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해외봉사팀이 또 있을까. 이토록 산전수전 다 겪은 해외봉사팀이 또 있을까. 이토록 도전정신이 투철한 해외봉사팀이 또 있을까. 본교는 이번 여름방학 때 총 8팀의 해외봉사팀을 선발, 파견했다. 이 팀들 중 이번에 처음으로 실시된‘재능나눔 해외봉사단’에 해당되는 말들이다. 정치외교학과 이정철 교수를 단장으로 해 14명의 정치외교학과 학생들이 방글라데시로 역사적인 첫 번째 ‘재능나눔 해외봉사단’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이 어떤 색다른 경험을 하고 돌아왔는지 들어보자.

 

이번부터 ‘재능나눔 해외봉사단’이 새로 생겼으며, 그 첫 번째 팀으로서 해외봉사를 다녀왔다. 간략하게 어떤 봉사단인지에 대해 설명해달라.

‘재능나눔 해외봉사단’은 말그대로 자신의 재능을 봉사에 활용하는 것으로, 학과의 특성을 살려, 같은 학과 학생들로 구성된 봉사단이다. 이 봉사단은 다른 해외봉사단과는 달리 팀원 구성부터 단장으로 세울 학과 교수 섭외, 해외봉사지 섭외, 일정 계획, 봉사활동 프로그램 계획, 해외봉사지에서의 봉사활동 등 그 모든 것이 학생들의 자율 속에서 돌아가게 된다. 한마디로 하얀 도화지에 하나씩 그림을 그려나가 결국에는 하나의 그림을 완성시키는봉사활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정치외교학과와 방글라데시, 뭔가 공통분모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방글라데시를 택한 이유라. 인도로 장기봉사를 다녀온 팀원이 방글라데시에서도 사용하는 벵갈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그리고 방글라데시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황에 있으며, 그 나라의 문화일수도 있겠지만 조혼 문제도 심각해 조혼 방지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전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방글라데시 출신이라는 상황도 우리 학과 특성과 잘 부합한다고 봤다.


한국에서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계획 준비하면서도 어려움이 많았겠다.

가기 전이 제일 어려웠던 것 같다. 눈 앞이 캄캄한 상황이었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가늠할 수 없어 여러 가지 대안책들을 생각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조금이라도 현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방글라데시 대사관, 굿네이버스 등 연락을 안 해본 곳이 없었다. 무작정 전화를 해서 “우리가 이번에 방글라데시로 해외봉사를 가는데 그곳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굿네이버스에서 마침 방글라데시로 장기 봉사를 다녀온 사람이 있다며 소개시켜주는 게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띠뚜’와도 연이 닿아 그에게 벵갈어를 직접 배우기도 했다.


현지에서 어떤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진행했나.

다른 봉사단과 같이 크게 노력봉사와 교육봉사로 나눠 진행했다. 여학생들은 책·걸상 수리 및 꾸미기를, 남학생들은 양계장 건축과 학교 건물 신축을 했다. 비가 많이 오고 습하며 마을 곳곳에 웅덩이가 많이 고여 있어 모기가 살기 좋은 현지 환경으로 인해 방역 작업도 해줬다. 교육봉사의 경우는 다같이 진행했다. 주요 내용으로는 잠망경·물로켓 등의 과학교육, 유명한조혼 방지교육, 위생교육 등을 준비해갔다.

첫 날에는 한국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마지막 날에는 우리가 그곳에서 배운 것들을 나누기 위해, 총 두 번의 문화공연을 가졌다. 닭볶음탕·볶음밥·맛탕 등 한국음식도 직접 아궁이에 불 지펴가며, 눈물을 흘려가며 만들어 대접했다. 또한 열대과일 생산국임에도 불구하고, 비싼 가격에 잘 먹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는 열대과일도 함께 대접했다. 마을 사람들이 정말 좋아하더라.


현지상황을 몰랐던만큼 도착 후 프로그램을 변경하기도 했을 것 같다.

우리가 방학 동안 계획했던 봉사 프로그램이 실현 가능한지의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원래 출국 일정보다 3일 앞서 3명의 남학생으로 구성된 선발대를 보냈다. 원래 벽화작업을 통해 현지 학교 건물을 꾸며주는 것을 계획했었는데 선발대가 현지에 도착해보니 학교가 무너져 내릴 만큼 허름한 모습이었다. 그 상태의 건물에 도저히 꾸밀 수도 없을 뿐더러 차라리 새로 지어주는 게 낫겠다 싶어 회의를 통해 학교 건물 신축으로 프로그램을 변경하기도 했다.


현지 사정이 많이 열악했겠다.

임시거처를 마련한 게스트하우스가 우리들의 숙소였다. 게스트하우스라고 해봐야 교회 창고를 정리해서 이층 침대를 가져다 놓은 것이 다였다. 본래사람이 살던곳이아니었으니사정은 열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곳은 전기가 하루에 4시간만 들어오는데 그마저도 언제 들어올지 아무도 모른다. 저녁을 먹을 때마다 전기가 나가 촛불을 켜놓고 먹어야 했으며, 씻을 때도 랜턴에 의지해야 했다. 전기가 들어올 때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돈노밧!(감사합니다)”를 외치며, Fan이 돌아가는 곳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또 언제 전기가 들어왔다가 언제 끊길지 모르니 막연한 기대감 속에서 “30분 후면 들어올 거야.”, “1시간은 버텨줄 거야.”를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한 번은 화장실에서 “꺅-”하는 여학생들의 앙칼진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씻으러 들어간 터라 차마 들어가진 못하고 무슨 일이 있는건 아닌가 걱정하면서 있었는데 비명소리의 원인은 다름아닌 손가락 만한크기의 바퀴벌레였다. 샤워가 끝날 때까지 연신 질러대는 여학생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봉사활동을 진행하면서 어떠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

하나하나가 다 기억에 남는다. 양계장을 지을 때 길이와 폭·높이 등을 일일이 다 재고, 필요한 재료들을 현지 시장에서 직접 사오고, 흙을 퍼나르고, 나무를 자르는 등 제작과정의 100%를 팀 내에서 모두 소화해냈다. 물론 현지인들이 도와주긴 했지만 말이다. 다 지어진 양계장 안에 닭을 손수 사서 넣어줬을 때의그기분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또한 학교를 짓기 위해 벽돌을 날라야 했는데, 교수님부터 우리 팀원들, 학교 아이들, 동네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한 줄로 길게 서서 벽돌을 전달하며 날랐다. 그때 하나씩 전달되는 벽돌과 함께 서로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없었나.

왜 없겠나. 말할 수 없이 많았다. 더운 날씨 속에서 몸을 쓰다보니 하루에 2L짜리 물12통씩은 거뜬히 먹어치웠다. 결국에는 마을 주변 가게의 생수가 우리로 인해 다 떨어지는 사태가 발생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가게까지 가서 사와야 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그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돌아왔다는 뿌듯함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인기스타였다. 수도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마을이다보니 그 지역에 봉사단체가 온 적이 없었으며, 혹 있더라도 하루 머물렀다 간 정도란다. 2주 정도 머문 우리는 그 마을에선 제일 오랜 기간 있었던 봉사팀이요, 외국인이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가 신기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매일 아침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보기 위해 교회로 몰려들어 밖에서 우리들이 지어간 벵갈어 이름을 불러댔다. 우리 주위로 사람들을 수십명 모이게 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우리가 가게에 뭐하나 사러 가거나 길가에 잠시 서있거나 마을 사람에게 벵갈어로 인사해주기만 하면 그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다른 문화권이다보니 우리나라와는 의미가 다른 제스처도 있겠고, 말실수도 간혹 했을 것 같다. 실수담을 들려달라.

우리를 열심히 도와줬던 ‘제이콥’이라는 현지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은 곱슬머리로, 파마한 것 같이 고불거렸다. 우리 팀원들 내에서 그 청년은 ‘빠글이’로 통했다. 우리는 장난삼아 “빠글아 빠글아~”하면서 불러댔다. 그러나 곧 그것이 벵갈어로 욕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경악했으며, 어찌나 미안했는지모른다.

이런 실수도 있었다. 그곳에서는 우리와 다르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는 것이 좋지 않은 표현이며, 브이자 표시가 좋다는 표현이다. 게다가 발을 밟는 것을 굉장한 실례라고 생각한다. 현지 철물점에 물건을 사러 갔을 때였다. 그 직원의 발을 모르고 밟고는 얼른 “주키토(죄송하다)”라고 말하고 웃으며 무의식중에 엄지 손가락을 올렸다. 그때 현지인은 참 난감해하더라. 외국인이라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주는 듯한 표정이랄까.


어떠한 일을 하든 항상 아쉬움은 남는 법이다. 어떤 게 가장 아쉬운가.

아이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아이들이 매일같이 우리보고 같이 축구를 하자고 했다. 그럴 때마다 “조금만있다가 하자. 이것만 하고 하자.”라고 미루다 결국 못 해줘서 정말 미안했다. 학교건물이 완성된 것을 보고오지 못해 그것 또한 아쉬웠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헤어진 것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재능나눔 해외봉사단’에 도전할 다음 기수에게 조언 하나만 해달라.

우선 욕심을 버려야 한다.그말은 현실 가능성 있는 계획과 목표를 세우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해외봉사를 신청하기 전에, 혹은 떠나기 전이라도 봉사가 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재능나눔 해외봉사단’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봉사였고, 무모한 도전 그자체였다. 분명힘들겠지만 부딪치고즐겨라.


그들에게는 문화탐방도 봉사활동 준비기간이나 현지에서의 봉사 기간에 버금갈 정도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시위대를 맞닥뜨려 길이 아닌 곳으로 빠져나가질 않나, 길을 잃어버려 예정에도 없던 동물원을 둘러보질 않나, 출국을 위해 공항으로 가는 길에 뺑소니를 당해 새벽 1~2시에 때 아닌 추격전을 벌여 범인을 검거하지 않나.(다행히 교통사고로 다친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이 모든 경험들이 그들에게는 자산이자 추억이 될 것이다.

팀원들이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뭔가를 새기고, 남기고 싶은 마음이 커서였을까. 자신의 이름이나 아이들의 이름을 헤나로 새겼던 것처럼 마음 속 깊이 그곳에서의 기억을 새기고 지속적인 ‘봉사’로 이어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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