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가 한반도 전역을 휩쓸고 갈 즈음, 2009년의 우리는 1909년의 청년 안중근이 되어 역사의 타임머신을
탔다. 여름 만큼이나 뜨거웠던 20대의 열정을 100년 전 조국애로 승화시켰던 6박 7일의 일정.
안중근 의사가 걸었던 수 천리 길에 청년 안중근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그 자리에 다시 섰다.
역사의 흐름에서 아픔을 다독이고, 스러져가는 당시의 현장에 청량한 바람을 불어넣기 위한 행보.
바로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편집자

첫 번째 페이지 - 시작 그리고 만남

  마지막 한국의 모습은 여름 치곤, 파랗게 시린 하늘이었다. 설레임 반 기대 반으로 연신 창밖의 모습을 가슴에 담았다. 탐방단 단원들이 한데 섞인 비행기 안에서는 담소를 나누면서 한국을 떠난 뒤 한 나절이 지나서야 연길에 도착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연길은 조선족 사회 중 가장 발달하고 정돈된 곳으로 꼽힌다고 한다. 연길, 즉 북간도 지역은 역사적으로 수차례 영토분쟁을 ‘앓아왔던’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번 탐방에서의 연길지역은 영토적 쟁점이 가져다주는 역사적 의의와 더불어 조선족 사회를 통한 민족적 문화의 측면에서도 큰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두번째페이지-“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

  어제의 기대감은 오늘의 유쾌함이었다. 이튿날 일정을 함께 할 연변대학교 친구들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조선족 친구와 옆자리에 앉는 것은 행운이었다. 탐방단원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때론 역사에 대한 진지한 대담을 나누며 우리는 조·중·러 국경이 맞닿아 있는 방천지역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은 낮은 철조망뿐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망해각 전망대에 올라 세 나라의 국경지역을 말 없이 내려다봤다. 호수를 끼고 있는 지역이 러시아, 바로 옆 두만강이 흐르는 곳이 북한…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는 숙연해졌다. 이곳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힘들게 살았던 민족의 한이 탐방단의 깃발을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세 번째 페이지 - 백두산, 다음을 기약하며…

  오늘이 바로 백두산 천지를 등정하는 날이다. 백두산이라는 이름만으로도 탐방단들의 오기를 꿈틀거리게 하는 것도 많진 않을 것이다. 기후변화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천지의 명성과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날이 좋기를 바랐지만 오늘처럼 구름이 잔뜩낀 하늘이 야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정에도 변동사항은 생겼다. 비가 너무 오는 탓에 천문봉이 아닌 장백폭포로 향했다. 하지만 백두산의 정기를 받은 우리들의 발걸음 역시 힘찼고 멀리 보이는 장백폭포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백두산의 파노라마를 두 눈 가득 담고, 이름 모를 노란 꽃 한 송이와 풀 한 포기에도 세심한 눈길을 주며 15분 남짓을 걸었을 즈음, 장백폭포의 힘찬 물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날 결국 백두산 천지를 보진 못했지만 자연이 준 교훈은 컸다. 좀 더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다시 나를 느껴 보라는 백두산의 배려가 아닐까 생각하며 모두들 다음을 기약하며 백두산에서의 일정을 마쳤다.

네 번째 페이지 - “나의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

  나흘째인 오늘, 우리는 일제에게 국권을 피탈 당했던 그 당시로 되돌아가 만주의 독립군 기지이자 한인 이주 동포 사회의 핵심역할을 해오던 용정지역에 우리 모두는 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잠시 후 차창 밖으로는 보기만 해도 아찔한 절벽 위에 푸른 소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었다. 이름하야 그 나무는 일제 강점기 핍박받던 민족의 아픔을 보다 못한 선구자들이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논하기위해 모이던 일송정. 이런 민족의 혼이 담긴 일송정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내 후추가루를 뿌려 메말라가게 만들었다는 그 당시 일제의 잔인함에 온몸에는 안타까움의 전율이 흘렀다. 일송정의 아픔을 뒤로하고 우리는 대성중학교에 도착했다. 우리민족처럼 배움의 중요성을 이토록 강조하는 민족이 또 있을까. 그건 배움의 여건보다 배움의 열정이 더 컸던 우리 민족성의 모습을 보여줬다.

  명동촌으로 자리를 옮긴 탐방대원들은 명동교회와 윤동주 생가를 방문했다. 명동교회는 규암 김약연 목사가 설립한곳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교회 내부에는 역사를 증언하듯 그당시 사진자료들로 하나의 전시관을 이뤘다. 교회 앞 마당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바로 김약연 목사가 생전에 남기신 말씀이다. 이 문구가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걸 보면,
그 당시 우리들의 충격이 컸나보다. 행동 하나 하나가 쉬운 요즘, 모든 행동들이 헛되지 않고 오히려 의연했음을 보고 지금의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하던 그 때였다.

 

다섯 번째 페이지 - 타국에서 느낀 자부심

  일어났을 때는 이미 하얼빈역사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하얼빈 역사 안에는 오가는 사람들의 행렬로 장사진을 이뤘고 중국 대륙 도시의 위력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열차에서 내려 우리들을 그토록 기다리게 했던 역사적 장소와 마주치게 됐다.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현장. 그런 역사적 사건과는 달리 하루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오가고 있었으며, 플랫폼 바닥에는‘이곳이 그곳’이라는 작은 표시 하나만으로 100년 전 현장이라는 점을 인지케 했다. 약간의 허탈감마저 느껴지는 그곳에 서서 우리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총살한 100년 전 10월 26일 9시로 되돌아갔다. 그 당시의 상황과 느낌이 온몸을 타고 흘러 숙연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안중근 의사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름난 의인인데 그가 역사적 거사를 치렀던 자리는 간단한 표지 하나만 있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했다. 한편으론 우리가 돌보아야 할‘우리의 것’들에 얼마만큼의 관심을 기울였는지도 반성하게 되었다.

  우리 스스로가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역사적 산물을 우리가 보존하고 계승하는 역할을통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야 함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여섯 번째 페이지 - 온 몸으로 뼈저리게 느끼다.

  어느덧 하얼빈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남겨둔 우리. 그 마지막일정은‘731부대’로시작하였다‘. 731 부대’는중국흑룡강성 하얼빈에 있던 일제 관동군 산하 세균전 부대였다. 1936년, 세균전 비밀연구소로 만주 731부대로 명칭을 바꾸어 만행을 이어갔다. 각 연구마다 마루타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생체 실험용으로 이용했다. 이렇게 해마다 600여명에 이르는 한국·중국·러시아 인들이 마루타로 희생되었다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제 만행에 대한 분노를 뛰어 넘어, 인간의 추악스런 모습을 간접 경험했던 우리들은 이 사건이 불과 60여 년 전에 일어났던‘현실’이었음에 또 한 번 몸서리칠 수밖에 없었다.

  소수의 과욕과 이기적인 행동이 무고한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피해를 안겨주는지를 역사를 통해 배웠던 하루였다. 731 부대. 지금 생각해도 온몸이 서늘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나보다. 유난히 청량하고 맑았던 하늘 아래 731부대 그 자체가 모순이었음을… 우리 모두는 기억할 것이다.


일곱 번째 페이지 -‘ 역사’ 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던 ‘청년 안중근’

  첫 단추를 잘 꿰맸을지언정 마지막 결실 만큼 중요할까. 6박 7일 간의 기나긴 일정의 마지막을 달리는 오늘은 그래서 더 중요하다. 그동안 우리는 연길과 백두산, 하얼빈에서 대련까지 여러 독립운동의 정신이 고스란히 서려 있던 항일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역사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마지막 일정의 려(여)순감옥으로 들어서 가장 먼저 안중근 의사가 투옥되었던 감옥으로 향하였다. 체감온도는 감옥이라는 장소와 맞물려 서늘하기까지 했다. 차가운 철창살 틈새로 보이는 옥사 안에는 안중근 의사가 생전에 사용하던침대, 책상 등이 그때를 회상하듯 잘 보존돼 있었다.

  잠시 우리는 그 자리에 섰다. 안중근 의사의 충절을 기리며 잠깐의 묵념을 올렸고, 순국할 당시의 안중근 의사를 기리며 저린 마음을 애써 참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의 그 마음을 다 헤아리진 못할지언정 그가 다녀간 길을 우리가 다녀갔고, 또 우리의 뒤를 이어 후대가 다녀갈 것이다. 우리의 일정은 끝이 났지만 역사의 흐름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역사라는 거대한 세월의 모습도 바로 현재 모습의 축적이 라는 점. 우리는 그 점만 기억하면 된다. 다져진 역사를 통해 지금의 현재를 알뜰히 살아가면 된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역사’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던 2009 청년 안중근 해외탐방단. 그 열정 만큼이나 앞으로의 행보에 지난 6박 7일 동안 하나되던 마음이 지속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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