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3월, 우리학교는 눈에 띄는 변화가 시작됐다. 그 해에만 세 명의 장애학생들이 우리학교에 나란히 입학한 것이다. 당시 장애학생을 신입생으로 받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던 우리나라 대학의 분위기 속에서 이는 이슈가 되기 충분했다. 전희원(영어영문·81) 동문은 그 세 명의 학생 중 하나였다. 현재 미국 뉴욕주 코넬대학 내에 위치한 ‘코넬한인교회’에서 담임목사직을 맡고 있는 그를 만나 당시의 추억담을 들어봤다.

 

‘장애 학생들은 본교 학생으로 받지 않는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 대학 사회의 분위기를 알려주는 중요한 문구다. 일부 기독교 대학과 신학교를 제외한 여러 대학들이 실제로 이러한 문구를 명시해 놓았고, 대학에서 장애학생을 신입생으로 받는 사례가 극히 드물었다. 장애학생을 본교 학생으로 받아주는 것도 될까 말까인데 입학 과정에서 그들에 대한 특혜가 있었을 리 만무하다. 대학의 입장에서는 이전에 한 번도 장애학생을 받아 본 경험이 없었고, 그럴 수 있는 시스템도 아직 마련 돼 있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더욱 부담이 클 수밖에없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우리학교는 기독교를 건학 이념으로 삼은 학교답게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귀하고 평등하다.’는 기독교적 인간관을 가지고 장애학생들을 본교 학생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지금과 같은 특례입학이라든가 특별대우는 없었고, 오로지 실력으로 비장애학생들과 경쟁해야 했다. 누구든 실력이 되면 받아주고, 아니면 마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장애가 있는데도 대학에 가는 사람 = ‘별종’

게다가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장애학생에 대한 특례 입학, 점자지로 된 대학 입시 교재, 시험지 등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전 동문이 9살부터 다녔던 맹학교에서는 영어·수학은 많아야 일 주일에 1시간 수업하는 정도였고, 거의 대부분의 나머지 시간은 침·한방·마사지와 같은 직업 교육을 받는 데 할애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대학에 진학하길 희망하는 학생들은 독학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해야 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탓일까. 장애를 가지고도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대개 별종으로 여겨졌다.


대학의 문을 열기 위한 그만의 세 가지 방법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대학 진학의 길을 포기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이 되니 다시금 그의 마음 속에 대학 진학에 대한 열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 다른 비장애학생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현실을 이내 받아들였다. 뒤늦게 마음을 다잡은 만큼 시간이 부족했다. 그 안에서 최대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시간 확보를 위한 세 가지 방안을 생각하기에 이른다. 첫째, 잠자는 시간 줄이기. 둘째, 빨리 걷기. 셋째, 빨리 먹기. 그 나름대로의 이러한 철칙을 세워놓고는 대입을 준비하는 동안 지켜나갔다. 이제는 당시의 철칙들이 습관화돼 버렸다고. 대학 시절에는 이 습관들로 인해 여학생들에게 많은 핀잔을 받기도했다. 하도 빨리 먹는 게 습관화돼 있다보니 커피를 마실 때도 후루룩 들이키다시피해 멋 없게 먹는다는 게 핀잔의 주된 이유였다.


강사 曰“이거! 이거! 이거!”VS 전 동문 曰“이거? 이거? 이거?”

전 동문의 공부 방식은 극히 전통적이요, 원시적이었다. 그의 교재는 녹음 카세트 테이프였다. 가족이나 그가 다녔던 교회 사람들, 맹학교로 봉사를 온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에게 부탁해 그들이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주면 강의 내용을 듣는 것이 전부였다. 교재도 마땅치 않던 당시, 학원에서 진행되는 강의를 녹음해 들어가며 나름대로 노트에 필기한 것이 곧 그의 교재가 됐다. 대개 강사들은 자신의 강의를 장애학생도 들을 수 있다는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강사들이“이거! 이거!이거!”라고 말하며 분필로 칠판을 두드리고, 해당 단어에 동그라미·별표 등 중요도를 표시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비장애학생들에게는 이상할 것 없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달랐다.

강사들이 강의중“이거! 이거! 이거!”를 연발할 때 만큼 난감할 때가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것을 가리키며 중요하다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까지 들어온 강의 내용이 떠오르며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그의 판단이 정확하지 않았을 때도 많았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대충 때려맞출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시험범위의 앞부분 담당, 너는 뒷부분 담당

대학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 선교 단체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여럿 모여 점역실을 만든 것이다. 점자책을 만들어주는 것이 이 곳의 주역할이었다. 이곳에서 텍스트가 없이는 공부를 할 수 없는 주요 전공서적들을 점자책으로 만들어줘 그것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한번은 전공수업중 ‘English Teaching Methodology’라는 지도법 강의가 있었다. 원서로 강의가 진행됐고, 교재를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만 10~12개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카세트 테이프들이 시험을 코앞에 두고도 그에게 전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결국 시험 이틀 전에 그 녹음 테이프들이 전달됐다. 이틀 만에 이 10~12개의 녹음 테이프를 다 듣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영어영문학과 동기 중에 그와 같은 시각장애를 가진 이대희(영어영문·81)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와 꾀를 냈다. 둘이서 시험범위를 반으로 나눠 서로 맡을 부분을 정해 하루 동안 그 부분을 각자 듣기로 하고, 시험 전날 서로 공부한 것을 나누기로 했던 것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여자친구가 그새 또 바뀌었냐?”

그가 대학생활을 만끽하던 시절, 친구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던 농담이다. 당시 우리학교에는 시각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몇 명 없었다. 그가 원형잔디를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다른 학생들이 신기해 하기도 했고, 그를 아는 학생들은 그에게 “같이 가자.”며 길 안내를 해주기도 했다. 길을 안내해주려면 손을 잡아야 하는데 자꾸만 그 대상자가 바뀌니 이런 농담이 나올 법도 했다.

한번은 이 동문이 씩씩대면서 오는 게 아닌가. 그가 이 동문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연유는 이러했다. 등교할 때였다. 이 동문이 현재 중문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올라오고 있는데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단다. 당시에도 인도는 비좁았고, 바로 옆은 차도였다. 그래서 어떻게 지나갈까 생각하던 이 동문은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러 올라가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걸어갔는데 그 순간 뚜껑이 열려 있던 맨홀 속으로 빠져버린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비단 이 동문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많았다. 8살의 나이에 시력을 잃고, 길을 다니다가 여기저기에 부딪히기도 하고, 어디에 빠진 적도 많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러한 일들이 마음의 상처로 다가오지 않았다고.


그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그곳에 평화가 있다는 것

그가 81학번으로 우리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할 당시만 하더라도 신학을 공부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영어영문학과를 선택하게 된 것도 단지 영문학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학구열 때문이었다. 문학을 공부하던 선배들과 동기들이 대개 직장을 다닌 상황에서, 그는 과감히 신학을 선택했다.

그의 진로를 바꾸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그는 대학생 1학년 때 한국 교계의 거부인 대천덕 신부를 만나뵙겠다며 무작정 혼자 청량리에 가서 강원도행 열차를 올라탔다. 대천덕 신부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한 위치도 모르고, 단지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강원도 산골짜기에 있는 ‘예수원’에 그신부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결국 그는 ‘예수원’에서 대천덕 신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예수원’은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곳으로, 환경이 참으로 열악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대천덕 신부 한 분이 그곳에 있음으로 평화가 그 안에 깃들어 있음을 본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단다. 물론 그 안에 평화가 깃들어 있다고 해서 그 어떠한 문제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는 그 깨달음을 통해 자신도 이러한 삶을 살아야 겠다고 결심하게 됐고, 신학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그래도 길은 있더라.”

그는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그저 교수할 생각만 했었지, 정작 목회자로서의 길은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목회라는 것이 단순히 설교만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 교인이 오면 주의깊게 봤다가 먼저 찾아가 인사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교인들의 표정을 살펴가며 안부를 물어보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시각장애를 가진 그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길은 있더라.”고 말하는 그다. 굳이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지 않고, 그 사람의 목소리만 듣고서도 현재 그 사람이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확실히 구분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확실히 해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적임자를 찾아 맡기면 됐다. 그렇게 그는 1995년, 코넬 한인교회의 담임목사로 들어가 현재까지 15년간 한 곳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그는 장애학생들을 향해 말한다. 사회는 녹록지 않다고. 사회에 나가면 학교에서처럼 학생들을 보호해주고 지켜줄 방어막은 사라진다고. 그때가 되면 자신들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대가들이 많이 생기게 될 것이라고. 그러면서 그는 또한 말한다. 지금부터 그런 것들에 의연해지는 법을 배워야 하며, 가급적 비장애학생들과의 경쟁에서 치러야 할 대가는 치르는 것이 오히려 장애학생들에게는 배려요, 하나의 훈련이라고 말이다.

또한 그는 모든 학생들에게도 조언을 잊지 않았다. “젊은 시기인 그때깊이 사색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발랄하게 놀아라. 돌이켜 봤을 때 후회함이 없도록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은 그날 그날의 삶에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복이요, 낭만이다.”

‘나에게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는가’하는 이용가치적 측면이 아닌 ‘내가 얼마나 도와줄 수 있는가’하는 관점에서 인간관계를 맺어나가라는 그다. 그의 삶을 통해 진정한 사랑이 나타나고, 그의 존재만으로도 그가 있는 모든 곳에 평화가 깃들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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