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경세상만사 <12> - 끝



한 해의 마지막 12월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올해 나는 무엇을 했는가 한 번 되짚어보지만 잘 한 게 없다. 뭐 내 자신을 갈고 닦은 것도 아니고, 하다 못해 남자친구를 만든 것도 아니고, 성적조차 나쁘다. 내 지난 1년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 다이어리다. 처음 몇 달만 끄적여놓고 5월부터는 새하얗다. 5월부터 장장 7달을 저렇게 한 것 없이 살았던 걸까. 새로 구입한 2009년 다이어리가 무색하다.


다이어리를 넘기다 발견한 기억이 있다. 절대 잊지 않겠다고 바득바득 이를 갈며 써놨던 그 날, 5월의 어느 일요일. 늘 촛불집회 참여시 10시전에 집에 돌아갔지만 그 날은 일찍 가지 않고 한 번 있어보기로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가벼운 마음이었다.주변 사람들에게 음료수를 받는게 기뻤고, 앞과 옆에서 전경을 막아주는 예비군 오빠들은 든든했다. 그러나 그 날, 10시가 넘어가면서 그 가벼움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낮과 밤의 세상은 그렇게 달랐다. 시위 시작하고 주에 세 번은 ‘달렸다’는 한 언니가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아, 저 여자 목소리 너무 싫어.” ‘불법’이라 외치는 여경이 그 말을 세 번 반복하면 바리케이트가 형성되고 살수차가 물을 뿌리기 시작한다. 그 잔인한 풍경을 만드는 신호가 그녀의 목소리였으니 언니는 얼마나 그 소리가 듣기 싫었을까. 물은 거침없이 뿌려졌고, 욕지거리는 귀에 쟁쟁거렸다. 뒤쪽에 있던 나도 넋이 나갈 정도였으니 앞은 또 어땠을까. 한쪽에선 또 다른 누군가가 고함을 치고 있었다. “기사 똑바로 써주세요!” 한참 언론문제가 수면으로 떠오르려던 때였다. 다음날, 그 날의 일은 그리 크게 보도되지 않았다. 맞고 물쏜 이야기는 당연히 없었고 나는 감기를 앓아 조판작업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 때 내 마음을 가라앉힌 만화가 <바텐더>였다. 천재적인 바텐더 류를 주인공으로 한 이 만화는 옴니버스 식으로 매 회마다 한 잔의 술을 통해 사람을 위로하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바는 술을 놓는 널빤지일 뿐이지만 그곳에 바텐더가 있기에 친절함(tender)이 생겨난다는 것은 왠지 눈물이 났다. 힘들었을 때, 그런 배려의 이야기는 평범하지만 감동적이다.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주고 있다는 느낌. 그래 그래, 더 말해봐. 그랬구나, 힘들었겠구나. 술 한잔 마시고 힘내렴. 어느새 나를 다독이고 있는 이야기 때문인지 페이지는 쉽게 넘어갔다. 단 하나,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이 대사였다. ‘의사, 약제사, 그리고 바텐더는 절대로 손님을 배신해선 안된다. 모두 처리 방법 하나로 독도 약도 될 수 있는 걸 팔고 있으니까.’ 그 날 나는 책 뒤에 연필로 ‘경찰’을 추가했다. 살수차 하나로 시민을 범죄자로 만들 수 있었으니까. 얼마 안있어 정치가로 고쳐쓰긴 했지만.


내게 올해는 참 힘들었던 해로 기억된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렇다면 조심스레 권하겠다. 만화속 허구의 인물이지만 주인공이 만들어주는 한 잔 술에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받았으면, 그리고 행복해졌으면. 내 소원은 그거다.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한 명도 빠짐없이. 몸과 마음에 상처입었던 많은 사람들, 부디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행복하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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