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운동을 하고 식단을 짜서 먹는 일은, 누군가가 보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나에게는 질색하며 마다했을 일일 테다. 나는 운동신경이 없는 편은 아니었지만, 소위 ‘멸치’라 불리는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하는 운동이라곤 팔굽혀펴기 정도가 전부였다. 대학교 1학년 가을, 불현듯 ‘멋진 몸을 만들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위한 내 첫 발자국은 헬스장 등록이었다. 회원권을 끊고, 생전 처음으로 헬스장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어떤 몸을 원하느냐는 트레이너의 질문에, 나는 보디빌더 같은 몸이라 대답
코로나19의 여파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들은 낯선 것이 되었고, 서서히 당연함을 찾아가는 과정에서는 심지어 감사하기에 이르렀다. 이를테면 조만식 3층과 도서관을 잇는 문이 개방되었다든가, 과방에서 10시까지 있을 수 있다든가 등등을 말이다. 하지만, 코로나 시기와 함께 2년을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잠시 학교를 떠나 있었던 나로서는 종종 그 감사와 감탄에 놀라곤 한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누려야 할 ‘당연함’은 사라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중 이것만큼은 당연하다고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다. 내가 이 글을 쓰
미국 언론인 맷 타이비는 언론이 ‘편향’을 시장 전략으로 채택했다고 분석한다. 매체에 충성하는 구독자를 유치하는 것만이 모든 언론 매체의 목적이 되었다. 형성된 팬덤은 혐오 여론과 가짜뉴스로 상정한 외부의 적을 통해 결속을 강화한다. 이 편향 전략 뒤에는 저널리즘에 대한 대중들의 까마득한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 저널 신(scene)에서 소멸해가는 대중을 뒤로 한 채, 언론이 순수 언어극으로 변모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페터 한트케가 희곡 『관객모독』을 통해 선보인 언어극은 우리에게 익숙한 연극인 서사극을 부정한다. 허구적 사건을 중
지난해 저에게 가장 뜨거웠던 이슈는 ‘사랑이 무엇인가’였습니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던 이 질문을 가까운 이들에게도 던졌습니다. 각자 자신을 담은 답변을 해 주더군요. 사랑은 ‘그것을 위해 내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것’, ‘유일한 관심’, 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좋은 것을 해 주고 싶은 마음’ 등. 본인들이 사랑이라 생각하는 어떤 마음들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제게 사랑일지도 모르는 존재들을 떠올렸습니다. 먼저 부모님을 떠올려 봅니다. 저에게 교감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 반려견 ‘봉구’도요. 다음은 신뢰하
1932년생, 아흔 두 살이신 우리 할머니는 7년 전 루이소체 치매를 진단받으셨다. 그리고 5년 전부터 우리 가족과 함께 사시게 되셨다. 우리 할머니는 40년 넘게 교직에 계셨다. 참 슬기롭고 올곧으신 분이셨다. 그렇게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병증과 노환으로 사라졌다. 평생 입에 나쁜 말 한 번 담으신 적 없던 할머니가, 내가 할머니 지갑을 훔쳤다며 나에게 욕을 하셨다. 새벽 세 시에 여기가 우리 집이 아니라며 나가야 한다고 지팡이로 내 방문을 때리셨다. 12월 한파에 꼭 반팔을 입으셔야 한다고 역정을 내신다. 그렇
지난 9일(수)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여느 선거철과 같이 우편함엔 선거공보물이 꽂혀있었다. 공보물을 보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후보자가 국가를 어떤 비전으로 이끌어 갈 것인지, 어떤 철학과 이념으로 개인, 기업 그리고 정부를 다스릴 것인지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표현으로 천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대 양당 후보 모두 이념과 철학에 입각한, 일관된 비전을 제시하기보다 한순간 표를 얻기 위한 선거철용 공약이 주를 이루는 것 같아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국가는 개인의 삶에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또는 어떤 것을
겨울의 끝과 여름의 처음 사이, 절기(節氣)로는 입춘부터 입하 전까지, 계절로는 네 철 가운데 첫째 철. 봄이 왔다. 겨울의 냇물이 아른거리는 기운에 화답이라도 하듯 조금씩 녹기 시작하면, 봄이 혈관을 타고 흐르듯 움츠렸던 몸도 꽃처럼 서서히 개화(開花)한다. 그리고 이에 맞춰 우리를 찾아오는 것, 개강(開講). 작년까지만 해도 다소 삭막하던 교정이었다. 심지어 2월의 말일까지도 시린 칼바람에 몸을 움츠리고 걸어야 했던 학교였다. 따사로운 햇빛보다는 그저 회색빛 건물들의 색채가 유독 부각되어 보이던 시점이었지만 단 며칠을 기점으로
2016년, 옥스퍼드 사전은 그해 세계의 단어로 ‘탈진실’을 선정했다. 옥스퍼드는 탈진실을 “객관적 사실이 공중의 의견을 형성하는 데 개인적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보다 영향력을 덜 끼치는 환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탈진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여론은 객관적 사실보단 개인 편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사람들은 진실보단 자신의 선입견을 증명하기 위해 편향된 정보를 습득한다. 현대에 들어서 개인의 정체성과 반대되는 집단을 배제하고 혐오하는 일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모습이다. 혹자
학교가 안팎으로 소란스러웠던 2021년. 1년 동안 정보사회학과의 학생회장을 맡았다. 원래라면 복학한 고학번이기에 조용히 학교를 다녔을 테지만, 학생회를 하게 되면서 20학번, 21학번 친구들과도 어울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물론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나 자신을 의심하며 자책하고, 혼자 우울에 빠졌다. 학생회장을 한다고 14학번 형이 술을 사주면서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크든 작든 목표를 세우지 않으면 언젠가 너 스스로 무너질 거다.” 최근 본 글이다. ‘노력과 헛고생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행동만
10월 20일(수)에 대자보를 하나 붙였었다. 당시 대자보의 내용은 총장이 학생들과 직접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무려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도 총장은 학생들과 전혀 대화를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총장과 그 집행부는 학생들에게 무례하고 도를 넘는 발언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피평가자는 성적평가 방식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 이 말이 과연 총장과 그 집행부라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학생들을 본인보다 아랫사람으로 여기는 것도 정도가 있다. 학생들의 건강은 하나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는 인간의 특성을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개인으로 존재하지만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을 원하든 원치 않든, 공동체 속에서의 상호작용은 필수 불가결하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과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만이 사회적 동물인 것은 아니다. 늑대와 사람에게선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우선 포유류이고, 한 마리의 수컷과 한 마리의 암컷이 짝을 맺고, 육아를 하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누나는 중증장애인이다. 말을 할 수 없고, 의사 표현도 불가능하며, 대소변을 보는 것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동안 부양할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책임은 오롯이 우리 가족이 져야 했다. 부모님은 누나를 요양 시설에 보낼 수 있었으나 그러한 선택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어려서부터 같이 성장했다. 어릴 때는 장애인 인권에 관한 내 생각이 전무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점차 생각이 달라졌다. ‘왜 누나는 주변에서 저런 시선을 받아야 할까?’, ‘누나가 잘못한 게 뭐가 있을까?’ 이런 생각이 반복될수록 누나가 부당
최근 숭실대학교는 대면 수업이 예정되어 있던 2학기 6주 차를 전후로 역동적인 (Dynamic) 행보를 밟고 있다. 일반적으로 ‘역동적’이라고 하면 힘차고 활발하게 변화 하는 이미지가 떠오르겠지만 현재 숭실대학의 ‘역동성’은 온갖 갈등과 불만으로 점철되어 그 변화가 다소 거북하게 느껴진다. 개강 시기부터 학생들 간 초유의 관심사 였던 대면/비대면 논쟁은 현재까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또한, 지난달 13일(월) 경영대 전 학생회장의 방역 수칙 위반 건은 학생들의 공분을 샀다. 이와 더불어 수업 방식을 변경하는 시기를 둘러싸고 학생과
‘4차 산업혁명, AI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왜 철학을 해야 하는가? ’ 이 글에서는 철학자 가다머의 시각으로 근본학으로서의 철학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짧게나마 이야기해 보려 한다. 가다머에 따르면 인간은 과학적 방법론으로 규명될 수 없는 역사 속에 던져진 언어적 존재이며, 존재는 언어를 통해 계시될 수 있다. 언어의 이해가 곧 인간 존재의 이해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해석학은 과학기술에 매몰된 현대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철학을 공부하는 현재의 우리에게도 많은 비판점을 줄 수 있다. 하나 예
‘진지충’은 어느새 일상적인 단어로 자리매김했다. 누군가의 설명이, 진심이, 감정이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비아냥의 대상이 돼버렸다. 솔직한 감정은 오글거리는 글이 돼버렸으며, 누군가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 역시 오글거린다는 말로 치부돼 버린다. 감정을 담아 쓴 긴 글은 더 이상 읽히지 않고, 진심을 전하기 위해 한 말은 그저 웃음거리가 돼버리고 말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쾌락을 좇는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기존의 쾌락보다 더 강렬하고 큰 쾌락을 좇는다. 넘쳐나는 콘텐츠 사
이제는 집단이 무너지고 개인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한국은 특히 집단주의 심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농경사회에서 조화로운 공동체의 유지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화된 미디어가 널리 이용되고 있고, 개인의 자기계발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구조의 변화는 개인화 시대의 도래를 암시한다. 개인화란, 근대성의 결과인 산업사회의 제도화된 삶의 방식들이 해체되고 유동화 되면서 개인들이 계급적 집단과 가족의 성 역할에서 풀려나 자기의 삶을 기획하며 살도록 강제되는 현대사회의 구조 변동을 지칭한다. 개인
“마스크 쓰셨나요?” 수진은 역무원의 질문에 여러 생각을 한다. 시각장애인이 아닌 역무원,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역무원. 그는 왜, 물었을까. 『여자가 지하철 할 때』는 수진이 지하철을 타며 하는 생각들을 풀어낸 소설이다. 평온한 지하철과 달리 수진은 지하철이 전쟁터인 것처럼 행동한다. 남자는 수진을 쳐다 본다. 수진은 도망치고자 하는 욕구를 느낀다. 지금, 가면, 죽는다. 수진의 태도를 마냥 부조리한 말이라고 넘겨짚을 수 없다. 당연했다. 수진은 사회적 약자의 취급을 받고, 어 떤 일이든 우선순위가 되는 여성이기
다이애나 밴드의 ‘돌 깨는 잠, 숨 짓는 숲’ 공연을 보았다. 공연에서 사물들은 각각 다른 움직임으로 다른 소리를 냈다. 한 점을 중심으로 수직으로 서 있는 손가락 하나 크기의 철사가 빙글빙글 돌아 끝에 달린 작은 사물이 바닥에 끌리면서 나는 소리, 노란 플라스틱 깔때기 안쪽에 공이 구르면서 깔때기가 좌우로 흔들리며 나는 소리, 작고 단단한 물체가 원형으로 돌아 주위에 배치된 여러 유리병을 치고 가며 나는 소리, 공중에 매달린 채 아주 천천히 공간 바닥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공의 소리들은 서로 다른 호흡을 가지고 있었다. 사물들이 여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병동에서 스물 몇 번째 봄을 맞이한 2월, 나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멀리서 보면 꽃을 세심히 관찰하는 일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가까이서 보면 원인을 알 수 없는 강박사고와 그로 인한 끊임없는 죄책감으로 소용돌이 치는 날 선 통증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엄마는 일주일에 두세 번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지하철을 타고 병문안을 왔다. 원칙상 병실에 보호자는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 억지로 휴게 공간으로 나와야 했다. 그 순간 채광창으로 쏟아지는 햇빛과 열린 창으로 너울거리는
황금 같은 주말을 여느 날처럼 집에서 보내고 있었다. 산책이라도 할 겸 집 밖을 나오니 봄꽃들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며칠 전 소담하게 핀 붉은 꽃이 너무 신기하고 예뻐서 메신저로 친구에게 이름을 물어봤는데, 흔한 철쭉도 못 알아보냐는 핀잔을 들었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동네 봄꽃을 모조리 정복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꽃잎이 작고 너덧이 뭉쳐 있는 꽃을 사진 찍어서 검색해보니 라일락이었다. ‘오 라일락- 꽃이 지난날 goodbye-’ 2021년 한국의 봄을 휩쓸고 있는 존재가 우리 집 앞마당에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