사연의 방송화면 위에 뜬 ARS번호를 찍는 것이 훨씬 쉬우니 말이다. 아이들이 태어나 가장 먼저 싸우는 것은 손위 형제자매이고 학교에 들어가면 짝하고 수시로 다툰다. 담과 울타리를 마주 대고 있는 것, 같은 부모의 자식이라는 것,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수업을 듣는다는 것은 언뜻 가깝고 다정한 사이를 연상케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물질, 애정, 공간 등의 한정된 자원을 두고 계속 경쟁할 수밖에 없기 때문
“그 미소와 손짓에는 매력이 가득했다. 그것은 매력 잃은 육신 속에 가라앉아 있었던 한 몸짓의 매력이었다. 그 부인이라고 해서 자신이 이제 더는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테지만, 그녀는 그 순간만은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부를 통해서 시간을 초월하여 살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나이 없이 살면서, 어떤 이례적인 순간들에만 나이를 의식하는 것이리라.” -밀란 쿤데라, 『불멸』(김병욱 譯) 중 해변의 작은 마을에 노년의 자매가 살고 있다. 언니(자넷)와 동생(우슐라)은 성격
아내(임수정)와 남편(이선균)은 유학시절 일본에서 만났다. 지진으로 흔들리는 탁자 아래서 첫눈에 반해 연애하고 결혼한 부부는 현재 다정한 말 한마디 없는 사이다. 아내는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기 바쁘고 남편은 아내를 피하기에 바쁘다. 아내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남편은 마성의 카사노바인 옆집 남자(류승룡)에게 아내를 유혹해 달라고 부탁한다. 행복한 가정은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남녀가 혼인을 결심하는 이유는 대부분 비슷하지만 혼인관계가 파탄에 이르는 이유는 실로 다양하다. 그런데
소유권(所有權)이란 어떤 물건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전면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권리이다. 여타의 재산적 권리에 부연되는 구체적이고 건조한 설명과 비교해볼 때 소유권에 대한 수식은 화려하다 못해 현학적이다. 소유권은 혼일(混一)하고 탄력적이고 항구적(恒久的)이다. 소유권은 배타적이고 대세적(對世的)이며 가장 완전한 물권(物權)이다. 설령 소유권에 대해 모른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를 온전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사람을 안도하게 하는가. 영화 『카모메 식당』은 식당주인(사치에)과 우연히 그녀와 합류하는 인물들의 소소한 사연들을 보
20세기 초반 남프랑스의 한 마을에서 유능하고 합리적인 초등학교 교사(조제프)는 가족을 데리고 학교 관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어느 여름 조제프의 아들 마르셀은 이모의 가족과 함께 별장에서 방학을 보내는데, 위대하다고 믿어온 아버지가 부유한 이모부 곁에서 초라해지는 모습을 자꾸 보게 되어 불만이다. 사냥에서도 이모부에게 질까 봐 염려한 마르셀이 사냥터에 몰래 따라갔다가 아버지가 쏘아 떨어뜨린 대왕자고새를 번쩍 들어 올리는 장면이 영화의 원래 제목을 설명해준다(내 아버지의 영광: La gloire de mon père). 영화가 시작한
아이들 그림책에서 동물이 주인공이면 반갑다. 등장인물에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줄거리를 이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종(種)과 언어를 초월하여 토끼와 곰, 호랑이가 아기와 함께 노래하고 춤추면 읽는 어른의 마음도 순화된다. 그런 맥락에서 쿵푸팬더의 세계(사마귀가 호랑이와 대련하고 거북이가 무술 최고수인)를 동화적 허용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있었건만. 갑자기 『쿵푸팬더 2』에서 주인공(포)이 “왜 나의 아빠가 거위인가?”하고 진지하게 고뇌하는 모습은 좀 뜬금없다. 어쨌든 거위는 순무상자 속에서 발견한 아기 팬더를 자기 아들로 삼
1990년대에 영화관에 자주 간 사람이면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영화 시작 전 자주 나오던 다이아몬드 광고가 있었다. 주변이 깜깜해지고 영화 시작을 기다리는 짧은 침묵의 시간이 오면 그 시절 기준으로도 촌스러울 정도로 단순명료한 광고가 거대한 화면을 꽉 채웠다. ‘Just tell me you love me’라는 노래를 배경으로 남자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네자 여자가 눈물을 글썽이고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복적으로 클로즈업되는 중에 묵직한 남자 목소리로 “영원한 사랑의 약속...”운운하는 나레이션이 흘렀다. 아마도 영화 관람객의 성향을
갈빗집 백수 아들(김승우)과 룸살롱에서 일하는 여자(장진영)는 연인이다. 이들은 딱히 바쁘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려 먹고 놀고 싸우며 연애한다. 자기 처지에 대한 걱정도 없이, 밀고 당기기도 없이 오늘만 살 것처럼 사랑하는 모습이 그런대로 보기 좋았다. 그러나 거침없고 의리있고 당당하던 여자는 점점 질투와 체념을 반복하며 구차해지고 남자 또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갈등에 빠지면서 영화는 어두워진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물의 성격과 분위기가 변하는 기점은 남자의 결혼식이다. 결혼, 즉 혼인으로 인하여 쌍방 당사자는 배우
남들 다 못 가진 능력을 가지는 것은 과연 부러워할 일일까. 공부를 잘하거나 노래를 잘하는 정도를 넘어 초인적 능력을 가진다는 것은? 최소한 영화 속에서만큼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히어로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오히려 그 능력 때문에 고통받으니 말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 속 호그와트 학생들의 삶도 고생스럽기 짝이 없다. 그들은 사생활을 보장받지 못하는 5인 1실 기숙사에서 위생상태가 의심스러운 반려동물과 함께 산다. 엘리베이터도 없이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며 수업을 듣고, 무시무시한 양의 숙제와 시험에 시달릴 뿐 아니라 교수들의 매
전쟁터에서 약혼자가 사라졌다. 전사통지서가 날아왔지만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마띨드)은 약혼자(마넥)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영화의 배경인 솜(Somme)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최악의 전투라고 불린다. 이 전투에서 양측 사상자가 도합 120만 명을 넘었기에 최전선에서 실종된 마넥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떤 사람이 사라져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때, 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조치에는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 오랫동안 주소지를 떠나 돌아오지 않을 때, 법률관계가 오랫동안 불확정 상태에 머무름으로써 남은 사람들에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포스터는 사탕처럼 예쁜 분홍색으로 칠한 호텔의 정면으로 꽉 채워져 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생일케이크처럼 달콤한 영화’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를 본 사람은 고개를 갸웃하게 될지도 모른다. 주인공들이 벌이는 활극 속에서 갑작스럽게 죽음의 장면이 툭툭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기분 나쁠 정도로 붉은 입술과 탁한 눈동자의 마담 D가 호텔에 들른 후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호텔 지배인(구스타브)은 살인자로 지목되고 마담의 아들(드미트리)과 킬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탈주와 추격 속에서 마담이 남긴
빌리는 영국 북부 광산지대의 소년이다. 빌리의 집은 똑같은 모양으로 다닥다닥 붙은 비좁은 주택 중 하나이며 아버지와 형은 모두 광부이다. 음악을 좋아하며 늘 뛰어다니는 탄광촌의 11세 소년은 권투 연습장에서 발레 수업을 구경하다 토슈즈를 신게 되고, 결국 왕립발레단의 주연무용수가 된다. 어찌 보면 인간극장에서 소개될 법한 가난한 집 엄마 잃은 소년의 성공기이다. 치매를 앓는 할머니, 엄마의 패물을 전당포에 맡겨 여비를 구하는 모습, 빌리를 떠나보내는 정거장에서 아버지와 형의 오열... 특히 석탄이 떨어지자 엄마가 치던 피아노를 부수
『굿바이 레닌』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될 때부터 동서독의 통일에 이르는 시기(1989~1990)의 동독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의 ‘엄마(크리스티아네)’는 반정부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끌려가는 ‘아들 (알렉스)’을 보고 충격을 받아 쓰러지는데, 혼수상태에 빠진 8개월 동안 서기장 호네커가 사임하고 베를린 장벽은 허물어졌다. 간신히 깨어난 엄마가 심장에 충격을 받을까 두려워 알렉스는 동독이 건재한 것처럼 꾸미기로 작정하고 전방위적으로 거짓말을 시작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발하고 눈물겨운 알렉스의 거짓말들 때문에 얼핏 음울한 내용으
영화『멋진 하루』에서는 헤어진 연인이 별로 낭만적이지 않은 이유로 재회한다. 1년 전 병운(하정우)에게 이별을 고했던 희수(전도연)가 어느 날 갑자기 병운을 찾아와, 헤어지기 전에 빌려줬던 350만 원을 갚 으라고 하는 바람에 그 하루 동안 병운은 자신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꾸어 희수에게 바로 주는 방식으로 갚아 나간다. 병운은 돈을 ‘빌린다’고 하지만 돈을 주는 그 누구도 그에게서 돈을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 것 같다. 병운의 지인들은 진심으로 그를 아끼는 듯, 오히려 희수를 비난하기도 한다(애인이라서, 사랑해서 빌려
“죽음은 늙음이나 아픔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가 반드시 겪게 되는 한 현상이다. 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실존의 범주이다. 죽음은 그가 앗아간 사람의 육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육체를 제거하여, 그것을 다시는 못 보게 하는 행위이다. 그의 육체는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환영처럼, 그림자처럼 존재한다…(중략)…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버릴 때, 죽은 사람은 다시 죽는다. 그의 사진을 보거나, 그의 초상을 보고서도,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 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때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지만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은 때가 있는 것처럼 감동적인 작품이라고 생각되어도 다시 보기는 두려운 영화가 있다. 나에게는 이 영화가 그랬다. 영화의 두 주인공인 매기와 그녀의 매니저 프랭키는 호감 가는 성격을 두루 갖추고 있다. 삶의 소신과 전략이 뚜렷하고 자존심과 염치가 있으며 잇속 따지지 않는 애정도 넉넉히 지니고 있다. 웬만해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까지도. 그러나 이런 두 사람이 결국 불행한 종말을 맞게 된다. 선수가 링에서 피 흘릴 때마다 전전긍긍하던 프랭키. 그랬던 그가 병상에서 호흡기에 의
엄격한 규율이 강조되는 공간에 따뜻한 마음과 음악성으로 무장된 주인공이 나타난다. 갖가지 사연을 가진 인물들은 차츰 숨어 있던 소질을 발휘한다. 주인공은 그들을 하나로 모으며 음악적 성취의 절정을 보 여주고 해피엔딩을 맞는다. 사운드 오브 뮤직, 시스터 액트, 하모니… 영화 코러스(Chorists)도 이와 같은 계 열의 소위 ‘힐링영화’로 분류될 수 있다.주인공(마띠외)은 2차 대전 직후 프랑스의 한 보육원에 음악교사로 부임한다. 돈만 밝히며 교사와 학생을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교장. 책임감이나 열정과 거리가 먼 교사들. 그 사이에서
아내의 세속적이고 경박한 면을 알면서도 깊이 사랑했던 세균학자(윌터)는 아내(키티)의 불륜을 목격하자 콜레라가 창궐하는 중국 오지로 함께 떠날 것을 제안한다. 키티는 불륜 상대가 그녀와의 결혼을 거부하자 배신감과 수치심에 휩싸여 남편과 함께 떠난다. 죽음이 일상에 스며든 극한의 환경 속에서 키티는 뒤늦게 인생의 의미를 숙고하고 남편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극적인 화해는 없었지만 부부는 상대방을 이전보다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데, 그러던 중 키티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아버지일 가능성에 대해 묻는 남편에게 아
한국에서 아기는 태어나면 한 살이다. 새해가 되어 떡국을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한국식 나이이다. 그렇지만 ‘만 나이’라는 것이 또 별도로 있어서 아기는 0세부터 생후 1년마다 차근차근 나이를 먹는다. 조금 영리한 애들은 생일날에 ‘나는 네 살인데 왜 케이크에는 초가 세 개인가’를 질문하고 또 조금 더 영리한 애들은 ‘1월 1일에 이미 네 살이 되었는데 설날(구정)에 왜 또 한 살 더 먹었다고 하는가’에 의문을 품는다. 아이의 예리한 질문에 애매하게 넘어가려는 어른들 앞에서 한국의 아이들은 일찌감치 생(生)과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