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싶었어요]-제 1회 숭실언론인 수상자 특별대담


그의 프로필을 보고 있으면 ‘한 길 인생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1997년 처음 책을 발간한 이후로 27권의 꾸준히 역사서를 발간하는 역사 평론가로서의 저력도 놀랍지만 숭실의 동문으로서 숭실의 정체성을 올 곧게 지켜온 그 정신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길’은 그가 역사평론가로 살아온 삶이기도 하지만 그의 정신이기도 한 것이다. 기자는 그를 만나면서 같은 숭실인으로서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할 지에 대한 반문의 시간이기도 했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걸을 것


 학창시절 가세가 어려웠던 그는 가족들과 함께 월세방에 살던 시절을 회고했다. 그 때 당시 주인집 서재에 꽃여 있던 함석현 작품의 ‘’의 책을 읽은 것이 바로 그가 처음 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였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도 이길을 선택해야 겠다고 느낀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이후 그는 학사, 석사를 모두 본교에서 거쳤고 동북항일연구로 또 다시 숭실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됐다.오로지 한길 인생을 살아온 그는 현재 저명한 역사평론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가 펴내는 수많은 역사서들이 쉽고 재미있어 대중적이라고 평을 받는다. 사관에 대한 직접 제시는 피하돼 각 시대에서 발굴된 1차사료를 가지고 철저한 문헌 연구와 고증, 역사적 상상력이 한데 어우러져 친근하고도 무게 있는 이야기로 역사를 풀어낸다는 점에서 그는 독자를 끄는 힘을 지니고 있다.

 

한국사의 쟁점에 정면도전


그가 우리사회 역사를 바라보는 주류 기득권과 다른 방식, 즉 역사를 축소해 바라보는 실증주의 사관에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 ‘인조반정’과 ‘노론’에 대한 실랄한 비판과 더불어 기존의 실증주의 사관을 거부하는 객관적 사료들로 독자들은 한마디로 그에게 ‘매료’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사회 역사를 바라보는 주류 기득권과 다른 방식 즉 역사를 축소해 바라보는 실증주의 사관에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인조반정’과 ‘노론’에 대한 그의 입장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집권세력에 대한 문제를 드러냈다. 이는 독립운동과도 이어져 남인과 소론이 주도한 독립운동일 뿐이지 인조반정의 주도세력인 서인과 그의 후신인 노론은 일제의 친일파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의 이러한 해석은 그간 실증주의로 내려왔던 사학에 대단한 반기였다. 더불어 ‘송시열~~~’에는 ‘정조 독살설’에 대해 역사 해석에 대한 독점권을 타파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옛 사관들이 쓴 내용을 보면 조선 초기는 비분강개하며서도 일반관점을 유지하려고 했으며 후기로 갈수록 당파 색깔이 뚜렷해 지면서 수정실록이 많이 나왔다. 후세에서는 한쪽 시각만 남는 것보다 이렇게 사관마다 다른 관점이 제시되는 것이 좋다”던 그는 “이런걸 보면서 글을 쓸 때 스스로 공평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어떻게 보면 한쪽 시각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답답할때도 있지만 집필한 책이 오랜세월 두고 볼 때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는 그가 왜 그토록 사료를 통한 객관적 근거에 몰두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천고'는 곧 그의 정신

그에게 실례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역사사관의 모토가 되는 역사가를 물었다. 그는 이미 2100여년전 거대 중국 땅을 사전답사로 역사서를 집필한 사마천을 비롯한 우리나라 역사학자 중 김일손 선생과 백암 박도식 선생, 가장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함석헌 선생을 꼽았다. “기독교적 바탕에 뿌리를 두고 유교에 밝았으며 조자와 장자와 같은 기본 을 갖춰 유연성 있게 사관을 펼쳤으며 동양고전도 현대적으로 해석한 함석헌 선생에게 일정 영향을 받았다”던 그의 호는 사마천의 ‘천’과 반고의 ‘고’를 따 옮길천에 곧을 고의 ‘천고’이다. 처음에는 이 호를 부담스러워 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역사관을 ‘천고’처럼 지향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겸허히 호를 받아들였단다. 그는 호가 지닌 의미 그대로 자신의 사관을 높고 곧게 펼치고 있기에 그가 지닌 호의 의미가 더욱 깊었다. 

 

숭실 몰락한 '독립운동가'의 후손

역사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숭실의 모습은 곧 그가 지향하는 역사관과도 일맥상통한다. “숭실은 한국 최초의 대학이며, 일제에 맞서 폐교까지 감행한 정체성을 지닌 대학”이라고 말하는 그는 숭실을 ‘몰락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숭실은 현실에서 주류를 향하지만 비주류이기도 하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내적 요소도 있겟지만 현대사 전개 자체에서 역사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비주류 였던 숭실의 정체성을 한번도 부끄럽게 여긴적이 없었다”던 그는 오히려 숭실의 정체성이 메이저 대학에 대한 심리적 우월감으로까지 표현했던 일화를 소개하며 이야기 했다.

그 에피소드로 한번은 출판사에서 그가 저술한 책을 발간할 당시 학교의 이름을 빼려고 한적이 있었단다. 그 이유가 어찌되었던건 간에 어느 언론이건, 출판이건 그의 이름 옆에 항상 ‘숭실대’라는 이름을 나란히 새긴다. 본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까지 이수했던 숭실인이여서가 아니라 ‘숭실’의 정신이 곧 그가 지향하는 역사관의 정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이다. “숭실 내부에서 주류가 되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현대사의 외적인 문제도 함께 해결하려는 필요가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면서 왜 몰락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 하는지 그제서야 의미를 아로새길 수 있었다.

 

"나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이다"

  “숭실 출신의 동문들을 보면 사회 곳곳에서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숭실의 '실'은 실력과 더불어 노력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실력이 뒷받침 될 때 그것이 곧 자부심이 된다”던 그는 스스로를 비주류중의 비주류라 칭한다.사학과 같은 보수적인 학문체계에서 비주류로서 걸어온 길이 녹녹치만은 않았을 텐데 "‘실력’이 곧 자부심이 된다" 던 그의 말처럼 그는 숭실의 정체성을 끝까지 잃지 않고 학벌과 시대환경과 같은 외적인 요건보다 내실로 위치를 견고히 닦아왔다. 비주류로 살아가는 그의 삶이 그래서 당당하기만 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이다.


내면의 가치에 귀기울여야


그가 마지막으로 전해준 이야기는 본보를 위해서도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게 한그 무엇이었다. “끼니를 걱정하던 부모님 세대에 비교해보면 지금은 오히려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행복도 역시 그러한지 알아야 한다. 물질은 사람의 욕심에 따라 끊임없이 늘어난다”면서 "내면의 가치라는 부분에 집중을 하며 가치를 추구하고 인문학적 소양을 꾸준히 쌓아가며 인간적 풍모가 있는 사람이 되라"고 조언을 했다. 그것은 곧 그가 사회 저명한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이 원하는 공통 인재상에 대해 조언을 하기도 했다. 더불어 본보에 대해 이런걸 밑바탕에 염두하여 올바르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신문이 되길 바란다며 그와의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그는 과거의 역사가 어떻게 현재를 움직이는지 또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몇 안되는 우리시대 역사와 미래를 잇는 사람이었었다. 역사의 거울을 통해 우리 사람의 진정한 모습을 성찰 할 수 있었던 것이 숭실인으로의 정체성을 가지고 당당히 '실력'으로 맞설 수 있는 자신감을 숭실인 모두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건 기자의 소망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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