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대시보 속간 초대 주필이자 제2대 편집국장. 본교 서울 재건시 첫 입학생. 김진경(철학·54) 동문은 지난 그의 과거를‘처음’이라는 단어로 장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현재도‘처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였던 중국 땅에‘처음’으로 국제대학인 연변과학기술대학을 세워 총장을 맡았고, 이번에는‘처음’으로 북한 평양 땅에 남북협력대학인 평양과학기술대학을 세워 총장을 맡고 있는 김 동문. 젊은 청춘보다 더 뜨거운 열정을 가진 그를 만나보았다.

                                       

“우리가 역사를 받았는데 이어줘야지 않겠나?”

위는 본교가 1954년 서울에서 재건한 후 첫 입학생이었던 당시 54학번 동갑내기 친구인 이중 전 총장과 김진경 동문이 나눈 말이다. 이는 숭대시보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이중 전 총장과 그는 평양 숭실로부터 역사를 받았고, 그 역사를 후대에 이어나가야 한다는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과 마음이 서로 맞았던 그들은 숭대시보의 구상·기획 단계부터 함께한 동지다. 숭대시보를 만들기로 결정하자 이들은 바로 실행에 옮겼다. 당시 부학장을 맡고 있던 우호익 교수를 숭대시보의 지도교수로, 안병욱 교수를 자문위원으로 삼고 시작했다.
역사를 이어가고자 한 열정이 타올라 숭대시보를 만들고자 했을 때는 본교가 아직 상도동으로 이전하기 전의 일이다. 서울 중구에 위치한 영락교회 부속 건물에 있을 때였다. 당시에는 겸직교수가 많았으며, 심지어 교수실도 모자란 상황에서 학교 신문사라고 해서 따로 마련된 방은 기대할 수 없었다. 영락교회 근처의 다방과 그들이 함께 자취했던 조그마한 방이 그들만의 신문사였다.
그런 그들에게 기사를 작성하는 법에서부터 신문 만드는 법, 신문을 인쇄하는 것까지 도움을 주신 은인과도 같은 분이 계셨다. 그는 경향신문의 김경래 편집국장으로서, 그분에게 신세진 것이 참 많다고 회상한다.

 

숭대시보의 진짜 첫 호의 행방은?

현재 보존되고 있는 숭대시보의 첫 호가 진짜가 아니라면? 그렇다. 숭대시보 제1호가 발행되고, 91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숭대시보의 첫 호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 진짜가 아니다.
이것이 어찌된 일일까. 숭대시보 첫 호 때 필회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편집국장은 이중 전 총장이었고, 주필은 김 동문이었다. 학교에 김기하라는 체육선생이 있었고, 신문지면상에 그를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실은 것이 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결국 첫 호를 다 인쇄하고 배포한 상태에서 다시 회수해야 했고, 체육선생에 대한 비판기사만 유일하게 빠진 후에야 재배포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숭대시보 제1호가 두 번 나왔던 것이다. 또한, 편집국장이었던 이중 전 총장은 편집국장으로서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무기정학의 징계를 받아야 했다. 그로 인해 자연히제2대 편집국장의 자리는 김 동문에게로 넘어왔다.

 


공로상을 받으며 졸업한 최초의 졸업생

그의 아버지 역시 평양 숭실 출신이다. 숭실이 서울에서 재건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다른 학교로 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한걸음에 숭실로 왔다. 그는 학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시절 모든 대학생들에게는 모교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는지도 모른다.
교수들도 학생들을 가족같이 여기고, 학생들도 학교를 자신의 집 같이 여기던 시절이었다. 또한, 교수에 대한 존경, 학교에 대한 애정, 대학생이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던 시절이었다. 교실이 부족하고, 책상이 불편해도 학교에 대한 불평·불만을 아무도 갖지 않았다. 심지어 학교 청소도 학생들의 몫이었다.
영락교회 부속건물에서 상도동으로 숭실 캠퍼스가 이전해올 때였다. 학교를 재건한다는 긍지에 한창 불타올라 학교 건물 터를 닦는 작업에 다같이 한 마음이 돼서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김 동문은 학생임에도 신문을 통해 많은 의견을 내세웠다고 전한다. 베어드홀이 생기기 전까지 학교 본부 건물로 사용됐던 돌로 된 건물을 기억하는가. 혹은 알고 있는가.
원래는 그 건물을 지을 때 시멘트 건물로 지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가 시멘트보다는 돌로 짓는 것이 어떠냐는 아이디어를 내 결국 돌로 된 건물이 들어서게 됐다.
학교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학교에 대해 많은 의견을 내놓았던 그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졸업식 때 학생이라는 신분임에도 공로상을 수여받기에 이르렀다고.


모교와 자신이 이어져 있는 것 = life line

모교와 자신이 이어져 있다는 것은 엄청나게 큰 힘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총장직을 맡고 있는 연변과학기술대학에서는 졸업식 때 모든 학생들은 선서를 한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대략 이렇다. 졸업 후 직장을 가졌을 때 월급의 1/100 이상을 평생동안 모교에 발전기금으로 보낼 것을 서약한다는 것이다. 이는 학교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줬다는, 자신의 인생을 찾아줬다는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연변과학기술대학의 많은 학생들은 자신의 모교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전한다.
그는 한국의 교수들을 단순 월급쟁이라고 비판한다. 한국에는 진정한 은사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교수들이 제자들로부터 “당신 때문에 내가, 내 인생이 변했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길 바란다는 그의 말에서 모든 교수들이 제자들에게 은사로 남길 바라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조건 없는 사랑만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

그는 올해 5월에 개교 예정인 평양과학기술대학 총장이기도 하다‘. 북한을 도울수있는 길이 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다. 경제적으로 도울 수 있을까? No! 그럼, 정치적으로 도울 수 있을까? No! 그가 북한을 도울 수 있는 길은 교육, 바로 그것이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이며, 근본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가 중국 연변에 대학을 세운 것도, 북한에 대학을 세운 것도 모두 같은 이유에서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부강한 조국을 만들기 위해서다. 낚시대를 만드는 기술을 알려주기 위해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또한, 교육이라는 교류를 통해 민족을 화해시키기 위해서다.
그는 말한다. 평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지불하기 마련이라고. 그렇다면 누가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 같냐고 묻는다. 그의 답은 간단하다. 바로 가진 자인 우리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돈도 아니고, 목숨도 아니다. 조건 없는 사랑이다. 사랑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단다.

 

그의 삶에 평생 표어가 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까?” 이 질문을 항상 그 자신에게 던지면서 나오는 답대로 살아간다는 그. 타인을 위해 희생하며 돕다가 그에게 돌아오는 것이 고통일지도 모르며, 고난일지도 모르며, 죽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조건 없는 사랑 속에서 생겨나는 기쁨이 있고, 환희가 있다. 그러한 그의 사랑이 북한과 중국, 전 세계 곳곳에 퍼져나가길 바란다. 그의 뜨거운 열정 또한 영원히 식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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