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존재를 알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가 발생하고 1년이 지난 지금,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역사상 가장 큰 전염병은 14세기 중엽의 흑사병이었고, 이어 아메리카 대륙의 천연두였다. 항체를 갖고 있지 않았던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1월 말 이전 1억 명의 감염자가 발생할 것이 확실하며 이미 2백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놓았다.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은 학우들의 얼굴조차 제대로 본 적이 없다. 화상을 통해서만 얼굴을 맞대는 수업이 두 학기 동안
1909년 10월 26일. 총성이 울렸다. 하얼빈역 광장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졌다. 70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 총성이 울렸다. 서울 중앙정보부의 안가에서 박정희가 쓰러졌다. 대부분 한국인들은 이토가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초대 통감을 지내며 한국 침략에 앞장섰다가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한 정도만을 알고 있다. 그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법제 마련, 헌법 제정 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가 20년이 넘는 동안 일본의 1,000엔 짜리 지폐에 사용된 것은 그에 대한 일본 사회의 평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모란공원묘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있는 공원묘지이다. 11월 14일 한 모임과 함께 모란공원묘지를 답사했다. 경천 가도의 마석역 근처에 있으니 춘천으로 놀러 가는 길에도 잠시 들러볼 만하다. 아침의 서울은 뿌연 미세 먼지와 함께였으나 그곳에 도착하니 화창한 가을날이 나를 반겼다. 모란공원묘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공원묘지이다. 이와 반대로 망우리공동묘지는 일제가 건설한 공설 묘지이다. 일제는 1912년 을 제정해 개인 묘지를 인정하지 않고 공동묘지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묘지에도 일제의 흔
일본 최고의 관광지는 오키나와이다. 대부분의 청소년은 수학여행으로 한 번 정도 다녀오는 곳이다. 이런 풍광과 달리 오키나와의 근현대사는 오욕과 아픔으로 점철되어 있다. 오키나와의 풍습을 우리에게 잘 알려준 이는 홍어장수 문순득이었다. 1801년(순조 1년) 전라도 우이도의 홍어장수 문순득은 흑산도에서 홍어를 사서 돌아오다 풍랑을 만나 표류를 하게 되었다. 제주도 옆을 지나면서도 해류를 거스르지 못해 결국 도착한 곳은 오늘 날 오키나와 섬인 유구였다. 유구국은 명이 바다를 막는 해금 정책으로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다. 유구는
방탄소년단이 6.25 전쟁을 다시 소환하였다. BTS가 아니라 중국인들이 소환하였다는 것이 맞다. 미국의 코리아소사이어티가 주는 밴플리트 상을 수상하면서 리더인 김남준이 시상식에서 “양국이 함께 나눈 고통의 역사, 수많은 희생을 기억하겠다”고 하였다. 제임스 밴플리트는 미군 사령관으로서 한국 전쟁을 지휘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창립하였다. 이 단체에서는 매년 한미 관계에 공헌한 인물이나 단체에 상을 주는데 올해의 수상자가 방탄소년단이었다. 밴플리트의 아들은 6.25 전쟁에 공군 조종사로 아버지와 함께 참전하였다가
10월 3일은 개천절이다. 한자 그대로 하면 ‘하늘이 열린 날’이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민족 기념일로 채택되었다. 이는 대종교의 절기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독립운동 세력에 대종교의 영향력이 강하였기 때문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발표된 무오 독립 선언은 대종교도인 서일 등이 주도하여 반포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13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고려 말 대학자 이암 선생은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고 하였다. 이어 “만약 영혼에 상처를 주고 신체의 일부를 떼어 가려고 한
1950년 9월 27일 중앙청 건물에 태극기가 다시 올라 갔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에서 서울을 빼앗긴 지 석 달 만에 다시 찾았던 것이다. 전쟁의 시작은 북한군이 차지하였다. 그들은 전쟁 개시 3일 만에 서 울을 점령했다. 너무 빠른 점령에 그들도 놀라 며칠 동안 여유를 잡았다. 전사 전문가들은 여세를 몰아 북한군이 남하를 신속히 하였더라면 아마 전쟁의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라 한다. 6.25 전쟁 전 한반도 상황은 남북의 집권자 모두 무력 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북한을 민주 기지로 만들어 남한을 전쟁을 통
1904년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였을 때, 많은 중국인은 환호성을 올렸다. 중국은 10여 년 전 청일전쟁에서 패한 기억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는데 말이다. 중국인들의 환호는 호시탐탐 중국을 노리는 러시아에 대한 불안감을 반영한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1903년 시베리아 철도를 개통하고, 만주에 동청철도를 놓고 이 지역을 식민지로 하려는 책동을 벌이고 있었다.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는 러시아를 일본이 대신하여 전쟁을 치른다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최석하는 평안도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하고 있었던 21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10여 년 전 일본에서 연구원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임진왜란’을 주제로 심포지엄에서 발표를 하고 난 후였다. 그 때 친하게 지내는 일본 교수님이 다가와 ‘어떤 선생이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데 괜찮겠냐?’고 물어 왔다. 그러라고 했는데 그는 독일인이라고 했다. 저녁 만찬 자리에서 우리 둘은 한쪽 구석에서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자기는 독일에서 역사를 공부했는데, 전쟁 책임을 부인하는 일본을 보고 화가 나서 일본 유학을 왔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정작 자신이 주제로 했던 ‘전쟁 책임과 사죄’는 뒷전으로
1945년 9월 2일. 지금으로부터 75년 전 일요일 일본 도쿄 만의 미주리호 함상에서는 일본의 항복 의식이 있었다. 항복문서에는 외무상이었던 시게미츠 마모루가 전권을 부여받아 서명을 함으로써 아시아·태평양 전쟁은 정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시게미츠 마모루는 만주사변 당시 주중 공사였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구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행사에 참여하였다. 이때 윤봉길 의사의 폭탄에 맞아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였다. 이후 도쿄재판에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4년 7개월의 형을 살다가 풀려났다. 그 후 1955년에는 외무상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무너뜨려 버렸다. 시험의 연속인 관문을 뚫고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들은 대학 정문에 발을 디뎌 보지도 못했다. 2학기에도 마찬가지다. 대학입학보다 치열한 취업 전선에 나서는 졸업생들에게는 더욱 가혹하다. 가르치는 사람이자 기성세대로 여러 학생들을 보기에 정말 민망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2020년 세계는 코로나19 감염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와 같은 전염병의 대유행은 전근대 시기에도 세계사를 바꾸어 놓았다. 서양 중세가 서서히 막을 내려갈때 즈음 유럽을 강타한 것은 우리가 흑사병
8월의 동아시아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해방의 기쁨을 기억한다. 많은 방송과 신문들은 특집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여러 곳에서는 특별 기획 행사들이 열리곤 한다. 19세기 말 이래 지속적으로 동아시아를 침략하고,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인들을 전쟁의 고통으로 밀어 넣은 일본 제국주의의 패전은 동아시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8월을 맞은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 속에 황폐해진 사람과 전쟁터, 그들에 맞서 싸운 독립 전쟁의 영웅들,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던 친일파를 기억하곤 한다. 8월 15일을 일본 정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와 관련한 미국과 중국의 대결이 접입가경이다. 발병 책임을 둘러싸고 시작된 미·중 대결은 중국이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홍콩 국가 보안법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더욱 가열되고 있다. 미국은 홍콩에 대한 경제·통상 부문의 특별 지위를 박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서 시작된 동아시아의 긴장은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미·중간의 진검 승부로 이어지고 있다. 올해 11월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있기 때문에 트럼프는 하락한 지지도를 만회해야 하고, 시진핑은 코로나19 사태로 추락한
5.18 민주화 운동이 벌써 40주년을 맞았다. 박정희가 사망한 후 민주주의의 봄을 바랬던 염원은 신군부의 등장으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저항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신군부는 자신들의 힘에 도전한 대가를 보여주기 위한 장소로 광주를 택했다. 신군부가 최전선의 군대를 빼돌려 진압하고 있음에도 작전권을 갖고 있던 미국은 방조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 사회에 반미 운동이 일어났다. 1945년 일제의 패망 이후 동아시아의 정세는 미국에 의해 컨트롤되었다. 중국을 반공의 방패로 삼으려 했던 미국은 대륙이 공산화되자 일본의 반공 기지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의 5월 7일 기자회견은 한국 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다. 회견의 핵심은 정의기억연대(옛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이하 정대협으로 함)와 이 단체의 대표로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윤미향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당선자를 향했다. 할머니는 정의기억연대가 기부금 및 성금 등을 피해 할머니들에게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 대표인 윤미향 씨는 이런 문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주장했다. 할머니는 1928년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면사 공장에 다니던 16세에 타이완에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하다가 1946년 고국에 돌아
날은 갈수록 풀리지만 코로나19의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과 중국의 책임 공방을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중국에 대해 코로나19로 인한 피해에 배상해야 할 것이라 말했다. 중국은 또한 미국에 강력히 대응하면서 이 병의 시발에 미국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트럼프가 연일 중국 때리기에 나서는 것은 코로나19에 대한 소홀한 대처로 미국 사회에서 받는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올해 대선을 치러야 하는 그에게는 발등에 떨어진 불일 것이다. 중국의 상황 또한 별반 다르지
우리 대학의 도서관과 미래관 사이 작은 공간에 박래전 열사 기념비가 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그 해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의 기념사에서 “1988년 ‘광주는 살아있다’를 외치며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 사망한 스물 다섯 살, 숭실대생 박래전”을 말하며 이들 수많은 5월의 영령의 넋을 위로하고, 책임자 처벌과 진상 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마땅히 밝히고 기억해야 할 것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고 연설했다. 박래전 열사가 분신하기 전 써 놓은 유서 중에 “87년 6월 투쟁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개량의 환상, 안일과 비겁을
동아시아의 선거 4월은 정말 잔인한 달인가. 코로나19가 본격화한지 석 달 가까이되는 데도 제대로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은 확진자 수가 대폭 증가하고 있다. 총리가 긴급사태를 선포하고 긴장을 하고 있다니 빠른 시간에 잡히기를 바란다. 중국에서는 우한 통제가 풀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는 대학들이 온라인 수업을 이어가고, 우리 대학도 1학기는 비대면 수업을 진행하게 됐다. 처음 맞이하는 일이기에 걱정들이 앞선다. 이런 가운데 선거가 눈앞에 다가왔다. 근대 이후 민주주의가 성장하는
3월이 시작되었는데 아직 강좌를 듣는 학생들 얼굴도 보지 못했다. 온라인 수업을 통해 일방적으로 소통할 뿐이다.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감영증-19(이하 코로나19)’ 확산으로 졸업식도 개학식도 없는 해를 맞았다. 이런 와중에 이 감염증으로 세계 경제는 대공황에 견줄만한 침체를 겪고 있다. 그러니 졸업이고 입학이고 기쁨을 만끽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중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각지에서 아시아인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2월 초 터키를 여행 중이었던 딸의 말에 따르면 가게에서 중국인인줄 알고 입장을 금지하려다가 한국인이라 하니 형제
지난주 한국과 아세안의 정상이 모이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포털이나 언론에서 이를 제대로 다루는 것을 보지 못했다. 1면 기사를 장식한 것은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단식 농성이었다. 언론의 쏠림 현상은 모두가 알고 있는 상황이다. 조국 국면에서 몇 장에 걸쳐 지면과 방송을 쏟아대던 언론은 정상회의에 대해서는 잠잠했다. 미국, 중국이나 일본 같았으면 벌써 1면을 장식하고 각종 기사를 쏟아내었을 것이다. 왜 이럴까? 필자는 언론의 무지와 사대 인식 때문이라 생각한다. 언론은 이들 국가의 중요성이나 그들의 문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