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19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던 4·19 혁명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한다. 우리학교도 그 혁명의 대열에서 빠지지 않았다.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고, 몸으로 부딪치며 경험한 조창도(법학·55)·윤혜득(경제·57) 동문. 그때 그 시절 혈기 넘치고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 대학생이었던, 또 우리학교의 학생위원회장, 학생위원회 체육부장이었던 그들의 입을 빌려 당시 우리학교의 상황과 분위기를 들어보자.
민주화의 갈망으로 가득했던 50년 전 4월 19일, 우리학교에서는, 우리학교 학생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11년 전부터 시작된 4·19 혁명 움직임의 징조
4·19 혁명이 일어난 1960년 4월로부터 약 1년 전인 1959년 5월초 어느 날이었다. 당시 학생위원장(현재로 말하면 총학생회장)이었던 조 동문에게 당시 김성락 학장(현재로 말하면 총장)은 같이 가볼 곳이 있다며 자신의 지프차에 동승할 것을 권했다. 그렇게 조 동문이 김 학장과 함께 간 곳은 서울 중구 삼각동에 있던 조병옥 박사의 사무실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당시 조 박사의 비서진을 만나 소개받고 인사하게 됐다. 또한 이들로부터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자유당 정부의 독재정권의 음모를 전해들으며, 대학생들이 이러한 음모를 막아 줄 것을 부탁받기도 했다. 이후 전국대학의 대표들과 함께 공명선거학생투쟁위원회를 조직해 공명선거 추진을 위한 활동에 참가하게 됐다.
같은해 11월 3일, 조 동문은 전라도 광주에서 열린‘학생의 날 기념식’에 우리학교 대표로 참석했다. 이곳에서 건국대·경희대·고려대·동국대·동아대·서울대·성균관대·숙명여대·연세대·이화여대·전남대·전북대·제주대·중앙대·한국외대·한양대·홍익대 등 전국 각 대학 학생대표들이 모였고, 자유당 정권의 음모를 우리가 모른 척하면 안 된다는 격론이 서로 오갔다. 이 과정에서 몇몇 학교 대표들간의 논쟁이 몸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결국 고려대와 서울대 학생회장은 2박 3일간의 일정을 다 채우지 않고 하루 전에 먼저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 그는 이 자리가 각 대학 대표들의 시국인식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1960년 3월, 일명 삐라사으로 도망자 신세
1960년 3월 1일, 3·1절 행사가 열린 서울운동장에서는 일명 삐라사건이 벌어졌다. 그 가운데는 조 동문이 있었다. 또한, 그는 나흘 후인 5일에도 12명을 데리고 종로에 나가‘3월 15일 부정선거를 강행하면 100만 학도 궐기한다.’라는 전단을 살포,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데모를 전개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자유당 정부로부터 악질학도로 고발당해 수배자의 신세가 됐다. 당시 본가가 서울이 아니었던 터라 기숙사 생활을 하던 그는 기숙사에도 못 들어가고 친구 집에서 기거하며 숨어다녔단다.
각 대학의 학생위원장들은 3월 하순부터 4월초 서울 시내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는 경찰 수배를 피해다니면서도 각 대학 학생위원장들의 모임이 이뤄졌던 종로의 다방들을 계속적으로 드나들었다. 그리고 그 모임에서 결정된 사항과 행동 지침을 우리학교 학생위원회 간부들에게 전달했다.
3·15 부정선거로 야기된 전 국민들의 분노와 사회적 혼란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에 각 대학 대표들은 4월 19일에 일제히 시위하기로 결정했다.
다같이 총궐기를 하기로 한 날을 기다리고 있던 중 바로 전날 고려대학생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다. 학생회 주최로 신입생 환영회를 하던 것이 데모로 이어진 것이다. 그날 오후 종로며 동대문 등지로 고려대 학생들이 나가 시위를 먼저 시작했고, 동대문 정치 깡패들에 의해 고려대 학생들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사건이 벌어졌다. 이들은 당시 그 사건에 대해“ 고려대의 배신이라는 반응도 있었다.”고 전했다.

운명의 그날,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당시만 하더라도 점심시간에는 이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려 퍼졌단다. 이 사이렌 소리를 신호로 모든 각 대학 학생들이모여 반 정부 시위를 시작하기로 했다.
이날 오전 9시 30분, 당시 사학과 학생회장이었던 김순경 동문이 같은 학과 학생 10여 명을 이끌고 데모하기 위해 먼저 학교를 나섰다. 이후 당시 체육부장이었던 윤 동문도 40여 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뒤이어 학교를 나섰다. 당시 우리학교에는 △영어영문학과 △철학과 △사학과 △법학과 △경제학과 등 5개 학과에, 재학생들이 대략 400여 명이었던 상황에 비췄을 때 이는 재학생 1/10이라는 적지 않은 수가 4·19 혁명에 동참한 것이다. 게다가 재학생의 절반인 200여 명이 기숙하고 있어 우리학교에서 나선 시위대는 대부분 기숙사생들로 구성돼 있었다.
대오를 지어 노량진을 지나 한강다리를 건너는데 지프차를 타고 학교로 오던 김성락 학장과 마주친 윤 동문은 “우리들에게 ‘몸 조심하라’고 거듭 당부했던 학장님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며 당시를 기억했다.
그들은 다시금 대오를 정돈하고 걸었다. 갈월동에 이르니 검은 옷에 총을 들고 학생들의 무리보다 더 많은 수의 경찰들이 대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꿋꿋이 “부정선거 규탄한다. 선거 다시 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질서정연하게 동자동까지 걸었다. 그때 이들의 눈 앞에 벌어진 풍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시내는 아수라장이 돼 있었다. 여러 대의 자동차들이 뒤집혀 있었고, 트럭과 버스에는 학생들 또는 시민들이 올라타 있기도 하고, 도끼를 든 사람, 몽둥이를 든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렇게 윤 동문이 이끄는 대오는 남대문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오후 서너시경 시경 앞에서 총을 발포하기 시작했으며, 세종로 쪽에서 총소리가 계속해서 울려퍼졌다. 곧 대오는 자연히 뿔뿔이 흩어졌고, 윤 동문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남산으로 가서 그곳에서 하룻 밤을 지내고서야 다음날 학교 기숙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날 윤 동문 말고도 많은 수의 학생들이 밤새 기숙사에 들어오지 않아 기숙사 사감과 다른 학생들이 많은 걱정을 했었다고….

조용한 학생으로 기억되는 故김창섭 열사
1960년 4월 19일 오전 9시 30분, 당시 본교 사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故김창섭 열사는 김순경 동문이 이끄는 대열 중 한 명으로 학교를 나섰고, 그날이 본인 생의 마지막 날이 됐다. 한강대교에서 트럭에 올라 광화문 네거리로 진출한 故김 열사는 데모대의 선두에서 정부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던 중 서울역 건너편 현재 남대문 경찰서 근처에서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허리에 관통상을 입고 현장에서 즉사했던 것이다. 또한, 이와 함께 시위를 하기 위해 길을 나섰던 본교 사학과 1학년에 재학중이던지정달 동문도 태극기를 흔들며 당시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를 향하다가 다리에 4발의 총상을 입기도 했다.
이틀 후인 21일 경 현재 연세대 의대인 세브란스 병원에서 기숙사에 연락을 취해왔다. 김창섭의 시신이 병원 지하에 있으니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이들을 포함한 학생위원회 간부들은 세브란스 병원 지하에서 40~50여 구의 시신이 있는 가운데 故김 열사의 시신을 찾아 육군 15사단 계엄군이 내준 앰블란스에 시신을 싣고 학교로 돌아왔다. 김 열사의 장례 절차는 학교장으로 신속하게 전개됐다. 이들은 故김 열사는 학교 교장인 아버지를 두고, 피아노를 잘 치는 얌전하고 조용한 기숙사생이었다고 기억한다. 故김 열사가 사망한 바로 다음날이 기숙사를 현재의 연구동으로 이전하는 날이었다고. 같은 기숙사생이었는데 새로운 기숙사를 함께 못 써본 것이 아직도 못내 아쉽다고 이들은 말한다. 또한, 학생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이고 운동권적인 사람들은 죽지 않고, 故김 열사와 같이 얌전한 사람들만 죽은 것 같아서 슬프다고 전한다.

데모하지 말자는 데모로까지 이어져
4·19 혁명이 성공적으로 끝나고도 데모는 계속 이어졌다. 시내 데모후 서울 시내 각 경찰서는 종합대학에서, 치안본부는 각 단과대학에서 점거하고는 사복차림의 경찰들과 같이 근무하기도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한 후 허정 내각이 들어서자 이는 곧 철수했고, 사회가 혼란스러움에 따라 각 대학 학생들이 앞장서 질서유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윤 동문은 본교 학생들 몇몇과 함께 계엄군에서 내어준 지프차를 타고 3일간 질서유지를 독려하는 방송을 하며 시내를 누비기도 했다.
전국을 뒤흔들었던 50년 전의 4월. 그날의 기억은 우리 숭실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그곳에는 죽기까지 민주화를 열망한 우리들의 선배들이 있었다.
4·19 혁명 50주년을 맞이해 오는 19일(월), 국가 보훈처에서는 추가로 건국포장을 수여할 예정이다. 총 873명을 심사해 그 중 198명에게 수여되는 이번 건국포장 대상자에는 우리학교 △김순경 △윤혜득 △정영환 총 세 명의 동문이 포함돼 있다. 이로써 지금까지 우리학교에서는 총 7명이 건국포장을 수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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