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우리나라 컴퓨터 도입 초기에 모 TV방송에서 여학생과 컴퓨터의 계산실력 대결 방송을 한 적이 있다. 열 자릿수 열 개를 더하는 시합이었는데 여학생은 위에서 아래로 문제를 한 번 쓱 보고는 답란에 3자리 수를 적는 것을 몇 번 반복하여 불과 5초 정도의 짧은 시간에 암산을 마쳤다. 사회자는 컴퓨터의 계산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여학생의 승리를 선언했다. 계산 시간만 따진다면 당연히 컴퓨터가 이겼겠지만 아마도 컴퓨터에 수를 입력하는 시간부터 따지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사람과 대결을 벌인 최초의 기계는 1940년 미국 웨스팅하우스 전자회사에서 만든 님(Nim)게임 전용 기계인 Nimatron이다. 이 기계는 그해 뉴욕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소개되었고, 관람객을 상대로 10만 번이 넘는 게임을 벌
최근 귀향이라는 영화를 관람했다. 일제시대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아간 위안부들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 제작의 동기가 된 위안부할머니들이 그림치료에서 그렸다는 그림들을 보는 동안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 영화의 내용과 최근에 발생한 위안부 문제들이 어우러져 분노가 치밀어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지난해 12월 28일 한일외무부 장관들은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이름으로 위안부에 관한 양국의 협상내용을 발표한 바 있다. 과연 정부가 피해자들인 위안부 할머니들을 배제하고 불가역적인 해결을 할 수 있는가? 당사자인 위안부할머니들 뿐만 아니라 헌법학계 등에서도 법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1월에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는 박유하 교수가 저술한 ‘제
본교가 사이버대학을 운영한 지 4년이 넘었다. 그동안 숭실사이버대학교은 21개 국내 사이버대학 중에서 가장 성과가 뛰어난 학교 중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작년에는 사이버대학 평가에서 최우수 등급을 받았고, 올해는 동남아 국가에서 협약 제안이 오는 등 국제적인 주목까지 받고 있다. 최근 사이버대학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이들의 입학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인강 세대로서 사이버교육에 거부감이 없고, 저렴한 학비에 취업과 학업을 겸할 수 있다는 매력에 학생들이 대거 사이버대학의 이공계열로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이제 사이버대학은 단순 평생교육기관을 넘어 어엿한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의실 교
130여 년 전 중국 푸저우(福州)의 영화(英华) 서원에서 중·영문 이중언어 교육논쟁이 벌어졌다. 개항장에서 서방과 활발한 무역을 경험한 중국 사람들이 앞으로 영어가 세계 공용어가 될 것을 짐작하고 서방선교사에게 영어교육을 부탁한다. 이런 실질적 필요에 대한 요구와 당시 서방사상에 목말라 있던 많은 지식인들을 기독교로 끌어들이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 영어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실용적 측면은 선교사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선교를 세속화시킬 수 있다는 염려와 기독교 교육의 본질을 훼손할 수 있다는 반론에 부딪힌다. 굳이 영어가 아니어도 자국의 언어를 통해 기독교 진리를 전달할 수 있으며 또한 자국의 언어교육이 당시 고조되는 민족의식을 더 고양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시작한
어느새 겨울의 쌀쌀함이 물러가고, 봄의 생기가 느껴지고 있다. 캠퍼스는 신학기를 맞아 다들 새로운 계획들과 함께 여러 다짐들을 하고 있을 듯하다. 특히 새로운 선생님과 학생들 간에, 새 로운 수업의 구성원들 간에 관계들을 맺게 되 는데 어떻게 하면 이러한 관계들을 잘 만들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우리 대학생들이 졸업 후 사 회 초년생, 중간관리자로, 최고경영자로 발전하 면서 가장 쌓기 어려운 역량 중의 하나가 관계 역량이다. 다양한 형태로 생성되는 관계 속에서 앞으로 우리 숭실의 학생들이 가졌으면 좋겠다 싶은 몇 가지 덕목을 짚어볼까 한다. 첫째, 이청득심의 태도가 중요하다. 혹자는 남을 잘 설득하기 위해 언변이 뛰어난 것이 중 요하다고 하겠지만 남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
이제는 흔히 듣는 ‘네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문구는 성서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이 세간으로 흘러들어가 종종 사용되고 있는데, 아마 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창대하고 싶은 미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 우리의 삶은 오히려 그 반대이다. 흔히 말하는 ‘작심삼일’이 그것이다. 창대하게 계획하지만 용두사미로 끝난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새로운 계기가 생기면 다시 꿈을 꾼다. 필자가 어렸을 때 다니던 이발소에는 말 세 마리가 달리는 그림 액자가 붙어 있었다. 왜 말 세 마리일까? 우연찮게 듣게 된 설명인즉슨 인도 격언에 따르면 인생에 세 마리 말이 나에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첫 번째 말은 천천히 오므로 마음만 먹으면 쉽게 올라탈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놓치면 두 번째 말이 오는데
작금의 한국 사회는 어지럽기만 하다. 경제적 계층 갈등, 남북한 간의 대치 상황, 미묘한 동북아 정세, 다가오는 총선. 한국 사회는 시대적인 리더십이 요구되고 있다. 현 숭실의 상황도 녹록치 않다. 강요되는 구조조정, 침체된 분위기와 구성원의 사기저하,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감. 숭실도 이러한 위기를 벗어나게 할 리더십이 요구되고 있다. 과연 어떠한 리더십이 한국사회, 그리고 숭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온정적 합리주의(CR: Compassionate Rationalism) 리더십을 제시하고자 한다. 온정적 합리주의는 온정주의와 합리주의를 통합한 것으로 필자가 오랜 기간 리더십을 연구하면서 만들어낸 새로운 용어이다. 온정적
최근 대한민국 청년 실업률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높다고 한다. 그 이유를 놓고 말들이 많다. 심지어는 정부와 정치권, 기업들 서로 폭탄 돌리기 식 비난만 가하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우 리 국내시장에서 일자리가 감소할 수밖에 없는 징후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발표한 자료 에 따르면 시가총액 기준 세계 500대 기업 중 국 내기업은 4개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는 10년 전 9 개보다 5개나 감소한 수치다. 반면 페이스북, 알리 바바 등 소프트웨어 기반의 벤처기업들이 약진 한 미국이나 중국은 급성장 또는 지속적 성장을 거듭하면서 세계 경제를 양강체제로 고착화시켜 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이 상
웨어러블 디바이스(wearable device)는 착용 가 능한 전기·전자 기기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스마 트 와치나 밴드가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아직 한 정적인 형태밖에 갖추지 못한 디바이스가 다양 한 패션 제품으로 확대되기 위해서는 전자 섬유 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전자 섬유는 다른 전자 소재와 다른 특성 을 갖는다. 먼저 전도성(conductivity)과 유전성 (dielectric), 그리고 압전성(piezo-sensitivity) 등 의 성질을 보인다. 실이 교차하며 직조된 패브릭 (fabric)의 형태로서 옷감처럼 처지는(drapable) 기능도 있다. 투습 방수와 보온성 및 촉감 등의 기능성과 감성적 속성을 조절할 수도 있다. 이런 특성들로 염색과 패턴 봉제 등 생활 제품의 제조 공정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비판 여론이 뜨겁다. 비판의 요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정해진 하나의 올바른 역사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인데, 국정 교과서는 정부가 ‘올바른 역사’의 내용을 획일적으로 정할 수 있게 한다. 둘째, 현 집권층의 이해·관심에 따라 소위 ‘올바른 역사’의 서술 방향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특히 현대사의 친일과 독재의 어두운 역사가 왜곡될 수 있다는 걱정이 국정화 비판 정서를 부채질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 의견에 동의하면서 교과서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점을 짚어보려 한다. 입시 위주의 서열화가 우리 교육의 대표적인 병폐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교육 환경에서 교과서는 ‘바이블’의 권위를 지닌다. 교과서는 시험과 평가에서 ‘정답’의 최종 근거가 되며
벌써 한 해가 마지막 지점을 향해 내닫고 있다. 캠퍼스를 물들이고 있는 단풍도 곧 쓸쓸히 떨어질 것이고,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새하얀 눈으로 덮인 교정을 바라보며 새해 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해질 것이다. 이처럼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가고 그 시간의 흐름 속에 무수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된다. 잠시 생각해볼까? 지나온 일 년여의 시간 들 속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직간접으 로 만났었는지, 또한 그들과의 교유 속에서 얼마나 많은 말들이 오고갔는지를. 여기서 중요한 것이 ‘말’이라는 소통 행위다. 우 리는 말의 향연 속에서 누군가에게는 기쁨과 위로를, 또 누군가에게는 좌절과 고통을 맛보게 한 다. 무심결에 던진 한 마디 말 때문에 혹자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도 되지만, 또 다른 이는 죽음의
눈에 띄게 낮아진 기온 탓에 콜록거리며 연구실 입구에 들어서니 9월 말 일자 숭대시보가 눈에 띈다. 헤드라인은 ‘본교 기업체 평가 4년간 지속적 상승’ 나도 모르게 얼른 집어든다. 숭실 구성원으로서 기쁘고 희망적이다. 기분 좋은 한 주가 될 듯하다. 외국어 능력과 리더십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다는 문구에 마음이 무겁다. 취업전문 영어 수업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하에 또 다른 현실적 무게를 학생들에게 감당케 한 것은 아닌지 진심어린 반성도 해 본다. 관심 갖고 보지 않으면 그냥 흔한 신문 몇 장인 숭대시보. 그러나 관심으로 집어 든 나의 행동이 학교 소식, 제자들에 대한 걱정, 내 수업에 대한 반성, 어떻게 하면 숭실인들을 더 사회에 쓰임 있는 사람들로 키울까에 대한 구체적 플랜까지 준다. 아하. 나는 현실에 무
교양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교양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그 이념이나 목표에 대해 사람마다 아주 다르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원인은 교양교육의 개념 자체가 고대 로마에서 시작하여, 서양 중세, 근대 계몽주의, 현대의 교육 목표에 따라 다르고, 유럽 국가들과 미국, 일본 등 지역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경우 교양교육에 끼친 교육외적 영향력, 즉 일본의 식민지 교육과 유신 시대의 ‘국민’ 교육, 그리고 1980년대 이후 환경적 변화에 따른 여러 차례의 급격한 교양교육의 틀 변화 등이 그 개념적, 실질적 혼란의 또 다른 근본 원인이기도 하다. 우리 대학은 교양교육에 전념하는 베어드학부 대학을 만드는 등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현재의 교양교육이 충분히 만족스러
시리아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유럽에 거대한 난민 위기가 발생했다. 4-5년째 계속되는 내전과 잔혹한 이슬람국가(IS)의 부상으로 시리아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세계를 떠돌게 되었다. 터키, 레바논, 요르단 등 시리아 이웃나라에는 수십만에서 수백만이 피난하여 이미 난민 포화상태다. 그러자 이들은 다시 안정된 유럽으로 목숨을 건 대이동을 시작했다. 한국에도 이미 수백 명의시리아인이 난민신청을 했지만 불과 3명만이 인정을 받았다는 보도다. 잘 살아보겠다고 선진국으로 일하러 오는 경제이민과 난민은 구분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국가는 국익과 경제사정에 따라 경제이민을 통제하고 조절한다. 경제이민과 달리 난민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생존을 위해 피난한 사람들이다. 이것이 바로 국제사회
누군가 당신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동물은?”이라는 질문을 한다면 가장 먼저 어떤 동물을 떠올리실까요? 아마도 각자의 관점과 이해 관계에 따라 지명하는 동물이 다를 것입니다.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꿀벌’을 고르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지구상에서 꿀벌이 사라진다면 4년 안에 우리 인간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동물도 인간의 생존에 이렇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동물은 없습니다. 꿀벌은 단순히 꿀을 생산하는 일 외에도 많은 일을 합니다. 꿀벌이 하는 일 중 인류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수분(가루받이)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작물의 30% 이상이 꿀벌에 의해 수분이 됩니다. 작물에 따라 꿀벌이 수분에 미치는 효과는 차이가 있지만
지난 주 중국은 전승절 행사를 통해 첨단 군사력을 전 세계에 과시했는데,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은 열병식에 참석하지 않고 중국의 군사굴기를 우려스럽게 지켜보았다. 일본에서는 아베 총리 집권 이후 역사, 영토 문제 등에서 노골적인 우경화정책과 함께 평화헌법의 재해석을 통해 군사력 사용이 가능한 보통국가화를 추진하고 있다. 또한 북한의 핵개발 노력과 비대칭 전력을 통한 도발 등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긴장이 지속되는 상황이다. 이렇듯 현재 동북아시아에서는 지역 국가들간의 경제적 상호의존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갈등과 긴장이 증대하는, 이른바 ‘아시아 패러독스’가 완화될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다. 동북아 지역 갈등의 핵심은 미중 간의 경쟁 심화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최근 해양
‘따봉!’의 의미를 처음으로 확실히 알게 된 곳은 2년 전 국제 법철학 및 사회철학대회가 열렸던 브라질에서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전 어느 광고에서 등장인물이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크게 말하면서 유명해졌다. 우연한 기회에 익숙해진 ‘따봉(ta bom)’ 한 마디로 학회가 열렸던 벨로 리존테, 한국으로 돌아오던 길에 들렀던 이과수 폭포와 상파울로를 편히 다닐 수 있었다. ‘따봉’은 ‘좋다’는 의미인데 브라질 사람들은 이 말을 할 때 가장 활기차고 행복해 보였다. 내가 현지어를 거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혀 개의치 않는듯, 공항에서도 버스정류장에서도 가게에서도 서로 행복한 표정으로 인사할 수 있었다.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국제 법철학 및 사회철학대회의 주제는 매번 변하지만, 그
대학구조개혁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교육부의 특성화 정책은 현재 교육의 미래 비전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특성화 정책에 따라 각 대학들이 ‘융합’이라는 키워드로 학문의 근본을 쌓아야 할 학부교육과정에 정체성 없는 전공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융합의 시도는 일반적으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발상과 관련지어 진다. 학계에서 융합은 일반적으로 이종학문 간의 결합을 통해 서로 공통의 개념을 만들고, 협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융합은 한 분야에 대한 정체성과 주체성의 정립이 우선적으로 행해진 이후부터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해외의 경우 일반적으로 융합학문은 대학원 과정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융합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인기몰이식 융합학부 생성 등을 학
살다보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잘못 알아들어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상대방의 말을 잘못 알아들어 결국 시비로 번지는 경우도 많고, 유명인이 방송에서 한 말을 잘못 알아들어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난다. 말하는 사람의 발음이 불명확하거나, 주변의 소음이 많거나, 혹은 말의 속도가 너무 빠른 경우, 듣는 사람은 들은 내용 자체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판단에 입각하여 소리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가령 열 살 미만의 어린이에게 “어버지가 집에 들어오셨다”라고 말하면서 따라하라고 하면 어린이는 들은 그대로 ‘어버지’라고 하지만 열 살 이후의 청소년들이나 어른들은 ‘아버지’로 들었다고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셨다”로 바꾸어 말한다.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현대사회는 분노의 사회이다. 아니 분노할 줄 알아야 하는 사회이다. 불의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문명, 특히 컴퓨터와 인터넷 속도는 인간의 삶을 초 단위로 변화시켰다. 0과 1의 2진법 사회는 수천 년 역사를 관통하던 10진법, 12진법 가치를 사회변혁에 뒤쳐진 낙오된 유물쯤으로 치부하고 있다. 현대사회의 모든 인간은 2진법 세상에 내몰린 슬픈 피에로가 되어가고 있다. 피에로는 자신의 존재감, 자신의 철학이 없는 어릿광대일 뿐이다.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감시의 독방에 갇혀 아무런 자각증상 없이 보이지 않는 빅 브라더의 지시에 따르며 맹목적 순종의 삶을 산다. 시스템에 의해 조작된 삶을 살아가면서도 이를 자각하지 못하는 슬픈 인생, 그게 바로 피에로의 삶이고,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