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많이 찾아 누리세요. 사회에 나가면 하고 싶어도 못하거든요.”

 “저 이번에 휴학해요.”

 언제부터인가 대학생들 사이에서 휴학은 으레 거쳐야 되는 하나의 통과의례가 돼 버렸다. 다들 어학연수다, 인턴이다, 취업준비다, 각종 이유를 달고 휴학하는 통에 이제는 휴학하지 않는 학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 중에는 단지 미취업자로 전락하는 것이 두려워 조금이나마 졸업을 늦추기 위해 휴학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이런 사회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국어국문학과에 06학번으로 들어와 단 한 번의 쉼 없이 올해로 내리 4년을 채우고 졸업하는, 또 앞으로의 길도 정해져 있는 이햇님(국어국문․10년 졸) 양을 만나보았다.

 이 양은 1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 근로, 요가, 학교수업, 학과 행사 등으로 가득 찬 정말 바쁜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 속에서도 대학생으로서 대학 내에서 누릴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은 다해 보려고 노력했고, 어느 정도 다 해봤다고. 한창 취업을 준비해야 할 시기인 4학년 여름방학 때는 캄보디아로 해외봉사활동을 다녀왔으며, 어떻게 보면 극히 사소해 보이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 스쳐지나갈 수 있는 온갖 술자리, 체육대회, MT, 농촌 봉사활동, 심지어 C.C(CampusCouple)까지 그녀가 겪어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을 목숨을 걸어가며 반드시 모든 자리에 참석했다. 이러한 것들이 동아리 활동이나 다른 외부활동이 없는이 양에게는 인간 관계를 넓힐 수 있는 자리가 돼 많은 도움이 됐다. “인간 관계가 나중에는 다 자신의 자산이 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제가 방송국에 들어온 것도 인간 관계를 잘 맺어놓은 덕인지도 몰라요.”

 그렇다. 그녀는 현재 KBS 1TV에서 방영되는 ‘책 읽는 밤’이라는 프로그램의 막내 방송작가로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원래 국어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국어국문학과로 진학하게 됐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고, 그 길은 역시나 쉽지 않았다.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인 3학년, 이 양 또한 앞으로 뭘 해먹고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됐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방송부에서 작가로 활동했던 전력과 그 시기 선택의 길을 넓혀야겠다는 생각에 선택한 언론홍보학과의 복수전공을 고려해 그녀는 주전공인 ‘국어국문’도 살리고, 복수전공인 ‘언론홍보’도 살릴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을 했단다. 그녀의 무릎을 ‘딱!’하고 치게 만든 것이 바로 ‘방송작가’의 길이다.

 그녀는 방송작가라는 꿈을 확고히 굳힌 뒤 이와 관련된 책, 인터넷 자료, 신문 자료 등 온갖 정보란 정보는 모두 찾아서 읽었다. 심지어는 ‘퀴즈쇼’와 같이 방송작가가 등장인물로 나온 소설책까지 섭렵하는 열의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바로 실행에 옮겨 4학년 1학기부터는 방송아카데미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낮에는 학교공부를, 밤에는 방송아카데미를 병행하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1학년 새내기부터 앞만 보고 달려만 왔으니 중간에 체력이 소진될 수밖에. 그녀도 계속되는 바쁜 일상으로인한 체력 방전에 휴학을 생각하기도 했었단다. “그런데 방송작가는 어릴수록 좋다더라고요. 제가 그 꿈을 꾸고 있었기에 오로지 빨리 졸업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달려온 것 같아요.”

 이 양은 자신이 내세울만한 스펙이 전무하다고 누차 강조했다. 그녀에게는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요구한다는 높은 토익 점수나 한자 자격증도 없으며, 특별히 내세울만한 수상 이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방송아카데미에서 열의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임했던 것을 기억해주시고 추천해주셔서 운이 좋게 된것 같다.”고 전했다. 현재 그녀가 맡고 있는 ‘책 읽는 밤’이라는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3%대 정도 밖에 안 되는 낮은 시청률을 보이지만, 한 회 한 회에 목숨을 걸고 열정을 쏟아붓는 선배 PD, 작가들이 존경스럽다는 그녀다. 화려하게 비춰지는 겉모습과 달리 90% 이상이 비정규직일 정도로 열악한 환경의 방송작가로서의 길. 그럼에도 프로그램 마지막 자신의 이름이 엔딩 크래딧에 올라갈 때, 시청자 분들의 ‘잘 보고 있다’는 격려 및 칭찬의 전화, 출연자 분들의 칭찬 등이 그녀를 버틸 수 있게끔하는 버팀목이라고.

 이 양은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한 가지 당부를 남겼다.

 “대학생 때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많이 찾아 누리세요. 사회에 나가면 하고 싶어도 못하거든요. 또, 안 쉬었으면 좋겠어요. 정말 피곤할 때가 오거든요. 사실 그 때 쉬어도 늦지 않아요. 정할 게 없다면 최선을 다해노세요.”

 

“현재 본인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하다보면 기회가 주어진다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사람의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이혜리(언론홍보․10년 졸) 양과 같은 경우가 특히 더욱 그러하다. “사실 제가 아나운서를 계속 준비하고 있었고, PR은 4학년 때 학과 수업을 통해 약간 관심을 가졌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쪽 길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이번에 ‘PR One’이라는 홍보대행업체에 취업하게 된 그녀의 변이다.

 그녀는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포부를 안고 언론홍보학과에 발을 디뎠다. 남들보다 대학 생활의 시작이 조금 늦어서 였을까. 물론 학업이 버겁고 몸이 힘들 때 잠깐 휴학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은 있지만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다고. 그런 그녀이다 보니 남들은 휴학해서 하는 취업 준비를 학과 공부와 병행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취업 준비에 있어 남다른 면은 없었다.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학과 수업에 충실하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토익 점수 등의 자격요건을 만들어내는 정도가 전부였다. 남들과 비교해 특별하다면 학내 언론고시반에서의 스터디와 언론사 입사 준비, 몇 차례의 공모전 경험이 전부다. 이것이 그녀가 처음에 인터뷰에 응하는것을 망설였던 이유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었다. '아나운서’라는 꿈을 향해 차곡차곡 준비해놨던 것들이 결국 PR이라는 다른 분야로 취업함으로써 무용지물이 되는 듯했다고. 앞서도 말했듯이 사람 일은 어느 순간 어떻게 풀릴지 모른다는 게 정답이다. 그녀의 그런 준비들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아나운서를 준비하면서 들었던 ‘스피치’ 수업은 아주 유용했다. PR분야에서는 PT 발표를 하게 될 기회가 많은데, 그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회를 보고, 스피치 연습을 했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됐단다. 4학년이 돼서야 준비해 나갔던 공모전도 그녀의 취업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삼성전자의 디지털카메라 ‘VLUU’와 관련된 공모전이었다. 현재 다니는 회사가 ‘VLUU’의 전담 PR팀이었던 것. 그녀는 “우연치고는 너무나도 신기한 인연 아니냐”며 웃어보였다.

 “사회에 나와 보니 학교에서 배운 이론도 중요하더라.”며 학생들에게 수업시간에 충실하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사회 초년생일 때는 자신이 무언가를 맡아한다는 개념이기보다는 서포트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실망을 많이 하게 된다고. "일을 할 때 자기가 좋아할 만한 거리가 있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기회를 찾고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현재 본인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보면 기회가 주어진다는 게 맞는 거 같아요.”

 

“나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 것은‘인터넷’”

 대개 어학 특기자의 자격으로 대학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서는 해외 거주 경험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해외 거주 경험 ‘無’, 사교육 경험 ‘無’에 오로지 독학만으로 입학사정관 전형 중 일본어 특기자로서 당당히 우리학교 문을 두드린 학생이 있다.

 김성혜(정보사회․10년 입학) 양의 일본어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국제교류기금에서 시행하는 ‘일본어 능력시험(JLPT)’는 380점을 취득해 1급을 거뜬히 받아냈으며, YBM sisa가 시행하는 ‘JPT’에서는 930점을 기록, 어떤 상황에서도 적절한 대응이 가능할 만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난 수준인 A등급을 받기도 했다.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6개월 이내 혹은 해외 거주 경험이 없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한일협회 전국 중·고등학생 일본어 경시대회’에서 쓰기 13위, 말하기 2위로 종합 6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한국외대 주최로 진행된 ‘제20회 전국 중·고등학생 외국어 경시대회’에서는 일본어 부문 일반고 그룹에서 장려상을 수상하는 영예도 누렸다. 또한,‘故이수현씨 기념 한국 청소년 초빙사업’에 한국 청소년 대표 연수단으로 발탁돼 열흘동안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김 양은 “이렇게 까지 일본어를 좋아하게 되고, 잘 하게 된 데는 세 살 위의 언니의 영향이 크다”고 말한다. 초등학생 때 ‘하나코’라는 일본 영화를 언니와 본 것이 일본어를 접한 첫 경험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어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러나 그 영화를 같이 봤던 언니가 영화 속 일본어 표현 몇 가지를 기억해 일상에서 사용하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고. 그 때부터 일본어에 관심을 갖고 일본 드라마며, 일본 애니메이션을 섭렵했단다. 그것도 그냥 흘려보는 것이 아니라 자막과 음성을 주의 깊게 대조해가면서 말이다. 김 양의 수준급 일본어 실력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녀의 일등공신 일본어 선생님은 다름 아닌 일본어 원서였다.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김 양은 “작품의 원래 분위기와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에 원서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원서로 읽다가 잘 모르는 한자가 나오기라도 하면 그 즉시 단어 노트에 옮겨 적고 나중에 검색해 히라가나 표기를 채워넣었다. 그녀에게 일본 방송과 라디오, 웹 사이트들도 좋은 교재가 됐다. NHK 뉴스를 비롯해 라디오, 노래 등을 들으며 받아적고 다시 번역하는 연습도 많이 했단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원서를 읽다가도 뉴스, 라디오 혹은 노래에서 나왔던 표현이 나오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김 양의 꿈은 일본 문학을 번역하는 ‘오유리 씨’와 같이 작품 자체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는 번역가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소개로만 보면 다들 그녀가 일어일본학과에 지원해 합격한 신입생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정보사회학과 10학번 새내기다. 김 양은 “나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 것은‘인터넷’”이라고 망설임 없이 말할 정도로 어렸을 적부터 인터넷 사회와 가까웠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개인 블로그를 운영해왔으며, 일본 웹사이트를 통해 얻은 많은 자료들이 지금의 일본어 실력 형성에 큰 도움이 됐다. 이러다 보니 인터넷 사회에 대한 관심 또한 일본어 못지 않게 많고, 최근 급증한 인터넷과 관련된 범죄와 자살 사건들이 일어날 때마다 안타까웠다고. “인터넷 사회에 대한 전문 지식을 쌓고, 그와 관련된 전문 서적을 번역하고 싶은 생각에서 일어일본학과가 아닌 정보사회학과에 지원하게 됐다.”고 그 동기를 밝혔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속에서도 남들과 똑같이 수능공부에 매달리기보다 ‘일본어’라는 자신의 특기에 주력하고, ‘교내 신문부’, ‘논술대회 출전’ 등 다른 여러 활동들을 함으로써 이 자리에 당당히 선 그녀. “후회는 없다!”라는 좌우명처럼 본인의 선택에 있어 후회 없는 대학생활을 하고 싶다는 그녀의 작은 바람이 이뤄지길 바라본다.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도착했을 때 어떻게든 이곳에서 살아 남아야 겠다는 일념에 활발한 성격으로 바꿔 미국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가기 시작했죠.”

 독학으로 일본어 특기자가 된 김성혜 양과 달리 박성은(영어영문․10년 입학) 양은 미국으로 3년간 교환학생을 다녀온 유학파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그녀는 중학교 때 선생님과 아버지의 권유로 미국행을 결정했다. ‘성은’이라는 한국 이름과 발음이 비슷하면서, ‘그녀가 옆에 있으면 노래부르는 것처럼 행복해진다’고 해서 붙여진 그녀의 미국 이름은 ‘Song’이다. 그 이름에 맞게 그녀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좀처럼 떠나지 않았으며, 인터뷰 내내 밝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런 박 양도 처음부터 활발한 성격은 아니었다. “저도 한국에 있었을 때는 조용한 성격이었어요.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도착했을 때 어떻게든 이곳에서 살아 남아야 겠다는 일념에 활발한 성격으로 바꿔 미국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가기 시작했죠.”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당시, 박 양 또한 여느 대한민국 고 1 학생의 영어 실력과 다름이 없었다. 읽기와 문법은 어느 정도 기본기가 갖춰져 있던 반면에 회화에 있어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발음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녀가 하는 말을 미국인들이 알아듣지 못했던 것. 그런 그녀에게 집 주인은 노트북과 부모님과의 통화까지 영어로만 사용할 것을 요구해 처음에 많이 힘들었다고.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처방이 영어실력 향상에는 큰 도움이 됐었다.”고 회상한다.

 박 양은 초기에는 영어 실력을 늘리기 위해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 해나갔다. ‘스펀지 밥’과 같은 애니메이션과 동화책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또, 미국 달러에 대한 개념이 바로 서 있지 않아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용 돈을 사서 돈 계산 연습도 열심히 해 돈에 대한 개념을 쌓아나갔다.”며 쑥쓰러운 듯이 웃었다. 미국 친구들과 친해지기 위한 그녀의 고군분투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 친구들 사이의 대화 주제는 보통 영화나 드라마가 주를 이뤘다. 그녀는 그 대화에 끼기 위해 일부러 미국 아이들이 보는 영화와 드라마를 찾아보기도 하고, 그 전날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건넬지 미리 적어놓고 열심히 연습하고 외워가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 앞에 서면 그렇게 연습했건만 새까맣게 잊어버릴 때가 있더라고요.” 3학년 2학기 때 학교에서 ‘미녀와 야수’ 연극에서 보조 역할을 맡은 것을 계기로 연극을 준비하는 동안 매일 3시간씩 선생님·친구들과 함께 연습한 덕에 영어 발음이 크게 향상될 수있었다.

 그녀는 ‘나라’를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펜실베니아 주의 한 공립고등학교에서 캐롤라인 주에 위치한 사립고등학교로 옮겼을 때의 일이다. 박 양이 그 학교로 가기 전에 있었던 한국 학생들이 공부 진도도 따라가지 못했을 뿐 아니라 친구들과도 못 어울렸었단다. 그 학생들의 영향으로 한국 학생들에 대한 편견 아닌 편견이 생겼던 것. 그 편견을 깨고 한국 학생들이 얼마나 멋지고 괜찮은 사람인가를 알리고 싶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다. 미국에서의 그녀의 애국 행위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만해도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박 양은 ‘온순하고 착하며 친절한 한국 아이’로 인식돼 있었다. 그러나 역사 수업시간에 ‘독도’와 ‘동해’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흥분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단다. 또, 그녀가 ‘East sea’로 바꿔놓은 덕에 그 학교에 있던 모든 지도에서 'Japan sea'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그녀는 영어 교사든 아니면 번역가든 앞으로도 영어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전했다. 만약 고 1 때 당시 미국행을 결정하지 않고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 미국에서 겪었던 것처럼 색다른 추억이나 경험이 없었을 것 같다는 그녀. 그런 그녀에게 미국과는 또 다른 환경을 가진 한국에서의 대학생활이 마냥 설레기만 하지 않는다. 두렵기도 하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 또 한 번의 도전이 될 앞으로의 대학생활이 그녀의 꿈을 구체화시키는 데 일조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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