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

  ‘새 것’에서 나오는 신선함과 청량감은 참 매력적이다. 그 매력에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이 우러나오고 사람들은 새것을 찾아 돌아다닌다. 하지만 여기‘새것’못지 않게 매력적인‘헌 것’이 있다. 바로 헌책이다. 헌책에서 나오는 연륜은 넓고도 깊다. 헌책이든 새책이든그속에 실린 내용이야 같겠지만, 헌책이주는 신뢰감은 뭔가 남다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모든 게 다 있을 것만 같은 대형서점에서도 찾지 못한 책을 7평 남짓한 헌책방 귀퉁이에서 찾았을 때의 짜릿함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그‘맛’한번 느껴보고자 약도하나 손에 쥐고 신촌으로 떠났다.

  서울시내에 헌책방으로 유명한 곳은 여러 곳이 있지만, 신촌 만큼 그 흔적이 깊게 새겨진곳은 드물다. 예
전에는 왁자지껄 모여 있었던 책방들이 지금은 하나 둘 사라져 모두 띄엄 띄엄

떨어져있다. 그중가장 먼저 찾은 곳이‘정은서점’이다. 한눈에 봐도 족히 수십년은 되어 보이는 이 책방은 17년 째 수십 만 권의 책들을 품고 있다. 그 안에는 40년간 책만 팔아 온 늙수그레한 사장이 있다. 가게에 들어서면 조금은 엄한 목소리로 사장이 한마디한다“. 가방놓고들어가,책무너져”.사장말대로,수십만권의책들은 아찔하게 중심을 잡은 채 높이 쌓여져 있다. 7평의 공간은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좁은 통로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책들의 영역이다. 책들이 모두 몇 권인지는 40년 베테랑인 사장도 모른단다. 그래도 신기한 것은 어디에 무슨 책이 있는지는 대부분 알고 있다. 그게 지금까지 살아남은‘영업노하우’란다. 어쨌든 헌책방에는 책이 정말 많다. 그 수도 많지만 종류도 다양하다. 문학서적과 외국서적은 물론이고 대학전공서적부터 중·고등학생 자습서까지 있다. 모든 책이 추천도서지만 전공서적이나 자습서는‘비추’다. 오래 돼서 그런지 대개가 내용이 낯설다. 교육과정한단계 정도는 훌쩍 지난 것들이 대부분이다. 사장이 추천하는서적은사회과학분야의책이다“. 사회과학분야관련내용은예나지금이나 일맥상통”한다고 말하며한권추천해 주셨다. 관심분야가 아니라 결국 사진 않았지만.

  헌책방의 한 달 매출은 보통 얼마나 될까. 그것 또한 아무도 모른다. 뚜렷이 정해진 책 값이 없기 때문이다.‘신간도서는 50% 할인’이라는 나름의 철칙은 있지만 사장의 기분이 가격책정에 더 중요한 요소다. 학생

들에게는 대개 종이 값만 받고 직장인들에게는 냉정한 가격을 받는다. 물론 학생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도 사장의 눈썰미가 기준이 된다. 그렇다면 헌책방에서 가장 오래된 책의 나이는 얼마나 될까. 1925년에 발간된 책이‘정은서점’에서는 최고령이다. 왠지 박물관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책들이지만 가끔씩 구입하는사람들도있단다.

  사장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책방을 쭉 둘러보니, 7평 남짓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구경하는 데 한 시간이나 걸렸다. 한 시간 이나 소요했는데도 절반의 책도 못 본것 같은 찜찜함에 사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더니 묘안을 하나 주었다. 요즘 헌책방은 놀랍게도 인터넷 주문도 된단다. 보고 싶은 헌책이 있으면 인터넷 혹은 전화로 주문하면 된다니, 세상 참 좋아졌다는생각밖에 안든다.

  신림

  다음 찾은 곳은‘정은서점’에 비해 한층 세련된 느낌을 주는‘뿌리와 새싹’이라는 헌책방이다. 전에 들렀던 책방에는 늙수그레한 사장이 있었다면 이곳엔 예쁘장한 외모의 매니저가 있다. 사장이 아니라 매니저라고 부르는 이유는 책방의 운영방식이 다른곳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뿌리와 새싹’은 바로‘아름다운 가게’라는 사회단체에서 운영하는 헌책방이다. 이 곳에 진열된 모든 책들은 시민들에게 기증받은 것이고, 수익금 전액은 좋은 일을 하는 데 쓰인다. 2005년 12월에 문을 연 뒤로 벌써 4년 째 좋은 일을 하고 있다. 또한 서울에만 광화문, 신촌, 강남 등 총 3곳에‘아름다운 가게’의 헌책방이 운영되고 있다. 선의에서 기증해주는 물품은 마다하지 않고 모두 받기 때문에 헌책뿐만이 아니라 DVD나 음반 등도 있다. 더 알차다고 해야 할까. 매장 내부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어 다른 헌책방보다는 볼거리가 많다. 다만 아쉬운 점은 고서적이나 외국서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1년에 한 차례 정도 고서적을 파는 행사를 열어 그때만 팔기 때문이다. 날만 잘 맞춘다면 오래된 서적이나 희귀한 서적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셈이다.

  헌책이나 기타 물품들의 판매가격은 모두 2000~2500원 선이다. 가격도 저렴하고 좋은 일에 쓰인다니 부담 없이 손 가는 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이곳의 큰 장점이다. 반면 단점은 찾아가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도 한번 발품 팔면 꾸준히 찾게 되니 한 번 쯤은 고생하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 또 헌책을 구입하는 즐거움과 더불어, 집에 고이 모셔둔 책들을 하나 둘 꺼내어 기부하는 즐거움도 함께 누릴 수 있다.

  신림동. 고시촌으로 대표되는 이 곳에는 아주 특별한 헌책방이 있다. 고시촌이 몰려 있는 지역답게 서점가는 각종 고시서적들과 수험서들이 즐비하다. 허나 이곳 헌책방은‘인문학’의 보배들만 모여 있다. 우리학교에서 501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우측으로 걸어내려가다 보면 나오는데, 눈여겨 보지 않고 지나가면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문 입구부터가 헌책에서 풍기는 묘한풍취를 전달하는데,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는 책들은 그 종류도 천차만별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와 각종 문제집으로 시작되는 통로는 인문, 사회, 과학, 심지어 풍물까지 말 그대로‘인문학과 사회, 과학’서적들이 주류를 이룬다.

  한눈에 보아도 사람한명이 지나갈 만한 이곳은 2층까지 겸비하고 있다. 사실 2층이라기보다는 다락방에 가까운 이곳에는 주로 과학과 예술관련 원서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이곳 주인아저씨는 매일 아침 9시에 문을 열고 밤10시 반이 다 되어서야 문을 닫는 다고 하니, 책과 함께 하루를 시작해 하루를 마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을 사고 파는 기준이 뭘까? 답은 너무 간단하다. 바로 주인 아저씨 맘! 그래도 나름 다시 팔 수 있는 책을 산다는 원칙과 신책의 경우 정가의 20~30% 값을 받고 산다는 것 빼고는 의문투성이다. 한눈에 봐서는 책을 분류하는 기준이 무엇일까 싶을 정도로 빼곡이 나열된 이곳의 책 분류 기준 역시 왠지 주인아저씨 맘인 것만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꽤 많다. 개정판의 전공서적을 되파는 학생들부터 이름모를 책을 찾는 사람들까지, 사람들의 발길이 은근하게 이어진다.

  헌책방이라고 해서 오래된 책만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 최근 출고된 베스트셀러부터 지난달 패션 잡지까지 있다. 취재차 간 기자 역시 새 것과 다름 없는 책몇 권을 사들고 나올 정도로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말 그대로 돈 번 기분이다.

  이곳에 오는 이들은 헌책방이라는 의미를 떠나서 오랜된 것의 향취가 그리워 오는 사람들이다. 물론 자신에게 필요 없는 서적들을 되판다고 하지만 2000~3000원에 거래되는 책인만큼 그저 남들에게 필요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더 클 지도 모르겠다.

  가을이다. 이제는 돈 없어서 책 못 읽겠다고 하는 핑계는 접어두고 책 한 권을 집어들자. 이 책을 거쳐갔던 사람들의 때묻은 손길과 향취를 느끼며 잠시 일상의 스트레스를 잊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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