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장애와 시각장애, 두 개의 장애를 가진 소년의 학창시절은 악몽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함께 딱지를 치던 친구들은 눈이 보이지 않는 그를 속여 딱지를 모두 따가기 일쑤였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장애로 꿈을 포기하는 친구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이런 암담한 현실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밝은 세상으로 꺼내 주길 바라던 그는 결국 직접 정치인이 돼서 그가 겪었던 어두운 세상을 바꿔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소년은 자라 장애인의 권익을 대표하는 장애인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었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공동대표이자 제19대 장애인 비례대표 국회의원인 최동익(사회복지·81) 동문을 만났다. 어떻게 장애를 가지게 되셨나요? 저는 두 개의 장애를 갖게 됐어요. 첫 번째로 두 살 때 의료
‘혜화역 근처에 있는 노들장애인야간학교(이하 노들야학)에서 인터뷰이를 만나기로 한 날, 그를 찾았지만 학교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그에게서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여의도에 있어요. 이룸센터” 당황하긴 했지만 혜화에서 여의도가 먼 거리도 아닌지라 국회의 사당역에 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이룸센터에 도착하자 건물 앞에는 농성을 위한 흰색 텐트가 마련돼 있었다. 영하 6도의 날씨에 찬바람까지 쌩쌩 부는 날 그는 장애인들과 함께 “장애인 연금 공약이행! 장애인 등급제 폐지!”를 외치며 그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고 있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이자 노들야학 교장인 박경석(사회사업·91) 동문을 만났다. 잘 놀다 죽는 것이 꿈이었다 인터뷰를 가기 전 그의 책 『지금이 나는 더
CBS 아나운서 신지혜(화학·87) 동문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가 대학교를 졸업하기까지 걸리는 최소 시간, 16년. 그 16년이라는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하나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이어온 아나운서가 있다. 매일 오전 11시면 어김없이 ‘온에어’ 등에 불이 켜지는 CBS의 한 스튜디오에서 ‘신지혜의 영화음악(이하 신영음)’이 시작된다. 영화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영화음악을 들려주는 이 라디오 프로그램은 신지혜(화학·87) 동문이 제작과 진행을 모두 도맡아 해오고 있다. 1998년 2월부터 16년 동안 한결같이 신영음을 지키는 ‘신영음 지기’로 불리는 신 아나운서는 오늘도 역시 마이크 앞에 앉는다. 1994년 CBS에 입사해 지금까지 아나운서 일을 계속하고 있는데, 방송 일을 하기로
‘사람이 살아있을 때 할 수 있는 생체 기증은 신장, 간, 골수와 헌혈이 있다. 국내에서 신장과 간을 기증한 사람은 30여 명 가량 되지만 골수까지 기증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그 유일한 이가 바로 최정식(사회복지대학원·04졸) 목사다. 그는 30세의 만성신부전 환자를 위해 자신의 한 쪽 신장을 기증했고, 간경화로 고생하는 50세 주부를 위해 자신의 간 일부를, 18세 백혈병 환자에게 골수를 기증했다. 여기에 2006년까지 무려 186번의 헌혈을 했다. 이를 인정받아 지난 10월 4일(금) 보건복지부와 KBS가 주최한 ‘2013년 대한민국 나눔국민대상 시상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은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헌혈을 통해 첫 생명 나눔을 실천하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지난 1979년 그는
소년은 부모님께 십자수 등을 하는 수예부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수예부에 들어갈 거예요.” 소년은 부모님께 혼이 났다. “남자가 수예부가 웬 말이냐.” 그렇다. 그는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아이였다. 그의 그런 성격을 친구들과 부모님은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마초적임, 권위, 강인함을 요구했다. 시간이 흘러 소년은 어른이 되었고, 사회가 남자들에게 강요하는 남성성을 타개하고, 남성 여성이 진정으로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연구자이자 운동가가 되었다. 한국남성학회 회원이자 남녀공동병역의무추진위원회의 대표를 역임했던 남성운동가 한지환(사학·04) 동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숭실대는 그에게 학문의 터였다 한지환 동문은 2004년 숭실대 법학과에 들어왔다. 1년 후 그는 여느 남학생
‘수면 5시간, 밥 먹고 화장실 가는 2시간, 그리고 책 보며 공부하는 17시간. 이 모든 시간들은 누군가의 하루 일과였다. 그에게는 오로지 책과 공부가 전부였다. 그렇게 공부에 올인한 결과 본교 행정고시 첫 합격자가 됐고, 그 길로 여러 자리를 역임하며 저작권법의 ‘대가’가 됐다. 지금은 대한민국 대표 국립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의 관장인 임원선(행정·81) 동문을 만나 공부의 끈을 놓지 않는 그의 도전적인 삶을 들어보았다. 교련복이 닳을 때까지 공부했던 대학시절 숭실대학교 행정학부에 재학하던 시절, 그는 4년 동안 단 한 번도 장학금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였다. 어쩌면 그에게 장학금은 당연한 것이었고 당연해야만 했다. 장학금은 그에게 있어 목적이 아니라, 당시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그가
넘쳐나는 아마추어 아티스트들 사이에서 원석을 골라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원석들에게 보석이 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다. 이들의 이름은 ‘프로튜어먼트(Proteurment)’. 아마추어 아티스트에게 공연 기회를 마련해주고 이들의 음악적 성장을 돕는 ‘착한’ 매니지먼트다. 현재 수직적인 구조가 지배적인 음악시장을 수평적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프로튜어먼트 최인구(컴퓨터·4) 공동대표와 이석호(글로벌통상·4) 팀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프로튜어먼트’를 창조해내다 프로튜어먼트는 신조어다. ‘프로페셔널(professional), 아마추어(amateur), 매니지먼트(management)’의 합성어로 ‘프로를 지향하는 아마추어를 위한 매니지먼트’를 뜻한다. 프로튜어먼트는 오직 음
하얀색 셔츠와 넥타이가 잘 어울렸던, 단정한 인상과 온화한 미소를 가진 그는 긴장하고 있는 기자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이른 시간에 약속을 잡았음에도 기자를 대하는 그의 행동에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배려가 느껴졌다. 사랑의열매로 통하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교육원장을 맡고 있는 김누리(사회복지•90) 씨는 13년째 어려운 이들의 동반자를 자청하고 있다. 종합복지회관의 현장 업무에서부터 대형복지재단의 교육원장까지, 세상을 온정으로 채우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교육계의 격동기에 사회복지를 꿈꾸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89년. 때는 이른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1세대가 등장해 활동하던 교육계의 격동기였다. 고등교육은 불안했고 그 피해는 학생들에게 그대로 전가됐다.
전남 담양의 작은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무작정 상경 길에 올랐다. 서울을 꿈꿨던 그에게 도시는 냉정했고 식당 종업원, 여관 심부름꾼, 의류 공장 공원 등 변변치 못한 직업을 전전했다. 하지만 그는 빈곤을 숙명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 그 돈으로 검정고시를 치르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장을 받았다. 그 후 본교 법학과에 입학한 그는 제23회 사법고시에 합격하게 된다. 이런 그에게 사람들은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한다. 이제는 어엿한 대형 로펌의 대표 변호사로 ‘용’이 된 그는 바로 박영립(법학·74) 동문이다. 혹독했던 나의 도시, 서울 그는 1967년 2월, 14살의 나이로 추운 겨울날 서울로 올라왔다. 아메리칸 드림으로 많은 한국인이 미국으로 떠났듯이,
마감이 30분밖에 남지 않은 오후 5시 30분의 편집부. 그곳엔 웃음소리 하나 없었다. 오직 터질듯한 긴장감만이 편집부를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긴장 속에서 편집부원들은 각자 원고를 앞에두고 최종 마감을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현장 속에 데스크에 앉아 편집부를 지휘하며 내일 나갈국민일보 1면을 최종 검토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의 전신인 의 23번째편집국장이자 현 국민일보 종합편집부 부국장인 정충교(사학·77) 동문이었다. 감각과 경험이 버무려진 편집 실력 그는 2002년 대통령 선거 특집 레이아웃 부문 편집상, 2002년 한국 편집 기자협회 월드컵 사진편집 우수상, 2003년 한국 편집 기자협회 레이아웃 부문 한국편집상, 20
지난 6월 그는 견디기 힘든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2013 FIFA U-20 남자 월드컵 쿠바와의 첫 경기가 있기 사흘 전이었다. 배가 아파왔다. 진단 결과 맹장염이었다. 선수단에서 하차해야만 했다. 3년간의 준비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억울하고 분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결국 그는 7월 22일(월) 개최된 제44회 전국추계대학축구연맹전에서 빛을 발했다. 그의 맹활약과 축구단의 피나는 노력으로 본교는 끝내 우승을 차지했다. 각종 언론은 그를 해결사라고 치켜세우며 호평을 쏟아냈다. 한국 축구계의 유망주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그는 숭실대 축구단 소속의 김승준(생활체육·1) 선수다.전국추계대학축구연맹전에서의 우승 지난달 6일(화) 강원도 태백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전국추계대
△ 국내 1호 유학파 만돌린 연주자 김병규(전기·78) 동문 자그마한 기타처럼 생겼으나 음악 소리는 마치 어린 아이의 목소리 같은 악기 만돌린. 이 악기를 배우기 위해 국내 최초로 이탈리아에 유학을 떠난 사람이 있다. 그 주인공은 국내 1호 유학파 만돌린 연주자 김병규(전기·78) 동문이다. 귀국 후 만돌린 음악회를 준비하기 위해 교회와 학교 등에 도움을 구하려 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던 그가 지금은 유명 지휘자들과 연주를 한다.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도 자선 연주회를 70회째 열고 있다는 그에게 만돌린 연주자로서의 음악 인생을 들어봤다. 만돌린은 쉽게 접할 수 있는 악기가 아닌데 어떻게 접하게 되셨나요? 중학생 때부터 지금의 세시봉 때문에 기타를 좋아해서 대학 입학하자마자 기타 동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