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클라이밍 세계 랭킹 2위 박희용(생활체육·4) 군

 일반인들에게 아직은 생소할지 모르는 아이스클라이밍(ice climbing). 올해 열린 ‘UIAA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 2010’에 출전, 월드 랭킹 2위를 기록하고 한국으로 이제 막 귀국한 박희용(생활체육·4) 군. △체육관 운영자 △‘사람과 산’이라는 산악잡지의 클라이밍 전문기자 △아이스클라이밍 국가대표 △대학생 등 따라다니는 수식어도 참 많은 그를 만나보았다.

 

▲박희용(생활체육·4) 군
 “운동선수로는 조금 뒤늦은 나이에 자의가 아닌 타의로 시작했죠.”

 그가 등반을 처음 시작한 것은 1998년,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다. 외국의 다른 나라들에는 어린 선수들이 많은 것에 비하면, 또 웬만한 다른 운동선수들의 시작 나이를 보면 그는 조금 뒤늦게 시작한 편이다.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당시 음악실이 있던 2층 건물 벽에 인공암벽을 조성해놨고, 써클활동 중 하나로 산악부가 있었다. 그 인공암벽은 마침 매점 옆에 있었고, 매점을 자주 드나드는 만큼 그 곳도 자주 지나치게 됐다고.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같이 다니던 룸메이트와 선배들의 끈질긴 꼬드김에 못 이겨 산악부로 발을 들여놓게 됐다.

 처음에는 취미삼아 ‘한 번해보자.’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회를 나가게 되면서 점점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가 이 세계에 입문한 고등학교 1,2학년 시절에는 같은 시기에 시작한 친구들보다 더 못했다. 친구들은 그와 같이 처음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대회에 나가기도 하고,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을 보니 질투가 났다고. 친구들보다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에 심기일전해서 더욱 열심히 하게 됐단다. 그러니 자연히 실력이 늘고, 대회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두고, 결국에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스포츠클라이밍 청소년 국가대표로 발탁돼 해외로 원정경기를 다녀오기도 했다.


“스포츠클라이밍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때 과감히 아이스클라이밍으로 전환하게 됐어요.”

 원래 그의 주종목은 스포츠클라이밍이었다. 물론 그가 처음으로 등반을 시작한 고등학생 때부터 줄곧 스포츠클라이밍 선수로 활동했으며, 각종 국내대회에서 1등을 휩쓸고, 국가대표로 여러 차례 대회에 나가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스포츠클라이밍에서 실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아이스클라이밍으로 전환했다.

 사실 그는 스포츠클라이밍을 하고 있을 당시에도 아이스클라이밍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빙벽등반에 대해 위험하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아이스클라이밍이 위험하다는 인식에 ‘아이스클라이밍은안해야지.’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그러나 그에게는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산을 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꿈인 히말라야 등반이다. 히말라야 등반을 가기 위해서는 여름에 떠나야 한다. 겨울에는 몹시 춥고, 눈도 많이 와 등반하기에 매우 좋지 않은 기상조건이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등반과 스포츠클라이밍, 둘 다 여름 시즌에 해야 하기 때문에 시기상 맞물리게 된다. 그에게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의 꿈이자 목표인 히말라야 등반이냐, 최고의 기량을 보이고 있는 스포츠클라이밍이냐’라는 기로에 서서 그는 과감히 히말라야 등반을 선택, 겨울에 시즌이 행해지는 아이스클라이밍으로 주종목을 바꾸게 됐다.

 사람이 직접 해보기 전까지는 진실을 알 수 없다고 했던가. 직접 아이스클라이밍에 뛰어들기 전까지는 일반 사람들과 같이 막연히 위험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지금은 위험한 운동이 아니라고, 오히려 안전하다고 항변한다. 아이스클라이밍을 하면서 추락사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극히 소수에 불과하고, 자동차 사고로 사망할 확률보다 더 적은 확률일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자기자신의 경우를 들며 아이스클라이밍을11년 동안 했는데 단 한번도 다쳐본 적이 없다며 그만큼 안전한 운동임을 강조한다. 사고가 나는 경우는 본인이 부주의하거나 안전규칙을 지키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라고.


 “정말 이 사건 이후에는 산을 오르기 싫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또 다시 산을 타고 있더군요.”

 작년 여름이었다. 그가 히말라야 원정 대장으로 앞장 서 함께할 사람들을 모집해 원정 팀을 꾸렸고, 파키스탄 지역의 히말라야 등반을 위해 떠났다. 날을 잘못 잡았는지 한달 동안 그 곳에 체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쏟아지는 눈으로 인해 결국 히말라야 원정은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서로 달래며 철수하려는 데 평소 그와 가깝게 지내던 누나가 그가 등반하려 했던 바로 옆 산에서 추락사고를 당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다. 사고로 추락한 사실만 알고 그 누나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그 당시 상황에서 그는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추락사고가 발생한 산으로 향했다. 사실 가까운 거리임에도 도로 포장이 잘 돼있지 않은 현지의 사정으로 지프차를 빌려 타고 꼬박 이틀을 달려서야 사고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했을 때 이미 그 누나의 사망은 거의 확실시 된 상태였다. 고밀도 망원경으로 봐야 겨우 사람 형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빙하와 눈으로 형성된 절벽에 누나는 추락해있었다. 시신은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곳에 있었으며, 이미 헬기로 시신을 수습하려는 시도를 여러 번 했으나 번번이 실패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그 누나의 어렴풋한 형체를 보면서 왠지 살아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그래서 그 곳 대원들과 함께 그는 직접 등반해 시신 수습 작업을 시도하기로 했다. 혹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본 적이 있는가. 몇 천 미터 위에서 눈덩이와 돌들이 쉴 새 없이 떨어지는 소리와 형상이 마치 적진에서 총알, 폭탄이 떨어지는 그것과 흡사했단다. 그렇게 시신 수습 작업을 펼치러 간 다섯 사람은 모두 다치지 않고 무사히 시신과 함께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그 때가 자신이 등반을 하면서 가장 죽음과 가까웠던 순간이 아니었나 생각하며, 아마도 누나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지켜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그러나 이 사건 이후 그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이 약해졌으며, 온갖 회의감이 밀려와 산에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 ‘산을 그렇게 열심히 탄다 해도 결국은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구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산을 타서 얼마나 잘 될 것인가’ 등의 부정적인 생각에 한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어느순간 그는 또 다시 산을 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솔직히 힘드니까 산에 가는 것 같아요. 등반이 힘들지 않고 쉬웠더라면 안 하지 않았을까요?”

 지금까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뭔가 해보겠다고 열심히 했던 것이 아깝기도 하고, 등반을 하면서 자신감이 생겼던 것을 생각하니 그는 산을 버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산에게는 그가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산만이 가진 매력이 있다. 산에 가면 분명 힘들다. 스스로 넘어야 할 과정들이 산재해있다. 하지만 오르막을 올라야 내리막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오르막을 올라 정상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에는 ‘그냥 이쯤에서 내려갈까’, ‘여기서 잠시 쉬어갈까’ 등의 많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 그 유혹들을 이겨내고 그가 정상에 올랐을 때의 그 희열, 뿌듯함 그리고 기쁨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또한, 산을 타다보면 생각할 수 있는 자신만의 시간도 많아진다는 것도 산이 가진 매력 가운데 하나라고. 긴 시간을 몰입하며 자신의 현 상황과 앞으로 닥쳐올 미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볼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주기에 산을 타는 것이 아닌가하고 그는 생각한다.


“책을 보면서 홀로 훈련법을 연마했죠.”

 그는 이번 ‘UIAA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 2010’의 세 번의 경기 중 한 번을 우승함으로써 처음으로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한국, 더 나아가서는 아시아 선수가 됐다. 개인 종목의 경우, 결승전에 8명이 진출할 수 있는 이 안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선수가 속한 것도 그가 처음이라고.

 그런 그는 고등학생 햇병아리 시절부터 혼자의 힘으로 훈련법을 독파했다. 물론 당시 산악부 담당 선생님이 계셨지만 기술적인 부분을 알려주기보다는 동기부여 측면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그때 당시 책을 보고모르는 부분을 하나씩 스스로 깨우치고 알아가는 과정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단다. 그는 책을 통해 훈련법을 접하고, 시도해보고, 그러한 시도들이 실패도 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왔다. 그러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도 해보고 유럽선수들은 어떻게 하는지 유심히 관찰하기도 했다.

 실패하면 그 원인과 대안을 찾아 메꿔나가고, 배워나가고 또 다시 실패하고… 수없이 반복되는 이러한 과정들이 아마 많은 도움이 됐지 않겠냐는 그다. 그에게는 ‘외국 선수들이 좋은 환경에서 열 번을 훈련한다하면 나는 여기서 스무 번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강한 마음의 힘이 있었다.


“우승 비결은 멀리 있지 않아요. 그저 등반을 그 자체로서 즐긴 것이 바로 저의 우승 비결입니다.”

 그는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라고 말한다. 이번 대회에서 1등을 했을 때도 감기몸살과 폐렴증상으로 이틀밤을 꼬박 샌 상태였다. 컨디션이 바닥인 상태였으나 그는 1위를 차지했다. 그에게 그 이유를 묻자 “아마 심리적 마인드 컨트롤로 인해 그런 좋은 결과가 나지 않았을까요.”라고 말한다. 1등과의 격차가 점점 줄어들면서 그는 빨리 1등을 하고 싶은 마음이 그에 비례해 커져갔고, 더욱 조급해졌다. 몸이 아프고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쥐고 있던 그런 욕심들과 조급함을 놓아버릴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등한 경기에서는 그가 지금까지 하면서 가장 멋있었던, 가장 잘했던 등반을 생각하면서 했다고. 그는 등반 자체를 즐기는 것이 우승의 비결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그동안 자신이 흘린 피와 땀, 쏟아부은 노력과 훈련 등의 결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선수로서 그 자체를 즐긴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라고.

 

 그는 처음 여권을 들고 국제대회를 위해 공항에 갔을 때의 그 설렘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러나 이제는 둔해져 설렘이나 두려움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저 덤덤할 뿐인 자신의 모습이 싫어 항상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그다. 설렘이 두려움보다 커지면서 더 이상 짜릿한 느낌을 맛볼 수 없는 것이 서글프다는 그.

 내년에 한국에서 열릴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에서 당당히 월드 랭킹 1위로 올라서는 그를 상상해본다. 또한, 훗날 후배들이 “저도 박희용처럼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후배들의 롤 모델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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