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오기로 경쟁에서 승리하라
열정과 오기로 경쟁에서 승리하라
  • 이소현(07) 기자
  • 승인 2009.04.01 23:22
  • 호수 99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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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어요] 창간 90주년 특별대담 - 숭대시보 속간 초대 편집국장 이 중(영문ㆍ54) 전 총장

 

본보에서는 창간 90주년을 맞아 숭대시보 제1대 초대 편집국장 및 제10대 본교 총장을 역임했던 전 이중총장을 만나보았다. 세월의 흐름이 무색할 정도로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그의 모습은 숭대시보의 자랑스런 선배의 모습이었다. 제10대 전 총장의 모습보다는 제1대 숭대시보 편집국장이라는 모습이 우리에게 더 낯설었던 그와 반세기가 흐른 지금 현재 숭대시보를 이끌고 있는 55대 국ㆍ부장단 기자들의 만남은 그 자체로도 경이로웠다. 선배의 가르침을 본받아 온고지신의 마음가짐을 되새길 수 있는 자리임에 동시에 늘 변화무쌍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의 모습을 통해 지금의 숭대시보를 돌아볼 수 있었던 자리였다.

 

열악한 상황에서 자부심 되찾게 해 준 '숭대시보'

1956년 10월 10일. 1938년 3월 31일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를 당한 이후 폐간되었던 숭대시보는 해방 이후 1954년 4월 15일에 재건된 서울에서 다시 발간될 수 있었다. “사실 그 때의 학교 상황은 대단히 열악했다”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1954년 재건 당시 학교에 존재했던 과는 단 5개로, 영문ㆍ철학ㆍ사학ㆍ법ㆍ경제 뿐이었다. 나무 판자의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영락교회의 한 켠에 자리잡았던 본교는 그렇게 다시 평양 숭실의 위상을 서울에서 이어져 나가길 염원했다. 찬란한 역사와 더불어 모두가 일제에 굴절했지만 신사참배를 했던 본교는 16년 동안이나 그 맥이 끊겼던 안타까움을 회고하며 그의 목소리는 차분해해졌다. 그 공백기의 기간동안 여느 대학들은 승승장구했고 “과거를 알려야 한다. 순교한 대학이라는 자랑스러운 긍지를 가지고 다시 재건하는 당시의 상황의 숭실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그러한 상황을 설명하던 그는  “피난대학의 의미가 아닌, 단순한 평양숭실의 연장선상이 아니다. 신사참배 거부의 자랑스러운 긍지가 있는 대학이다. 비록 재건된 학교지만 우리 스스로의 역사를 알고 있어야 한다”던 그는 100여년을 이어져 내려온 우리학교 신문의 ‘족보’를 찾는데 주력했다. 결국 1919년 4월 4일 평양 숭실에서 처음 창간되었던 그 날로부터 이어나가자는 의미에서 속간 1956년 10월 10일 다시 신문은 끊어진 역사의 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새로운 시작이 아닌 찬란했던 평양 숭실의 맥을 잇는 의미의 '다시 시작' 이었다.

 

히스토리,프레젠트,미스테리


 '창간'이 아니라 '속간'으로 이어짐을 강조했던 그는  새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원래 갖고 있었던 것을 되찾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신문 이름에 대해서도 한참을 고민했다고 한다. “당시 사학부 교수로 재직중이셨던 우호익 교수님이 학교 역사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분이셨기 때문에 문의를 드렸고, 1919년 처음 발간했던 우리 학교 신문의 제호가 숭대시보라는 것을 알고 이를 그대로 쓰기로 했다”고 말했다. 중간에 숭실대학신문으로 한 번 바뀌기는 했지만 다시 환원되어 숭대시보라는 그 이름으로 9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 감개무량하기만 하다는 그는 역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제는 히스토리, 내일은 미스테리. 오늘은 프리젠트.” 어제는 역사고, 내일은 아무도 모르고, 오늘은 현재이며 동시에 ‘선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선물을 어떻게 이용하냐에 따라 성공한 역사를 만들 수 있고 그것은 미래에서 볼 때 좋은 히스토리가 된다는 그는 90주년이란 히스토리를 가진 숭대시보가 좋은 프리젠트를 만들어 미스테리이기만 한 내일에서도 ‘좋은 역사’를 갖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

 

'무기정학'의 중심에서 숭실의 정신 깨닫다


초대 편집국장으로서 신문사를 재건하는 것은 학교를 재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들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그는 ‘무기정학’을 받았던 과거의 경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숭대시보 제2대 편집국장을 맡기도 했던 동기와 함께 신문을 발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학생들이 교수를 비판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를 신문에서 기사화하는 과정에서 예민한 부분이 다뤄졌고 이 문제로 그는 ‘무기정학’을 겪게됐다. 젊은 나이였던지라  억울한 생각이 들어, 이후 대법원 판사로도 활동하신 법학과 방순원 지도교수에게 항의했다가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이 군, 무기정학이 좋은 거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중에야 안 것이, 기한이 정해져 있던 유기정학에 비해 무기정학은 언제든지 풀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배짱좋게 정학을 받았으니 시험은 보지 않겠다고 하고 무전여행을 떠났는데, 다녀오고 나니 정학은 풀려 있고 졸업식 때는 공로상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이 에피소드만 봐도 숭실대의 특성을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숭실대가 고리타분하다고 하는데, 사실 숭실대는 원칙성만 갖고 있는게 아니라 융통성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처벌로서 정학은 주지만, 무기정학을 줌으로서 언제든 풀 수 있도록 배려하는 모습은 ‘원칙없는 예의 없고, 예의 없는 원칙 없다’는 숭실의 모토를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었다고 했다. “그것도 다 숭실대 안에서 있으려고 노력해야 가능한 일이죠. 이거 못 참고 뛰어나간 사람도 많아. 예로 황석영 작가도 숭실대에서 3년을 보냈지만 결과적으로 중간에 나가 우리학교 졸업생으로는 등재되지 못했다. 학교 측에서야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지만, 그것 또한 원칙을 중요시하는 우리학교의 중요한 전통 아니겠느냐"고 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흐르는 역사, 숭대시보 변화의 필요선


 1919년 창간. 조선ㆍ동아일보 보다도 앞서나간 대학신문이었던 숭실대학신문의 역사는 평양숭실에서 창간되었을 그 날로부터 한세기, 서울 숭실에서 속간으로 이어져내려온 이후로 어느덧 반세기가 흘렀다. 그 만큼의 세월이 흐른만큼 학보의 역사와 기술의 발전 또한 또 하나의 역사였을 터. 그에게 반세기가 흐른 지금의 편집국 환경과는 전혀 달랐을 그 당시 환경의 모습을 듣고 싶었다. 초기 그를 포함한 제2대 편집국장이기도 한 연변과기대 총장을 역임하고 있는 김진경 동문과 둘이서 신문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원고작성은 둘이 했고, 학생들과의 좌담회나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지금처럼 주간으로 발간하기에는 기술도 열악한 상황이었고 인력도 적었기에 한 두달에 한번 꼴로 발행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레이아웃을 짜는 것’이었다고 답했다. 학생끼리 편집을 하기 때문에 신문의 레이아웃을 짜는 편집 기술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던 김경래 기자에게 레이아웃 기술 지도를 받아가며 신문을 제작했다. 직접 경향신문사로 가서 작업을 했고, 지금처럼 기술이 진보해 속도전이 진행중인 때와는 달라 일일이 기사들을 판에 앉히고 짜는 작업을 해야 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엄청나게 발전했지.”라고 말한 그는 이런 신문의 편집 기술 발달을 베트남전의 웨스트 모어 장군의 이야기를 곁들이며 “기마전의 시대에서 핵전쟁의 시대로의 변화”에 비유했다. 웨스트모어 장군이 처음 사관학교에 있을 때는 기마전을 배웠지만, 베트남전에 참여할 때는 핵전쟁 시대가 됐다는 것이었다. 또한 웨스트모어 장군이 그러한 급격한 변화 속에서도 장군으로서 군사들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은 기술의 변화를 잘 좇았기 때문이라며 학보사에도 그와 같이 되라는 조언을 했다. “기술의 발전, 즉 변화시마다 학교 신문 역시 그 변화에 쫓아가야한다. 우리나라 안에서의 학보를 보기보다는 외국대학의 학보를 보면서 시야를 넓히고 경쟁해야 한다”며 변화의 대처하는 신문의 역할을 조언하기도 했다. 덧붙여 수요자 원칙을 중시할 수 있는 독자의견을 반영하여 학생들이 원하는 신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념의 틀에 묶여 있기 보다는 이번 90주년을 맞이하여 신문사 스스로 내부고백과 성찰을 과감히 독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학보가 새로운 변화에 맞대응 할 수 있는 길임을 시사했다.

 

학보사 출신으로 총장 역임한 독특한 경력

그는 숭실의 역사와 함께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학보의 초대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2005년까지는 제10대 총장자리를 역임하기도 했다. 학보사에 있다 보면 본의아니게 학교 방침에 대해 비판하는 일이 적지 않은데, 그 상반되는 양쪽 자리에 다 서 본 독특한 경험에 대해 꼭 듣고 싶었다. “사실 내가 학교 선배기도 하지만 언론계 선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신문을 발행하는 후배들에게 따로 이야기할 기회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단다.

당시 학보는 혼란스러웠던 학교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며 시대적 이념에 대한 내용을 많이 다뤘던 때였다. “신문사에는 총장부터 내려가는 수직적 구도가 있고, 타대와 공유하는 기자들간의 수평적 구도가 있어요.” 당시에는 수평적 구도가 강조되는 시기로, 타대와 동시에 같은 내용의 외부청탁이나 기고를 싣는 일도 잦았다고 했다. 그래서 총장이기 이전에 학보사 선배로서 숭실 구성원과 동문들, 즉 내부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이념적, 정파적 시각을 가진 외부기고자들의 글을 학보에 싣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이념적 시각보다는 내부에서 학보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기를 바랐었다. 그렇지만 총장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인식해,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후배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선배로서 늘 학보사 출신의 후배들이 어디로 진출하는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학보사 출신의 후배들이 사회 각계 각층의 다방면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어요.” 실제로 한때는 성적이 좋아야만 신문사에 들어올 수 있기도 했고, 학보 출신자들이 취직할 때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고도 한다. 그러한 자긍심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속간 이후 50년간 지탱해 올 수 있는 힘이였다고 말하는 그. 학보사 지원율이 해마다 줄어드는 지금의 상황을 선배인 그에게 전했더니 그는 안타까워하면서도 “그것도 추세다. 대신 그 추세에 맞춰 신문도 수요자의 요구에 맞춰 나가야 한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당시 신문사에서는 붓으로 기사를 썼는데, 만년필로 교정을 보면 욕을 먹던 시대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만년필도 아니고 볼펜, 더 나아가선 컴퓨터로 바로 고치고 있으니 당시 사람들이 본다면 노발대발할 일이지만 그것이 시대의 흐름이고 그를 따라야한다고 웃음짓는 그에게서는 시대변화에 뒤처지기보다는 앞서서 자신을 발전시켜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관록이 엿보였다.

 

여전히 저널리스트로서 활발한 활동

그의 오른쪽 두 번째 손가락의 굳은살이 그동안 그가 살아온 삶을 집약해준다. 본교 영문과를 나와 한국 현대문학을 전공한 그는 본교 총장을 역임, 현재는 상해사범대학 천화학원 명예교수, 천진사범대학 고문교수, 연변과학기술대학 상임고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전히 승승장구 하고 있다. 1997년 봄부터 5년 동안 중국 공산혁명 유적지인 정강산, 연안, 서백파 등 4만여 리를 기차와 버스를 타고 답사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기행평전인 ‘모택동과 중국을 이야기하다’와 2년동안 교수신문에 연재했던 ‘이중의 중국산책’을 연재하여 이를 모아 책으로 발간했다. 중국에 관련된 칼럼을 발표하고 여전히 문학과 칼럼 및 끊임없이 글을 쓰는 그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저널리스트’라 부르며 다양한 활동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후배된 사람으로서 선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선후배 관계를 떠나 존경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선배'로서 들려주는 이야기

 
대학은 지식이나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배움의 장소이기 이전에 다양한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에서 살아가는 훈령장소임을 강조하는 그는 인간관계를 통해 인격을 형성해 나가는 곳이 바로 캠퍼스라고 말했다.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닌 사회적 유기를 맺는 인간관계의 형성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의 참지식을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신문도 그런 삶의 지혜와 사회적 관계들을 조망할 수 있는 시각을 전달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학교의 동문이자 총장이기 이전에 55대 숭대시보 기자들 앞에서는 제1대 숭대시보의 선배로서 이 자리에서 따가운 조언과 앞으로 숭대시보다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지혜를 가르쳐준 자리였다. “늘 세상의 변화에 발빠르게 우리나라 대학신문을 대표할 수 있는 선구자로서의 숭대시보가 되길 바란다. 과거 학보사 출신의 기자들은 무조건 채용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학보사의 영향력이 잦아드는 것도 세월의 흐름이다.  노력한 만큼 작품이 나오고 그 토대위에 서울 숭실에서의 숭대시보 50년의 역사는 또 다른 50년의 역사로 이어질 것이니 희망을 가져라" 라는 조언을 끝으로 그와의 인터뷰가 끝났다. 학교의 동문이자 총장이기 이전에, 학보사 선배로서 숭대시보가 어떻게 나가야 할지에 대한 지혜를 전해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의 조언이 앞으로 숭대시보 행보의 답이 되길 기대해본다.

 

대담ㆍ정리 이소현(06) 기자  vitaminish@ssu.ac.kr
이소현(07) 기자 ricminhs@ssu.ac.kr
사진ㆍ강태욱 기자  kingdonkey@s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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