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2010년대의 마지막 해이지만 숫자상으로는 2020년대의 첫해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2021년이 2020년대의 첫해이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숫자’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1999년에서 2000년으로 해가 바뀔 때 사람들은 ‘Millennium Bug’를 이야기하며 호들갑을 떨었었다. 컴퓨터가 오작동해서 지구가 멸망할 것같이 과장하던 때가 벌써 20년 전의 일이라니 믿기지가 않을 정도다. 1999년 대재앙이 와서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의 말이 회자(膾炙)되면서 ‘알지 모를’ 불안감이 퍼졌던 기억도
일본이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것이다. 외교권은 국제사회에서 국가를 대표하여 발언하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독립국가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권한이다. 외교권 상실은 국가를 보호할 수 있는 힘을 완전히 잃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 누가 외교권이 없는 국가와 조약을 맺고 협력을 하려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다. 국사 시간에 밑줄을 그으며 그 이름을 외웠던 이준(李儁), 이상설(李相卨),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그의 취임사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 보십시오. 미국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지를 묻지 말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함께 할 수 있는지를 물어 보십시오(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Ask not what America will do for you, but what t
나는 미국 가수 존 덴버(John Denver)의 열렬한 팬이다. 비록 그는 1997년 10월 비행기 사고로 유명(幽明)을 달리했지만 그가 부른 노래의 맑은 멜로디와 서정적인 가사는 고스란히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그의 노래는 한국을 대표하는 목가(牧歌)시인 신석정 선생님의 시를 읽고 듣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향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산 속에 묻힌 바위와 하늘의 구름을 존 덴버는 테너보다 훨씬 여린 목소리로 연주했다. 고등학교 시절 등교하면서 지금은 추억의 아이템이 되어버린 워크맨으로 그의 노래를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뚜렷하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권력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의 권력은 기껏해야 먹이를 가장 많이 차지하거나 짝짓기에서 우위를 선점하는 수준으로 끝난다. 힘겨루기에서 승리한 동물의 우두머리는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면 다시 싸워야하고 싸움에서 지게 되면 아무 불평 없이 서식지의 변방으로 퇴장한다. 지극히 명료(明瞭)한 권력구조가 아닐 수 없다. 우두머리가 되려면 싸움에서 이기면 된다. 싸움에서 진다고해서 잔인하게 보복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지도 않는다. 싸우다 깊은 상처를 입고 죽을지언정 싸움이 끝나고 나서는 생명을 유지하는데
노르웨이는 피요르드(Fjord)의 나라다. 가장 유명한 송네(Sogne) 피요르드부터 하르당에르(Hardanger), 뤼세(Lyse), 게이랑에르(Geiranger) 피요르드까지 국토의 많은 부분이 피요르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피요르드가 노르웨이고 노르웨이가 피요르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르웨이를 여행하려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피요르드가 주는 절경(絶景)을 보기위한 것이 첫 번째일 것 같다. 천천히 움직이는 유람선 위에서 자연이 만들어 낸 기암괴석과 폭포를 보고 있노라면 장자(壯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이 어렴풋이나마 이
히딩크 감독으로 친숙한 네덜란드를 우리는 은연중에 ‘오렌지 군단’이라 부른다.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이 언제나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고 나와 환상적인 슛을 날려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네덜란드 사람들이 특별히 오렌지를 많이 먹고 좋아해서 그런 것일까.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부르는 이름에는 많은 역사적 에피소드가 깃들어 있다. 그런 것들을 하나둘씩 알아나가는 것이 여행의 묘미이기도 하다. 여행은 물리적인 이동일 수도 있지만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인문학의 저장 공간이기도 하다. 오래 걸어서 발이 아파도 여행을 계속 할 수 있는 원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들에서는 어디든 어시장(魚市場)을 볼 수 있다. 어부들이 갓 잡아온 각종 해산물을 즉시 요리해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노르웨이의 현재 수도인 오슬로에서 옛 수도인 베르겐(Bergen)으로 이동하면서 감상했던 피요르드(Fjord)의 감동은 밥을 제대로 먹는 것조차 방해했다. 눈이 즐거우니 다른 감각이 무뎌진다는 것이 적어도 나한테는 실증(實證)된 것이다. 몽환적인 피요르드의 모습이 다른 욕구와 감각을 잠시 내려놓게 하다니.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그래서인지 베르겐에 도착을 하니 엄청난 허기(虛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의 생애는 불행으로 점철(點綴)되었다. 더 이상 불행하라고 해도 불행할 수 없는 뭉크의 인생을 살펴보면 누구든지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느낄 것 같다. 뭉크보다 불행할 수 없음을 모든 사람들이 직감하게 되는 것이다. 뭉크는 한없는 사랑을 받아야할 다섯 살 때 어머니를 결핵으로 잃었다. 그리고 감수성이 한창 예민할 때인 청소년기에 누나마저 병으로 죽게 된다. 뭉크가 성인이 된 후에는 아버지가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났고, 여동생도 우울증으로 죽기 전까지 치료를 받았으며, 남동생도 서른 살의 나이로 죽었다
국가의 이름 자체가 ‘Iceland’다. 얼마나 얼음이 많으면 국가의 이름에 ‘얼음’이 들어간단 말인가. 이름으로만 봐서는 얼음 밖에 없을 것 같은 아이슬란드에 가려고 벼르던 것이 몇 번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안토니 가우디의 작품과 에스파냐 와인의 맛에 빠져서 일정을 다음으로 미뤘고, 베를린에서는 수많은 박물관을 보느라 원래의 계획에서 자연스레 없어져 버렸다. 유럽의 변방국(邊方國)으로 가는 길은 교통수단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계속 망각되고 삭제되어서 한없이 어려웠던 것이다. 막상 간다고 해도 ‘
‘Many a little makes a mickle.’ 우리말 속담 ‘티끌모아 태산’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이다. 아무리 큰 것도 결국은 작은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던가. 물 한 방울이 모여서 호수를 이루고 강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학창시절 ‘벼락치기 공부’를 했던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꾸준히 무엇인가를 하는 사람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사회에 나와서는 그런 걸 더 느낀다. 임기응변(臨機應變)에 능한 사람들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업무를 준비한 사람들이 결국에는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비단 개인의 일이 아니라
일본의 설치 미술가 쿠사마 야요이(草間彌生)는 이 작은 섬의 곳곳에 호박을 남겼다. 노란 호박도 있고 빨간 호박도 있다. 섬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전혀 매칭이 되지 않는 생뚱맞은 모양의 거대한 호박. 그런데 이 호박을 보러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돈이 되는 호박’인 셈이다. 나는 예술과 돈이 결부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예술은 때때로 한 도시를 살리는 엄청난 부를 창출한다. 그녀가 섬의 미래가치를 예측하면서 각기 다른 크기의 호박을 설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때 구리 제련소가 있었던 투박한 섬 나오시마(直島)가 일본을 대표하는
미세먼지가 우리 생활을 괴롭히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보니 대화마저 단절될 것 같은 기분이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은 캠퍼스를 활보하는 학생들의 얼굴을 하루 종일 마스크가 감싸고 있다. 각종 매체에서는 ‘고기능 마스크’를 광고하고 있고, 휴대용 공기청정기도 잘 팔린다고 하니 예전에 우스갯소리로 했던 ‘공기도 사서 마실’ 시대가 현실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청정한 공기가 그립다. 청정한 공기로 휩싸인 독일의 도시로 떠나고 싶어진다. 독일 남서부 지역의 울창한 삼림지대 슈바
아주 옛적 아이가 없는 노부부가 냇가에서 떠내려 오는 큰 복숭아를 가져와 쪼개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다. 노부부는 아이가 없던터라 기쁜 마음으로 아이에게 모모타로(桃太郞)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정성껏 키 웠다. 장성한 모모타로는 귀신이 출몰하는 섬으로 ‘귀신퇴치’ 모험을 떠나게 되고, 가는 길에 만난 개, 원숭 이, 꿩에게 수수경단을 나눠주고 그들을 부하로 거느리게 된다. 귀신과 싸워 승리를 거둔 모모타로는 귀신 의 보물을 가지고 돌아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일본인이라면 모두 아는 모모타로 이야기의 줄거리다. 일본에도 우리나라만큼이나
독일은 제2차 대전 이후 분단을 경험했다는 측면에서 대한민국과 비슷하다.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되는 과정과 대한민국과 북한으로 분단되는 과정은 사뭇 다르지만 열강(列强)들의 이해가 중첩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고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 상태라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흥미로운 것은 대한민국의 개천절(開天節)이 10월 3일이어서 중요한 국경일이라면, 독일의 10월 3일도 ‘독일 통일의 날(Tag der Deutschen Einheit)’로서 독일인들에
돈키호테(Don Quixote)는 대문호 세르반테스의 소설이면서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작품 속에서 그가 보여준 다분히 엽기적인 행각은 그의 이름을 사회 현상을 진단하는 용어로 만들었고, 특히 심리학에서는 현실을 무시하고 공상에 빠짐으로써 분별없이 행동하는 성격의 유형을 지칭한다. 우리들은 “그는 돈키호테형(型)이다”라는 표현을 쓰면서 충분한 생각 없이 행동을 앞세우는 사람을 묘사하곤 한다. 발음도 익살스러운 이름 ‘돈키호테’는 에스파냐 문학의 진수(眞髓)를 넘어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그럼에도 친근한
여행하는 도시에서 기대하는 것들은 꽤 다른 층위(層位)를 이룬다. 쇼핑, 미술관, 건축물, 와인, 스포츠, 심지어 환락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도시를 여행하는 각기 다른 테마와 이유가 있다. 더 나아가 쇼핑 중에서도 가방, 미술관 중에서도 호안 미로 미술관, 건축물 중에서도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라는 식으로 세분화 된다. 자신이 의도했던 유무형의 것을 보고 느끼면서 여행의 만족감은 증폭된다. 여행의 만족감은 차곡차곡 마음에 쌓여 있다가 그 도시를 다시 찾게 되는 원동력으로 변한다. 스페인은 여행자에게 이런 원동력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거장(巨匠)들은 거장의 반열에 오르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습작(習作)을 남긴다. 습작을 통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고, 자신만의 스타일이 발전하여 다른 사람과는 확연하게 구별이 되는 영역을 구축하게 된다. 한 예술가가 거장이 되면서 그가 남긴 습작들은 더 이상 습작이 아닌 ‘명작(名作)’의 대우를 받게 된다. 습작이 거장을 만들고 습작은 거장을 통해 명작이 되는 것이다. 거장들의 습작은 ‘단순한 연습 작품’이 아닌, 거장의 ‘초기 작품’으로 인식되어 ‘작가론’의 한 페이지를 구성하게 된다. 나아가 거장들의 작품이 있는 도시들도 덩달아
많은 사람들이 ‘천재(天才)’ 건축가로 부르는 안토니 가우디는 ‘후천적인 천재’다. 후천적인 천재라는 말 자체가 비논리적이지만 나는 이런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사실 천재란 선천적으로 하늘로부터 재능을 부여받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던가. 예컨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처럼 여섯 살 때 유럽의 여러 도시로 연주 여행을 다니고 청소년기가 끝날 무렵에 이미 거장(巨匠)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진정한 천재인 것이다. 후천적인 천재란 말을 사용하였으니 모차르트를 ‘선천적인 천재’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천재라는 공통
대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대도시의 위용(威容)에 가려졌던 ‘작지만 아름다운 도시’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한적함’을 선물로 주는 작은 도시들은 여행의 또 다른 묘미가 된다. 관광대국의 면모를 제대로 갖춘 스페인은 큰 도시건 작은 도시건 간에 언제나 여행하는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수도(首都)만 보고 홀연히 떠나는 나라들도 많지만 스페인은 큰 도시를 중심으로 펼쳐진 인근도시들까지 촘촘히 봐야하는 나라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의 테마와 기술이 점점 세분화되는 요즈음엔 소도시만을 전문적으로 여행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