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조금 더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 본지는 성차별 및 성 소수자에 관한 이슈들을 보도하곤 한다. 하지만 매번 느껴지는 것은 기사 전개에서의 망설임이다. 과연 우리가 성차별을 기사 내의 단정적인 문장으로 표현해도 독자들에게 어색함 없이 전달될지 고민이 된다. 이는 성차별과 성 소수자 등에 관한 이슈가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의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에 관한 보도를 예로 들자.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관한 보도는 거의 모든 이들에게 분노를 자아내고,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에 대한 복지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심지어
본교는 왜 사회적 약자 보호에 우선하지 않는가? 기독교에 접해오며 본교에 관해 들던 가장 큰 의문 중 하나다. 숭실은 반문할 여지없이 기독교 정신을 뿌리에 두고 있다. 그럼에도 앞서 말했던 부분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아 아쉬울 때가 많다. 물론 본교는 봉사와 복지에 관해 굉장히 관심이 많은 대학 중 하나다. 얼마 전엔 장애인 복지 관련 사업에서 최우수 성적을 받기도 했으며 교내의 직원들에겐 육아와 휴가 복지를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부족한 부분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학보사 기자 생활을 하며 가장 많이 느끼는 점은 대부분의 비판 기사나 사설이 그저 ‘비판을 위한 비판’에 머문다는 점이다. 즉 어떤 사안의 단점이나 맹점을 논해봤자 개선되는 모습이 매우 드물다는 이야기다. 이는 어쩌면 기자로서 한심하게 보일 수 있는 푸념이다. 그럼에도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본지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본부 측도 잘못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다름 아닌 공간 부족에 관한 문제이며, 특히 학습 공간의 부족 문제이다. 본교 캠퍼스는 실제로 넓은 축에 끼지 못한다. 이를 비판하자면 사실 본부 입장에서도 억울할 수 있다
꽃샘추위도 물러나고 본격적으로 꽃놀이를 즐길 수 있는 시기가 됐다. 일부 학생들은 곧 찾아올 중간고사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혹시 나들이를 가게 된다면 공공장소 내에서의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할 것이다. 더불어 예의 이상으로 지켜야만 하는 것들 역시 존재한다. 꽃이 화려하게 곳곳을 장식하는 만큼 꽃놀이 명소에도 인파가 몰리기 마련이다. 그중 대개는 물론 여타 방문객과 다투지 않고 본인들의 쓰레기를 잘 치우는 등의 공공 예절을 훌륭히 실천한다. 그럼에도 매번 봄만 되면 꽃놀이 방문객
청년들뿐만 아니라 장년층에게도 술기운을 빌려 연애를 시도해보는 일은 낯설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최근 ‘연애를 위한’ 주점의 시장 규모가 커지고 있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지 재고해야 한다. 우린 제정신으로 가장 기본적인 욕망조차 채울 수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대학생들을 비롯한 청년들에게 클럽이나 헌팅주점 등의 사교적 공간은 매우 익숙하다. 홍익대학교나 건국대학교 등의 대학가 인근에도 그러한 술집이 다수 위치해 있으며, 항상 그 유흥가의 주변은 인파가 흘러넘친다는 점에서 주점의 시장 규모는 작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때 주목해야 할 점은 넘치는 인파 속에 거의 모든 청년들이 한 번쯤은 합류해봤다는 것이다. 물론 술을 마시기 위해서나 마음 편히 놀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 중 많
봄바람은 종종 우리를 연애로 이끌며 봄은 종종 연애와 만남의 계절로 비유되곤 한다. 긴 겨울을 지나 간만에 맞이한 따스한 바람이, 그보다 더 따뜻한 사람의 살결을 원하게 하는 탓인지도 모른다. 특히 인생 전반에서 가장 활력 있는 청년기에 접한 대학생들은 연애를 더욱 필요로 하게 된다. 단지 그럼에도 매사에 그렇듯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갈고 닦는 노력이 필요하다. 연애를 하는 것은 여타 동물들과 인간을 구별하는 하나의 특징으로 여길 정도로 특별한 문화이며, 동시에 성 정체성에 큰 관계없이 보편적인 일이다. 이에 우리 생활 속의 당연한 일상 중 하나로 치부되기도 한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수많은 연애 경험담이나 연애 중인 지인들이 연애라는 하나의 행복과 가치를 무디게 만드는 것이다.
문화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데 우리는 어떠한가? 과연 우리는 우리 사회가 스스로를 위해 가꾸고 발전시키는 문화와 어우러질 준비가 됐느냐는 질문이다. 유행하던 각종 콘텐츠가 얼마 지나지 않아 급변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단 점에서 앞선 의문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아마 우리 사회는 문화를 부리기는커녕 뒤따라가지도 못하고 있는 듯하다. 당장 소년층을 넘어 청장년층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웹 콘텐츠 시장의 단면을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그렇게 생각할 법하다. 웹 작가들의 작품을 보호할 저작권 제도가 미흡할뿐더러 소비자들 역시 그들의 권리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일부 플랫폼에 소속된 작가들은 인기를 척도 삼아 노동에 상응하는 적절한 경제적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웹 시
어떤 이유에서건 본교의 구성원이 덜 됐구나. 청소노동자들의 생활을 밀착 취재하던 이번 주 내내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인식의 차원에서 그러하다. 우선 본교의 구성원들 중 학생, 교수,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청소노동자들 역시 숭실의 이름을 빛내는 것에 기여하는 하나의 구성원이라고 여기는 이는 얼마나 있을까? 특히 학생들 중 대부분은 청소노동자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꺼릴 만큼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청소노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같은 벤치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빤히 쳐다보거나 옆에 다가오는 것을 꺼려하는 학생들이 다수 있는 듯했다. 만약 학생이나 교수가 옆에 앉았더라도 그러한 거부의 행동을 취했을지 의문이다. 심지어 직원들 역시 학생들과
어쩌면 일부 남성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특히 적잖은 세월을 보내 자신만의 가치관과 사상이 잡힌 성인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남성 중심적 문화’나 ‘젠더 권력’이란 개념은 말이다. 그러나 이젠 그러한 남성 중심적 문화를 남성 스스로 인지하고 이해하며 그것을 지양하려 노력해야 할 때다. 당신은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억압하는가? 성 불평등 문제는, 특히 최근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남녀 간 불평등 문제는 애초 누군가를 가해자로 혹은 피해자로 낙인찍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성 간 평등 운동의 이름이 여성의 이름을 딴 것(페미니즘)부터 실상 남성에 대해 여성을 억압하는 가해의 주체로 단정하기 쉽다. 그럼에도 현세대의 남성들 모두를 자발적인 가해자라고 비난하고 싶지 않다. 여성 억압과 불평등의
본교 졸업식이 오는 9일(금) 열린다. 그리고 그 다음 주면 민족 명절인 설이 찾아온다. 아마 이번에 본교를 떠나는 졸업생 중 적지 않은 인원이 고향이나 큰 집으로 내려가길 꺼려할 것이다. 취업길이 확실하지 않은 청년들에게 눈총을 주는 어른들이 아직 많기 때문이다. 물론 취업을 성공하지 못한 차세대에게 인생의 선배로서 한 마디 조언하는 것쯤은 청년들도 달갑지 않겠느냐마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둥, 남의 집 자식은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둥 사회적 문제나 분위기에 무감각한 잔소리만 내뱉는다면 한심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취업난이 심화되며 자연스레 일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 비경제활동인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비경제활동인구는 취업자도 실업자도아닌 이들로 일할 수 있는 능력은 있으나 일할 의사가 없거나 일할 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