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당신의 문해력’ 프로그램 2022년 7월 7일 방영분에서의 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대화가 등장한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상업광고가 뭐야, 얘들아?”라고 묻자 “몰라요!”라고 답했고, 가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랍스터가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수업 시간에 사용하게 되는 단어의 뜻을 알지 못해 교사들이 수업 진행에 어려움을 느끼며, 단어의 뜻을 설명하느라 수업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에 대해 ‘당신의 문해력’ 프로그램 MC들은 글을 읽고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능력, 즉 문해력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
가볍다. 훅 하면 날아가 버리는 것도, 잡으려고 젓은 손짓에 일은 바람에조차 날아가 버리는, 잡힐 듯 무심히 떠나버리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데 간혹쫓아가 잡기조차 부질없게 만들 만큼 무심히 거센 바람이 불 때가 있다.그렇게 날아가 버리는 것들을 바라볼 때면더는 미련이 없는 듯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 내 마음을 미어지게 한다.날아가 붙잡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두고 날아가는 모든 것들이 어찌 알까.사실 나는 아직도 이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른다.나의 바람이 무색하게 성급히 전해지는 이별의 소식은,간절
상장폐지가 사실화된 일명 “국산 코인”으로 불린 테라와 루나를 만든 테라폼랩스의 권도형 대표가 쏘아 올린 공이 한국 코인 투자 생태계를 피바다로 물들였다. 불과 몇 개월 전에 한국의 일론 머스크라고 불리며 칭송받던 권도형 대표가 “루나 쇼크”로 인해 비판받고 있다. 티몬의 신현성 대표와 권도형 대표가 공동 창립한 테라폼랩스는 스테이블 코인에 해당하는 테라USD(UST)를 발행했다. 테라는 실물자산을 담보로 안정성을 유지하는 다른 스테이블 코인과 달리 ‘루나’를 블록체인 생태계의 기본 통화로서 발행하여, 공급량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테
나의 가족, 나의 학교, 나의 지역보다 우리 가족, 우리 학교, 우리 지역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나’ 대신 ‘우리’라는 말이 더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집단적인 성향이 일상에 녹아들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한국인의 성향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 중 하나는 집단주의다. 흔히 지역주의, 가족주 의, 민족주의, 학벌주의 등으로 불리며 연줄과 핏줄로 엮인 울타리 안에서 정을 나누는 것을 중요시하는 문화로 대표된다. 무엇을 하려고 하든 그 활동 자체보다는 함께 할 사 람을 먼저 찾는다. ‘삼삼오오’, ‘옹기종기’와 같은 말들은 한
매일 운동을 하고 식단을 짜서 먹는 일은, 누군가가 보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나에게는 질색하며 마다했을 일일 테다. 나는 운동신경이 없는 편은 아니었지만, 소위 ‘멸치’라 불리는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하는 운동이라곤 팔굽혀펴기 정도가 전부였다. 대학교 1학년 가을, 불현듯 ‘멋진 몸을 만들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위한 내 첫 발자국은 헬스장 등록이었다. 회원권을 끊고, 생전 처음으로 헬스장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어떤 몸을 원하느냐는 트레이너의 질문에, 나는 보디빌더 같은 몸이라 대답
코로나19의 여파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들은 낯선 것이 되었고, 서서히 당연함을 찾아가는 과정에서는 심지어 감사하기에 이르렀다. 이를테면 조만식 3층과 도서관을 잇는 문이 개방되었다든가, 과방에서 10시까지 있을 수 있다든가 등등을 말이다. 하지만, 코로나 시기와 함께 2년을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잠시 학교를 떠나 있었던 나로서는 종종 그 감사와 감탄에 놀라곤 한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누려야 할 ‘당연함’은 사라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중 이것만큼은 당연하다고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다. 내가 이 글을 쓰
미국 언론인 맷 타이비는 언론이 ‘편향’을 시장 전략으로 채택했다고 분석한다. 매체에 충성하는 구독자를 유치하는 것만이 모든 언론 매체의 목적이 되었다. 형성된 팬덤은 혐오 여론과 가짜뉴스로 상정한 외부의 적을 통해 결속을 강화한다. 이 편향 전략 뒤에는 저널리즘에 대한 대중들의 까마득한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 저널 신(scene)에서 소멸해가는 대중을 뒤로 한 채, 언론이 순수 언어극으로 변모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페터 한트케가 희곡 『관객모독』을 통해 선보인 언어극은 우리에게 익숙한 연극인 서사극을 부정한다. 허구적 사건을 중
지난해 저에게 가장 뜨거웠던 이슈는 ‘사랑이 무엇인가’였습니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던 이 질문을 가까운 이들에게도 던졌습니다. 각자 자신을 담은 답변을 해 주더군요. 사랑은 ‘그것을 위해 내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것’, ‘유일한 관심’, 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좋은 것을 해 주고 싶은 마음’ 등. 본인들이 사랑이라 생각하는 어떤 마음들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제게 사랑일지도 모르는 존재들을 떠올렸습니다. 먼저 부모님을 떠올려 봅니다. 저에게 교감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 반려견 ‘봉구’도요. 다음은 신뢰하
1932년생, 아흔 두 살이신 우리 할머니는 7년 전 루이소체 치매를 진단받으셨다. 그리고 5년 전부터 우리 가족과 함께 사시게 되셨다. 우리 할머니는 40년 넘게 교직에 계셨다. 참 슬기롭고 올곧으신 분이셨다. 그렇게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병증과 노환으로 사라졌다. 평생 입에 나쁜 말 한 번 담으신 적 없던 할머니가, 내가 할머니 지갑을 훔쳤다며 나에게 욕을 하셨다. 새벽 세 시에 여기가 우리 집이 아니라며 나가야 한다고 지팡이로 내 방문을 때리셨다. 12월 한파에 꼭 반팔을 입으셔야 한다고 역정을 내신다. 그렇
지난 9일(수)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여느 선거철과 같이 우편함엔 선거공보물이 꽂혀있었다. 공보물을 보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후보자가 국가를 어떤 비전으로 이끌어 갈 것인지, 어떤 철학과 이념으로 개인, 기업 그리고 정부를 다스릴 것인지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표현으로 천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대 양당 후보 모두 이념과 철학에 입각한, 일관된 비전을 제시하기보다 한순간 표를 얻기 위한 선거철용 공약이 주를 이루는 것 같아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국가는 개인의 삶에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또는 어떤 것을
겨울의 끝과 여름의 처음 사이, 절기(節氣)로는 입춘부터 입하 전까지, 계절로는 네 철 가운데 첫째 철. 봄이 왔다. 겨울의 냇물이 아른거리는 기운에 화답이라도 하듯 조금씩 녹기 시작하면, 봄이 혈관을 타고 흐르듯 움츠렸던 몸도 꽃처럼 서서히 개화(開花)한다. 그리고 이에 맞춰 우리를 찾아오는 것, 개강(開講). 작년까지만 해도 다소 삭막하던 교정이었다. 심지어 2월의 말일까지도 시린 칼바람에 몸을 움츠리고 걸어야 했던 학교였다. 따사로운 햇빛보다는 그저 회색빛 건물들의 색채가 유독 부각되어 보이던 시점이었지만 단 며칠을 기점으로
2016년, 옥스퍼드 사전은 그해 세계의 단어로 ‘탈진실’을 선정했다. 옥스퍼드는 탈진실을 “객관적 사실이 공중의 의견을 형성하는 데 개인적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보다 영향력을 덜 끼치는 환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탈진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여론은 객관적 사실보단 개인 편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사람들은 진실보단 자신의 선입견을 증명하기 위해 편향된 정보를 습득한다. 현대에 들어서 개인의 정체성과 반대되는 집단을 배제하고 혐오하는 일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모습이다. 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