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위기가 널리 그리고 자주 언급되고 있는 터에 새삼 철학함의 진정한 자세가 절실해 보이는 요즈음이다. 고대 그리스 이래로 우리는 흔히 철학을 정의하여 그 말이 지칭하듯,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다소 간에 막연하게 들리는 이런 진부한 표현보다는 ‘적절한 물음의 제기와 더불어 답에 대한 합리적 모색’이 ‘철학함’의 본질이라고 여겨진다. 이는 또한 ‘현재 안고 있는 문제와 미래에의 전망’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철학함’에 다가가는 일이 구체적인 삶을위해 비교적 내실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은 끊임없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및 국가, 자연,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물음에 직면하는 일이며, 아울러 그에 대한 적절한 답을 찾는
나는 살아갑니다. 그러나 또한 죽어갑니다.("Every one of your heartbeats is the drum beat to your own funeral." by E.Z.) 이 글귀는 어떤 웹사이트에서 본 것인데, 보는 순간 마음에 와 닿아 기록해뒀습니다. 불행히도 말씀하신 분의 정확한 이름은 알지 못하고 단지 이니셜만 알 뿐입니다. 직역해 보면 "그대의 심장박동 소리 하나하나는 바로 그대의 장례식을 알려주는 북소리이다." 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문구는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동시에 죽어간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죽으면 살리라는 말씀은 실제 삶에서도 참입니다. 내 자아가 죽고 없으면 두려움도 없어지고, 수치심도 없어지고, 무서움도 없어지고, 상처도 없
취업난이 심화되고 있다. 구직자에게 필요한 정보라며 ̒취업 스펙 6종 세트 혹은 8종 세트̓니 하는 말들은 취업 준비생들을 현혹하고 구직자들은 이런 스펙 마련에 모든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붓는다. 최근 보도자료는 직군별로 직무적합성을 갖춘 인재 위주로 선발하겠다고 한다. 기업에서 원하는 인재상은 시시각각 변화하며 이를 갖추지 못할 때의 불안감은 구직자를 압도한다. 국내 기업, 외국계 기업 모두 커뮤니티 향상과 발전을 위해 특정한 인재 유형을 원하며, 이것이 “취업 잘되는 스펙 혹은 유형”으로 늘 소개된다. 그러나 실상은 스펙이 대부분 비슷하므로 진정한 선발의 잣대가 되지 못하니, 자신의 역량과 전문성을 다양한 사람과 공감하고 소통하며 적절히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 인재를 선발하려 하는 것이다.
3월, 새 학기의 싱그러움이 캠퍼스 곳곳에서 발견되고 느껴지는 시기이다. 겨울 동안의 묵은 것들을 다 털어내고 보내고 봄을 맞이하는 달이기도 하다. 우리 숭실에도 이 달에 대학 새내기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는 1학년부터, 새로운 결심을 하고 새 학기를 다소 비장하게(?) 맞이하는 재학생들까지 다양한 삶의 경험들을 기반삼아 새롭게 출발하는 숭실인들의 활기찬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 시기에 즈음해, 본인은 숭실의 구성원들이‘인생이라는 드라마’에 대한 답을 찾아가기를 바란다. 한 편의 드라마와 한 편의 영화가 배우와 감독, 작가 등 여러 사람들에 의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한 편의 작품이 되듯 우리의 인생 역시 각자의 자원에 의해 정말 소중하고 독특한 나만의 드라마, 나만의 작품
30년 봉직한 숭실에서 은퇴한지 벌써 일 년이 가까워 온다. 그 오랜 세월동안 숭실은 나의 학문적 정체성의 든든한 바탕이었고, 나 또한 부족한 능력이나마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차세대 교육에 일조했다는 뿌듯한 자부심이 있다. 숭실은 어떤 면에서는 나에게는 제2의 모교였다. 퇴임에 임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기도도 많이 했다. 그래서였을까. 참으로 어려운 과정을 거쳐 명예교수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은퇴는 한 개인에게는 노년의 나이에 새로운 스타일의 삶을 정립하고 적응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도전을 내포한다. 한 학자로서는 지금까지 해왔던 연구와 쌓아온 지식과 경험을 지속해야 할 책임이 남는다. 대학의 입장에서는 명예 교수들은 여러모로 학교를 지지하는 응원군단이자, 그들의 지속적인 학문 및 사회활동은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학생들의 얼굴을 맞대고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많지 않지만, 확실히 그들의 3월은 현재 나의 3월보다 힘들고 내가 20대였을 때 맞이했던 3월보다는 더 생기가 줄어있다. 수많은 경쟁으로 인한 피로감이학생들의 마음 속에 결석(結石)이 되었고 그로인해 나는 그들이 개인의 삶 그 너머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곤 한다. 대학에 입학을 하고 대학 생활을 이어가고 전공과목을 수강하고 하는 일들은 결국 나 개인의 영달을 위한 일이다. 내가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들이는 노력은 결국 이 경쟁 사회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 계층의 피라미드 위에 우뚝 서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의존재가가지는 의미는무엇인가? 우리는왜 사회를 구성하
우리 역사 반만년을 통틀어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대라는데 행복 지수는 최악이라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 행복한 이유는 눈을 씻고 봐도 드문 반면 불행한 이유는 차고 넘친다. 불행이 너무 많아 그걸 기본적인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지경이니 우리는 불행하고 또 불행하다. 다들 행복을 느끼고 살고 싶어 한다. 지난 밤 달콤한 꿈을 기억하는가. 그 꿈속에서 순간의 행복을 느끼고 그 꿈을 되새기며 꿈에서 깨는 것을 아쉬워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지금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꿈을 꿀 수 없기 때문이다. 꿈을 꿀 수 없게 되는 것은 구체적이고 현실적 이유들을 자각하면서부터다. 막막한 현실은 꿈을 방해한다. 팍팍한 삶이 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를 가로막는다. 그러나 꿈을 꾸지 않는다면 막막하고
혹시 알고 있을까?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과 학 교 관계자분들도 잘 모르고 계신 것 같다. 내가 이 학교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은 2012년 3월 이었다. 마침 유명세를 한껏 치루고 있었던 (건축 계에서만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신학생회관’이 준공된 직후였다. 그래서 ‘꼭 한번 이 건물을 보러 와야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신학생회관은 재미있지만 파악하기는 쉽지 않은 건물이다. 처음에는 복잡하고 층과 공간을 찾기 어려워서 썩 좋은 반응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 가 거듭돼 3년여가 지난 지금, 신학생회관은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왜냐하면 ‘즐거운 경 험’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즐거움을 주는 이면에는 이 건축물은 대단한(?) 전략을 가지고 설계했다는
우리나라는 과거 40년 넘게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어 왔으며, 2013년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4위의 경제대국에 진입했다. 그렇지만 대학 졸업생의 취업률은 낮아지고 있어 걱정이 크다. 교양과목인 재무설계를 수강하는 학생 51명에게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인가 물어본 결과 41명이 취업이라고 답변했다. 게다가 3~4학년의 73%가 졸업을 유예하지 않고 취업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다. 이렇게 취업이 어려워진 이유 중 하나는 학생들이 원하는 직장이나 직무와 사회에서 필요한 일자리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대부분 대기업이나 금융회사의 관리직, 공인회계사 같은 전문직 혹은 공무원 등 대우가 좋고 안정적인 직장을 원한다. 그런데 중소기업은 회사가 성장하는 데 반해 그에 맞는 대졸 직원을 채
정부의 발전방향으로 제시된 ‘문화융성’이란 용어가 처음엔 낯설게 느껴졌다. ‘문화가 크게 융성하다’는 문장은 있지만 ‘문화융성’이라는 단어는 사전에서조차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문화융성의 의미는 두 가지이다. 인문, 예술, 콘텐츠, 체육, 관광 등 문화 분야의 역량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킨다는 의미와 문화를 정치, 경제, 사회, 기술, 공동체, 국제교류 등과 연계시켜 국가 경쟁력을 향상시킨다는 의미이다. 문화의 가치를 일깨우고 우리의 삶과 사회를 문화적으로 충만하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망까기, 말타기~놀다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자전거 탄 풍경’이 부른 ‘보물’이란 곡이다. 사실 어느 개그프로의 주제가로 불려 더 인기가 많았던 곡이었다. 이 곡의 가사를 듣다 보면 어린 시절 생각이 난다. “누구야~놀자”라는 친구들의 외침에 나가면 해질 무렵, 엄마의 부름을 받고 하나둘씩 집으로 귀가할 때까지 친구들과 어울려 놀이를 열심히 땀흘려가면서 했었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 필자는 완전 서울 토박이인데도 이런 어릴 적 추억이 있었는데 다른 이들의 어릴 적 놀이에대한 향수는 더하리라 본다. 하지만 요즘에는 어떠한가? 방과 후 아이들은 여러 종류의 스쿨버스를 나눠 타고 깜깜해질 때 까지 부모님이 짜준 스케줄을 따라 생활하는 모습이 참 많이 눈에 띈다.
30년 전 1월 발행된 조지오웰의 『1984』는 언제부터인가 세상과 문을 닫고 싶을 때 꺼내보는 책이 되었다. 당시 어머니께서 2,800원을 주고 구매하여 물려주셨던 이 책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에게는 그 어떤 가치 있는 물건보다 소중하게 남아있다. 책 자체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나는 30년이 지난 이 책의 향기가 참 좋다. 누렇게 바랜 책장의 테두리 부분과 이를 넘길 때마다 들리는 ‘스스슥’ 하는 소리가 좋다. 촌스럽기까지 한 표지의 파란색과 책 중간 중간에 섞인 한자와 오타도 나는 참 좋다. 책장을 넘기고 있자면, 초등학교 시절, 미지의 세계와 이해되지 않는 내용을 꾸역꾸역 읽었던 어린 아이의 모습도 스쳐 지나가고,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가보지 못한 세상에 대해 웃고 떠들던 문학
일교차가 커지면서 교정의 나무에는 물기를 잃어가는 이파리들이 빽빽하게 달려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나뭇잎들은 부스러질 듯 흔들리며 각각의 색깔로 물들어 간다. 잎이 활동을 멈추면 엽록소의 자가분해 과정을 거쳐 본래 녹색에 가려 보이지 않던 색소들도 보인다고 한다. 잎이 말라들면서 가장 본질에 가까운 색만을 남기고 시퍼런 물기를 날려버리니, 그야말로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단풍은 초록보다 더 선명하고 풍성한 색으로 땅 위에 내려온다. 세상의 어떤 죽음이 이렇게 정갈하고 화려할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사계(四季)를 맞닥뜨리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봄이 되니 추운 날 돌아가신 것이 안타까웠고 여름이 되니 폭염에 힘겨워하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 바람이 차가워지
지난 주 개교 117주년을 기념하는 흥겨운 학교축제가 3일간 열렸다. 캠퍼스 곳곳에서 학생들의 끼와 열정이 넘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날씨도 쾌청하여 가을축제의 분위기를 한층 돋우었다. 평소에 한산하던 형남공학관 앞뜰이 갑자기 장터로 바뀌었고, 정문에서는 둥그런 조형물을 무대배경삼아 그럴듯한 야외공연장이 차려지고, 형남공학관 구름다리 옆 자투리 공간에서도 작지만 아름다운 공연이 이어졌다. 마치 함박눈이 펑펑 내려온 캠퍼스를 하얗게 덮었던 지난 겨울 어느 오후처럼, 시간과 공간을 전도(顚倒)시키는 축제의 달뜬 기운이 여기저기 두텁게 내려앉았다. 문득 내가 대학 다닐 때가 떠오른다. 서슬퍼런 제5공화국 시절, 독재에 저항하는 시위의 살풍경한 모습과 운동권학생과 비운동권학생 사이에 드리워진 갈등은 대
어린 시절 만화에서 뇌가 아주 큰 미래의 인류 모습을 본 기억이 난다. 아마도 정신 활동을 많이 하고 상대적으로 육체 활동은 로봇이 대신할 것이라는 전망을 바탕으로 그려진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이라면 엄지와 검지 손가락만 길어진 모습이 인류의 미래가 아닐까? 지금보다 머리는 훨씬 작아진 상태로 말이다. 난 왜 이런 상상을 하고 있을까? 컴퓨터 프로그래밍 관련된 과제가 나오면 많은 학생들이 인터넷 검색을 먼저 한다. 검색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검색의 결과가 나의 생각의 방향과 범위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 문제다. 검색 결과를 본 후에는 나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하기 어려워진다. 컴퓨터의 구성 요소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CPU와 Memory이다. 각각 계산하는 역할과 기억하
특정 종교를 믿든 아니든, 우리는 모두 나름의 신을 섬긴다. 내 마음대로 산다고 느끼는 순간에조차 우리는 누군가의, 혹은 무언가의 종으로 살아간다. 내 욕망이 나 아닌 누군가에 의해 자극된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혹은 그 불편한 사실에 애써 눈을 감는 것일 수도 있다. 프랑스의 사상가 르네 지라르는 우리 욕망의 모방적 성격에 대해, 그리고 그 욕망이 빚어내는 경쟁적 관계와 거기서 생겨나는 폭력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내 ‘원하는’ 많은 것들이 실은 나의 진정한 필요와 무관한, 그저 타인의 경쟁을 위한 방편일 뿐이다. 그래서 그 경쟁 관계가 해소와 더불어, 내 욕망 또한 사라진다. 마치 그토록 열망하던 여인을 손에 넣는 순간, 그녀를 향한 내 열정이 식는 것처럼… 여학생들은 대개 신랑
우리 집도 지난 유월 매실을 담갔다. 재작년엔 옹기 단지에 담갔는데, 올해엔 유리병을 사용하였다. 지난해 사용했던 옹기는 벽의 미세한 구멍으로 설탕물이 스며들었는지, 아무리 씻어내도 곰팡이가 핀다. 곰팡이라면 천적처럼 미워하는 아내는 마지못해 전통 옹기를 버리고 터키제 유리병을 사용하였다. 과일이 익을 때는 효소 반응이 왕성히 일어나면서 각종 당과 유기산을 만든다. 익으려 하는 매실을 설탕에 담가 높은 기온의 여름철에 보관하면, 나무에서 익을 때 일어나는 효소 반응이 설탕-매실 혼합액에서 일어나게 된다. 보관 중 기체도 제법 뽀글뽀글 올라왔다. 특히 황매를 담은 그릇에서 탱탱하게 부풀어 떠오른 매실이 많았는데, 꺼내어 씹어보니 기체로 꽉 차 있었다. 유기산을 만드는 생화학 반응이 대체로 이산화탄소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인 헤밍웨이가 스페인내전을 배경으로 쓴 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인 로버트는 스페인 파시스트를 상대로 게릴라전에 참여한다. 이 전쟁에서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고 큰 공적을 세울 수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로버트는 참여하고 있는 전쟁과 삶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마지막까지전장에 남아 임무를 수행한다. 요즘 학교와 사회,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이 오래된 소설이 떠올랐다. 라는 이 마음 깊은 곳을 흔드는 소설, 특히 제목은 법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칼 르웰린(Karl Llewellyn)의 법해석과 한편으로는 연관되
세상을 떠난 로빈 윌리엄스는 영화 에서 이렇게 외친 바 있다. “카르페 디엠! 이 구절은 로마의 에피쿠로스 학파 시인 호라티우스의 “현재를 잡아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의 부분 구절이다. 영화에서 이대사는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불안해하는 많은 학생들에게 용기와 힘을 준 명대사이다. 많은 학생들과 면담을 하면서 대학생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대학생활에서 ‘특별하게 하고 싶은 것’이나 ‘특별하게 하는 것’은 없고 단지 취업만을 위해 고민한다. 더해 향후 꿈은 “대학 졸업 후에 공무원 혹은 공기업, 아니면 대기업에 취업하고 40대 후반에 그만두면
다가오는 6월 4일은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의원 및 시도교육감을 선거하는 날이다. 선거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이 권력을 직접적으로 창출해 내는 가장 중요한 권리행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권자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데, 이러한 선거의 기권행위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위반이라 생각한다. 독일의 법학자 예링은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투쟁하지 않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의무위반이라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권리가 침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투쟁하지 않는다면 똑같은 침해가 이웃들에게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음으로 형편없는 후보자가 당선되어 4년 동안 지방자치단체나 교육현장이 피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