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창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담아내며 탄생한다. 그렇기에 예술은 창작가의 도덕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예술에서 도덕성을 고려하는 것이 자유를 헤치는 것인지와 관련한 논의는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작품이 도덕성을 얼마나 추구해야 하는지에 따라 크게 ‘도덕주의’와 ‘심미주의’로 나눌 수 있다. 플라톤은 예술의 존재 이유는 도덕성에 있으며 예술에 의해 사람들이 도덕적인 상태에서 멀어지거나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관점을 도덕주의라고 한다. 반대로 심미주의의 대표자 스핑건과 와일드는 예술은 오로지 미적 가치만을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숨기고 싶었던 현실을 드러낸다. 우리는 학창 시절 직업의 가치는 모두 같으며, 노동은 소중하다고 배웠다. 물론 그걸 믿는 사람이 많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죽음의 가치는 모두 동등하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까. 코로나19로 인한 두 죽음을 소개한 기사가 있었다. 한 명은 의사, 한 명은 택배기사이다. 환자를 진료하던 의사가 코로나19에 걸려 사망했다는 기사이고, 택배기사는 코로나19로 인해 물류가 폭증해 그 물량을 처리하기 위해 과로사했다는 기사이다. 두 죽음은 코로나 19와 밀접도에 차이가 있을
이번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러 수상 후보에 오르는 등 해외에서 폭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미나리’. 영화의 감독인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로, 극 속 데이빗이 정이삭 감독이라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이민을 가서 정착하여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1세대 한국계 이주민들의 고난과 따뜻한 가족 드라마를 현실적이고 담담하게 연출하였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대부분 한국어로 진행되는 영화이지만, 미국이 이주민의 나라인 만큼 한국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작
‘세대’ 문제를 다루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에 대한 질문을 던진 영화가 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독일 마렌 아데 감독의 이다. 속 주인공인 노인 ‘빈프 리트’가 경력 쌓기에 바쁜 딸 ‘이네스’와 다시 연결되기를 바라고 제2의 자아인 ‘토니’가 되어 딸을 찾아간다. 극 중 주인공의 장난을 쉽게 받아주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다. 그의 장난에는 배려가 없기 때문이다. 장갑을 끼지 않은 시추공에게 장난을 쳤다가 그의 일자리를 잃게 만든 빈 프리트의 모습은 그가 사는 세계와 딸 이네스가 사는
여행을 가면 빠질 수 없는 소리, “찰칵”. 음식을 시켰을 때도, 장소에 도착했을 때도 찰칵 사진을 찍는다. 여행을 가면 특별한 음식, 특별한 장소를 가기 때문에 사진으로 남기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찍은 사진들을 보면 추억에 젖기도 하고 흐뭇하다. 또 약간의 나르시시즘도 있는데, 특별한 곳에서 나 자신이 이쁘고 멋있는 모습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그게 또 은근하게 만족스럽다. 그러나 문득 이런 멋진 순간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에 카메라 속에서 여행하고 있지는 않았나 생각이 든다. 물론 찰나의 순간이 담긴 사진은 매우 특별하다.
내 주변엔 다양한 나이대의 동생들이 있다. 그 아이들을 만나면서 이들이 지금보다 더 존중받는 사회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런 사회가 만들어지기 위해 필요한 교육을 이야기하고 싶다. 2015 개정 교육과정 보도 자료를 보면 교육과정의 목표는 사회가 요구하는 핵심역량을 갖춘 ‘창의융합형 인재 양성’이다. 최근 10대와 관련된 이슈를 해시태그로 나열하면 #성범죄 #N번방 #딥페이크 #학교폭력 정도이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2019년 7월부터 밝혀지기 시작해 ‘n번방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텔레그램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 있었다. 검거된 피의
우연히 한 게시글에서 모 인터넷 강사의 발언을 캡처한 것을 보았다. 논지는 “꿈은 명사여서는 안 됩니다. 잡(job)은 명사일 수 있어도, 꿈은 동사여야 합니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직업을 갖는 것은 꿈을 실현한 것이 아니며, 꿈을 이룬다는 것은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실현하는, 일련의 동작성을 가진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직업은 이를 도와주거나 뒷받침해 주는 도구일 뿐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난 교사가 될 거야”라는 것은 꿈이 아니라, 직업을 선택한 것일 뿐이다. 교사가 된 후 무엇을
대학에서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 3위 정도에 있었던 것이 ‘교환학생 가보기’였다. 사실 아무 연고도 없는 지구 반 바퀴 너머의 낯선 땅에서 혼자 지낸다는 것은 나에게 말 그대로 꿈이자 환상일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예상치 못한 순간에 교환학생 원서를 넣게 되었고, 운 좋게 지원한 나라로 갈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잘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지만 정작 나는 출국 일주일 전부터 밤잠을 설쳤다. 친척들이나 지인들에게 조언도 많이 들었고, 가서 외국인들과 어떻게 하면 잘 지낼 수 있을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
2021년부터 부모와 따로 사는 청년들이 주거급여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국토교통부가 지난 11월 19일, 내년 1월부터 청년 주거급여 분리지급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정확한 대상은 부모와 다른 자택에 거주하고 있는 만 19세 이상, 만 30세 미만의 20대 저소득층 청년들이다. 부모와 다른 시·군에 거주하거나, 같은 시·군에 거주하더라도 대중교통으로 90분 이상 걸리는 거리라면 신청이 가능하다. 이는 부모와 자식의 주거급여를 분리하여 개개인에게 지급하는 방식이다. 즉, 부모가 받는 금액은 감소하지만 자녀가 본인의 몫을 스스로 챙길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극심한 차별과 혐오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개인의 자유와 권리 의식은 증가하는 데 비해 사회적 차별, 혐오, 편견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이타심의 부재와 이기심의 극대화는 필연적으로 끔찍한 결과를 야기했다. 따라서 이러한 극심한 차별과 혐오가 나타나는 양상과 원인, 그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생각해보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필요한 태도이다. 현대사회의 사람들은 이전보다 자신의 의견과 개성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자신의 권리에 대한 인식도 분명하게 한다. 하지만
“야 그때가 좋았지” 고등학교에서 친해진 언니가 이미 졸업한 고등학교를 떠올리며 한 말이다. 우리 둘이 만나기만 하면 학교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던 것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에 남아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언니가 달콤한 향수에 빠져 졸업한 고등학교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싫어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기분 좋은 향수를 느끼는 사람이 비단 언니만은 아닐 것이다. 나 역시 과거의 예쁜 추억들만 모아 소중히 간직했다가 옛 친구들을 만나 그 보따리를 푸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돌아가지 못한 그 시간을 그리워한다. 분명히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
“1분 1초가 아까울 정도로 무엇인가에 몰두한 적 있나요?” 전례 없던 전염병으로 모든 인류의 생활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마치 공상과학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일상을 사는 우리는 어쩌면 먼 훗날 후손들이 기억할 끔찍한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릅니다. 필자는 이러한 우울한 시대에도 각자의 이상과 목표를 향해 놀라운 발걸음을 내딛는 자랑스러운 동문을 보며 그저 집에서 하염없이 하루를 보내면 안 된다고 자기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필자가 단순히 눈을 끔벅이며 뿌연 정신으로 사이버 강의를 들을 때 누군가는 피를 깎는 노력으로 대회에 입상하거나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잠은 건강과 직결된다는 논문과 기사가 매일같이 쏟아져 나옵니다. 잠을 잔다는 것은 모든 동물에게 필연적인 자가 치료(自家治療) 행위입니다. 잠만큼 오랜 기간에 걸쳐 검증된 민간요법도 없죠. 잠은 하루 일과에서 쌓인 피로를 해소하고, 뇌에 저장된 정보들을 정리하며, 뇌에 쌓인 독소를 제거하고 정화하는 작용을 합니다. 면역력을 증강하고, 세포를 성장시키기도 합니다. 잠의 중요성은 나열하자면 끝도 없지만, 어차피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잠을 등한시합니다. 한국인의 수
지난 5월 백상예술대상에서 축하 공연으로 아역배우들이 나와서 이적의 ‘당연한 것들’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보면서 가사의 첫 소절을 듣자마자 공감이 너무 갔고 나중에는 순수한 아이들의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서인지 눈물까지 날 뻔했다. 내가 첫 소절부터 공감 갔던 가사는 다음과 같다.그때는 알지 못했죠우리가 무얼 누리는지거릴 걷고친굴 만나고손을 잡고껴안아 주던 것우리에게 너무 당연한 것들 사실 이 노래를 듣기 전에는 코로나로 인해서 집에만 있는 생활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자각하지 못했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른
혼자 걷다 가끔 너희들과 자주 가던 술집이 눈에 밟힐 때가 있다. 너희들과 부르던 노래가, 함께 했던 비슷한 맥락의 얘기들이 귀에 박혀올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스무 살의 기억은 나에게 파도처럼 밀려온다. 이 학교를 입학하기 전 다니던, 다른 학교에서 보냈던 스무 살의 나날들이. 순간적으로 나를 잠식하는 그 나날들 속엔 우리가 서 있다. 19년 동안 살던 곳을 떠나 처음 가본 자그마한 그 도시에서,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 밥을 먹고 가끔은 살을 부대끼며 잠을 잤다. 처음 보는 방에서. 그렇게 짧지만 커다랬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졸업반은 이제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대학생활 동안 그리고 있던 미래를 그려나가야 하죠. 하지만 우리는 수많은 지원서 작성과 낙방으로부터 좌절감을 느끼곤 합니다. 이럴 때면 마치 자신의 대학생활이 너무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하지만 저는 요즘 이와는 반대의 생각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쓸모없었던 시절은 없었다고요. 이제부터 이 변명을 두 가지 이유들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필요한 저만의 목적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목적’을 찾는 일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목적’
사람에겐 누구나 각자의 성향과 기호성이 있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이들의 이야기를 선호하고, 반대되는 의견은 껄끄러워 한다. 그렇기에 갈등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혐오는 다르다. 요즘 뉴스를 보거나 인터넷을 들어가 보면 우리 사회에 혐오가 정말 짙어졌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난 혐오가 극단적이고 수동적인 사고방식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생각은 중요치 않다. 내가 옳기에 나와 다른 사람들은 모두 틀렸다. 이런 감정은 혐오를 일으키고 혐오는 소통의 부재를 낳는다. 그렇게 기형적인 갈등이 일어난다. 그런 부류의 사
교회를 다니는 나 스스로에게도 도발적인 제목이다. 그러나 현 상황에 동떨어지지 않은 제목이라 생각한다. 수도권 교회와 광복절 불법 집회를 중심으로, 모두가 노력하며 지켜왔던 공공의 안전을 순식간에 빼앗겼다. 그 중심에 서 있는 목사와 교회가 보여주는 납득하기 어려운 행태와 발언들은 시민들의 상식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들이 나라를 향해 외치던 자유, 그들이 그토록 보장받기 위해 불법까지 동반했던 자유는 과연 무엇인가. ‘자유’라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는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 다만,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경우’에는 제한할 수 있다
"행복해지려면 행복하면 안 된다.” 이 말은 고등학교 3학년, 입시 스트레스로 고생하던 나에게 담임선생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다. 그 당시 이 말을 들은 나는 무언가 억울함을 느껴 한참 동안 이 말에 대한 반례 를 찾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반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스무 살이 된 지금은 저 말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대인 중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이 질문에 정확한 수치로 답을 할 수는 없겠지만 인터넷에 현대인의 행복도와 관련된 통계자료 몇 개만 보더라도 답은
오랜만에 동네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슬픈 일이 있다며 술을 한잔하자고 한다. 아르바이트가 있는 날이어서 밤늦게 친구가 있는 술집으로 갔다.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뻔한 이야기지만 친구는 자기가 좋아했던 사람과 잘 안됐다는 말을 슬픈 어투로 꺼냈다. 내 친구의 말을 들어주며 뻔한 위로를 하며 생각했다. 서로의 마음이 서로를 향하는 것, 그리고 서로를 특별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 그래서 서로를 좋아하고 아껴주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아침에 일어나 집 근처 공원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