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어렸을 적 유행했던 가요의 첫 마디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지금은 자취를 감추어 버린 레코드 가게에서 이 경쾌한 노래가 퍼져 나오면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곤 했다. 비록 나성이라는 말이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이 노래의 멜로디는 늘 기분 좋은 것이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꼭 나성에 가 보겠다는 작지만 굳은 다짐도 했다. 나성은 나에게 엘도라도같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원더우먼’이나‘육백만 불의 사나이’를 한 번쯤은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두 캐릭터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나성이었다. 소리로만 듣던 나성이 미국의 도시 로스앤젤레스를 뜻한다는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뜻은 없고 음만 빌려온 가차문자로 L.A.를 적으면 라성(
폴란드의 바르샤바가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쑥대밭이 되었다면 히틀러가 가장 사랑했던 이 도시는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다. 폭격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았고 폭탄 투하를 지시한 사람은 전승국의 장군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웅이 되었다.전쟁의 승리와 패배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영웅이 되느냐 전범이 되느냐의 기준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에 난 동의할 수 없다. 인간만이 가장 어리석은 선택과 기준을 만들어 반복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수없이 반복하는 전쟁이라는 이름의 자멸(自滅). 고통을 충분히 경험하고도 또다시 고통을 만들어 내는 어리석음은 인간만의 속성이다.전쟁은 공격과 방어라는 두 가지 속성으로 간단히 해석될 수도 있지만 그 상처는 우리의 뼛속까지 태워버
어쩌면 이렇게 무질서할 수 있을까. 모든 것에 원칙이 없어 보인다.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이 된다. 한국인인 나에게는 불편하기만 하다. 시내를 오가는 모든 택시에는 미터기가 없어 늘 운전사와작은 협상을 해야 한다. 현지인들이 타고 다니는 에어컨조차 없는 만원 버스는 도저히 탈 엄두가 안 나서 걷기 멀다 싶을 정도의 거리는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택시 요금을 협상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매번하려니 이것도 고역이다. 내가 외국인인 것을 간파한 그들은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한다. 현지 사람들의가격 대비 무려 열배를 요구하는 그들의 머릿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을까. 심지어 먹는 음식마저 ‘외국인 요금’ 이 적용된다. 현지인에게는 5백 원인 쌀국수가 나에게는 3천 원이 된다. 시간이 지
이곳에는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화려한 네온사인이나 현수막이 없다. 빨간색 옷을 입은 산타클로스도 없고 연인들과 성탄전야를 즐기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젊은이들도 없다. 세상에 이렇게 한산한 성탄전야가 있다니. 아니 한산하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초라하다는 표현이 더 들어맞는 것 같다. 베들레헴에서 성탄전야를 보낼 수 있다는 남들이 가져보기 힘든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은 나는 이 초라한 도시에 실망했다. 온갖 상업적인 이미지들로 가득한 나의 뇌는 베들레헴의 이런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테러를 방지한다는 목적으로 곳곳에서 총을 들고 검문을 하는 군인들의 위협적인 행동들은 내가 과연 예수께서 태어나신 곳에 와 있는지에 대한 의문마저 들게 한다. 곳곳에 보이는 동물의 배설물은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게 만들
이 세상 모든 피아니스트들의 우상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심장만이 이곳으로 옮겨져 신체의 나머지 부분을 기다리고 있다. 심장의 주인인 쇼팽은 이 도시의 수호신이며 정신적인 지주이다. 처절하게 파괴되었던 도시 바르샤바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홀로 만들어 내는 마주르카의 선율 속에 있다. 쇼팽의 심장은 수천만 마력의 엔진이며 바르샤바 전체를 이끄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이름의 폭탄은 도시의 85%를 폐허로 만들었다. 죽은자는 말이 없었고 살아남은 자는 비통한 눈물만 흘렸다. 폐허 속에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 것은 쇼팽의 마주르카 밖에 없었다. 10년 전 바르샤바에 처음 갔을 때 도시에 서려있는 우울함에 나는 유럽에 있으면서도 유럽을 전혀 느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처럼 매일을 살고 있는 이 도시의 진가를 난 오랫동안 몰라보았다. 아니,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서울의 가치를 되돌아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수많은 도시를 돌고 돌아서야 서울이라는 도시를 생각하게 된 것이 자못 창피하게 느껴진다. 외국의 다른 도시들을 그토록 많이 다니며 찬미한 내가 왜 서울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서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의연하게 모든 상처를 치유했다. 그리고 바야흐로 글로벌 문화를 창조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전 세계 사람들은 서울에 이목(耳目)을 집중한다. 여기서 유행하는 것은 곧 다른 도시의 유행이 된다.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말은 서울을 두고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들인 렘브란트, 프란스 할스, 얀 베르메르,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생각만으로도 난 고속열차 안에서부터 손목 위의 시계를 초조하게 쳐다보았다. 시속 300km가 훨씬 넘는 초고속으로 열차가 달리고 있는데도 더 빨리 이곳 암스테르담에 도착하고 싶었다. 사실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나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보다 암스테르담의 라익스 뮤지엄(Rijks Museum)을 더 가고 싶었던 나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미술책에 나왔던 렘브란트의 ‘야경(Night Watch)’을 언젠가는 직접 보고야 말겠다는 나의 염원이 더 큰 초조와 안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멋진 디자인의 중앙역을 빠져나오자마자 눈앞에 펼쳐지는 운하가 ‘해수면보다 낮은 나라’ 네덜란드를 시각
갑자기 철학 시간에 배운 경험론이 생각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누군가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의 차이를 물어본다면 나는 대답을 하기 위해 오랜 생각에 잠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이런 답을 만들어낼 것 같다. “런던에 가서 템스 강가를 천천히 거닐다 보면 점잖은 남색 코트를 입은 신사가 당신에게 설명해줄 거예요. 처음 본 당신이지만 그 신사는 오랫동안 당신에게 친절함을 잃지 않고 질문에 대답해 줄 것입니다.” 대영제국의 심장, 산업혁명의 발원지, 의회정치의 모범답안. 런던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경험론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007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더해지면 런던은 대륙과는 정말 다른 모습으로 스스로를 색칠한다. 템스 강 위의 타워 브리지는 단순히
와이셔츠를 사나흘 동안이나 계속 입고 다녀도 깃이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나라는 청정(淸淨)하다. 나라 이름에 괜히 ‘new’라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 오클랜드에 도착하자마자 아무 것도 혼합하지 않은 순수한 맛의 공기가 나의 혼을 흔들어 깨운다. 국가 명칭에 ‘land’가 들어가는데 가장 큰 도시 이름에도 ‘land’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북섬과 남섬으로 이루어진 이 나라에선 땅이란 참으로 귀중한 의미를 가졌나 보다. 작열하는 태양빛에 피부를 그을리며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모습은 텔레비전에서 간혹 봤었지만 내가 직접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2004년 여름 이 남반구의 섬나라에서 스키를 즐길 줄이야. 기계
길이가 너무 길어서 그런지 좁아도 너무 좁아 보이는 나라 칠레.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 칠레의 길이는 무려 4650킬로미터에 육박하는데 남반구 전체 길이의 약 43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지도를 봐도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디가 처음이고 어디가 끝인지도 잘 모르겠는 이 길고 긴 나라의 중간쯤에 발파라이소(Valparaiso)가 있다. 영어로 번역하면 ‘Valley of Paradise’ 가 되니 우리말로 하면 ‘천국의 계곡’이라 해도 무리는 없어 보인다. 남미 제1의 무역항인 이도시는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미니 샌프란시스코’라 부른다. 발파라이소의 라 세바스티아나(LaSebastiana). 칠레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긴 대문호 파블로 네루다(Pa
이 작은 섬은 슬픈 역사를 목도(目睹)했다. 대영제국의 깃발을 단 커다란 배가 이 섬에 닻을 내리고 쉴 새없이 아편을 대륙으로 실어 나르는 모습을. 그리고 귀를 세워 들었다. 아편 연기에 콜록대는 대륙사람들의 무기력한 신음소리를. 아편의 부작용이었을까. 청나라는 신식 무기로 무장한 파란 눈의 침입자들에게 너무나 쉽게 굴복하며 99년간 이 섬을 할양했다. 제국주의자들은 99년이 지나면 중국이라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없어질 것이라 믿으며 의기양양했다. 섬에는 영국의 국기가 게양되었고 모든 것은 영국식으로 운영되고 세뇌되었다. 한 때 부르짖던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목표 또한 한낱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홍콩이 중국에 정식으로 반환된 날은 1997년 7월 1일이 되어서였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몽콕의
우리는 은연중에 세뇌당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그런 것일까. 모든 종류의 예술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도시가 있다. 그 이름은 파리. 비단 예술가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는 유명한 과학자와 정치인들까지도 파리를 거쳐 갔다. 파리는 어떤 면에서 보면 도시이기 이전에 인류 역사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위인들의 성지(聖地)다.파리는 피카소, 쇼팽 같은 위대한 예술가에게는 창작의 고뇌를 반추(反芻) 하는 장소였으며, 마리 퀴리에게는 두 차례의 노벨상 수상의 영예를 잉태시킨 곳이며, 마르크스와 레닌에게는 사상적 자유를 누릴 망명지였으며, 저우언라이(周恩來), 호치민(胡志明)같은 아시아의 지도자들에게는 조국의 새로운 개혁 청사진을 구상하게 했던 곳 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파리는 단순히 보고 즐기는 도시이기 이전에
얼마 전 타이베이를 다녀 온 후배가 하는 말. “선배님, 타이베이는 정말 재미없던걸요.” ‘재미’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낮과 밤이 모두 즐겁고 오감을 만족시켜 주는 도시가 타이베이였기 때문이다. 오감을 만족시켜주는 도시에서 재미를 논하는 것 자체가 큰 실수이며 자만이 아닐 수 없다. 중화 문화의 보고이며 세계 4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고궁박물관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중국 최고의 명필로 일컬어지는 왕희지(王羲之)의 글이 눈에 들어오고 가공되지 않은 돼지고기 덩어리와 비슷하다하여 이름 붙여진 육형석(肉刑石)도 보인다. 중국 5천년 역사의 축소판을 나는 이곳 타이완 고궁박물관에서 봤다. 말로만 듣던 중국 왕조의 각종 유물에 눈이 즐겁고
프라하를 빼놓고 동유럽의 도시를이야기할 수 있을까? 프라하는 동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다. 남유럽에 로마가 있고 서유럽에 파리가 있고 북유럽에 코펜하겐과 스톡홀름이 있다면 동유럽에는 단언컨대 프라하가 있다. 프라하를 몇 장의 원고지에 담아내는 것은 큰 교만이 아닐 수 없다. 프라하에 대한 감상을 마음먹고 쓰자면 수백 페이지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프라하에 다섯 번이나 갔다. 무더운 여름에도 갔고 백설이 흩날리는 겨울에도 갔다. 그 때마다 프라하의 중세풍 건물들은 계절의 옷을 갈아입고 나를 반겨주었다.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등의 다양한 건축 양식은 프라하를 방마다 각기 다른 디자인의 벽지로 도배한 멋진 전원주택처럼 보이게 한다. 부다페스트에 세체니 다리가 있다면 체코에는 칼레르
1333년 건축되었다는 나무로 된 카펠 다리(Kapellbrucke). 난 이 다리 위에서 바라 본 루체른 구시가의 ‘말끔하고 정숙한’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휘어발트슈테터(Vierwaldstatter) 호수가 축복을 내린 이 도시의 전경은 잠시 목에 걸린 카메라를 쉬게 해주었다. 나의 눈은 심도 깊은 렌즈가 되고 나의 다리는 굳건한 삼각대가 되어 움직이는 모든 피사체를 쉬지 않고 담아냈다. 나의 뇌는 무한대의 메모리 카드 역할을 했고, 그 어떤 고성능 카메라도 루체른을 담는 데 나의 눈보다 정밀하지 못했다. 루체른은 스위스의 도시 중에서도 특히 더 아름다운 도시다. 루체른을 더욱 의미 있고 아름답게 만드는 중심에 카펠 다리가 있다. 카펠 다리를 보기 위해서 루체른에 온다고
몰려들어오는 이슬람 세력을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사람들은 유일신을 믿는 종교의 편협성을 두려워했다. 유일하다는 것은 마치 좁은 통로와 같아서 모든 사람들을 한 줄로 세워 그 통로로만 지나갈 것을 강요하는 것 같았다. 유일신을 거부하면 그 결과는 참혹했다. 큰 섬을 빼앗기고 도망쳐 온 작은 섬 발리(Bali).이 섬에서 사람들은 2만 개가 넘는 크고 작은 힌두 사원을 건설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을 넘어서는 미소가 풍겼다. 특정한 도그마(dogma)나 교리가 없는 힌두교는 수억 개에 달하는 신을 믿는다. 열린 마음으로 신과 교류하고 다른 종교의 견해도 인정한다. 다른 것을 응징하는 종교와 다른 것을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종교는 양립할 수 있을까. 전 국민의 9할 가까이가 이슬람교를 믿는 인도네시
카이저 빌헬름 교회는 큰 폭격을 맞았다. 교회의 반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종탑은 허물어지고 창문도 대부분 깨져버렸다. 그러나 파괴된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서 있다. 전쟁에서 얼굴에 상처를 입고 팔다리를 잃은 상이군인처럼 처참한 모습이다. 다른 유적들처럼 복원 과정을 거쳐도 될 듯한데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전쟁의 화마를 계속 되새기며 반성을 하기 위해서란다. 전범으로서의 뉘우침을 이렇게 계속하는 나라에 오니 문득 그렇지 않은 한 나라가 생각났다. 반성하는 나라는 아픔을 치유하는 호르몬을 만들어 낸다. 하노버에서 출발한 쾌속열차의 창밖으로는 독일 남부와는 전혀 다른 평야지대가 펼쳐지고, 북부만의 왠지 모를 검소함이 느껴졌다. 왜 평야를 보고 있는데 검소함이 느껴졌을까.
국 회 의 사 당 이 있 는 신 타 그 마(Sintagma) 광장에서 연일 계속되는 시위대의 농성을 보고 있노라면 참담한 느낌이 든다. 서양 문명의 발상지에 사는 자존심이 아주 높은 사람들이 단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거리로 몰려나와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은 상상이 안 된다. 아니 상상하기도 싫다. 그러나 저 높이 신을 영접하기 위해 서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시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한 모습을 보고 울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던 그들의 선조에게 현재의 아테네 시민들은 뭐라고 말할 수 있을 까. 모든 이들이 자신
밤 열시가 다 되었는데도 아직 창 밖은 하얗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백야이던가. 한여름의 헬싱키는 하얀 밤 속에 하얀 꿈을 꾸는 도시가 된다. 하얀 피부를 가진 큼직큼직한 사람들이 하얀색의 커다란 친절을 보여주는 이 도시를 걷고 있노라면 공해에 찌들어서 잠시나마 혼탁해졌던 나의 영혼은 하얗게 치유된다.꼭 봐야 하는 헬싱키 대성당을 찾기 위해 난 그저 길 가던 할머니에게 방향을 물었을 뿐인데, 내가 눈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를 지켜보며 손을 흔들던 그 분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먼 동방에서 온 손님이 행여나 자신의 말을 잘 못 알아듣고 다른 곳으로 가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나 하는 것처럼. 친절함마저 하얀색으로 나의 머릿속을 채운다. 헬싱키 대성당에 도착한 나는 놀라도 하얗게 놀랐다
왼쪽의 기린이 긴 목을 뻗어 과일을 따 먹고 오른쪽의 하마가 하품을 할 것 같은 아프리카. 지나가는 차 안으로 코끼리가 코를 내밀어 먹을 것을 청하고 저 멀리서 먹이를 잡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치타의 모습이 상상되는 곳. 케냐 마사이족 언어로 맛있는 물이라는 의미를 가진 도시 나이로비에 설레는 마음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설렘은 곧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짐작은 어느 정도 했었지만 공항의 조악한 시설은 말할 것도 없이, 나이로비의 도로는 민망할 정도로 차가 지나가면 흙먼지를 만들어 냈고, 그 흙먼지 속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하얀 치아 색만이 선명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남아공 케이프타운 다음으로 발전된 도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