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금)에 열린 본교 학위수여식에서 누구보다 더 언론의 집중을 받은 이가 있다. 그는 바로 국내 최초 청각 장애인 박사 오영준 씨다. 오 씨는 본교 대학원 미디어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장애인을 위한 다중 카메라기반 ・지능형 공간'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장애를 극복하고 박사가 되기까지 그의 이야기, 이제부터 들어보자.

조용한 인터뷰
 어떤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필담으로 진행된 인터뷰였기 때문이다. 한 시간 반 동안 노트북 타자 소리와 펜 소리만이 들려왔다. 음료수를 마시거나 쉴 틈도 없이 인터뷰에 집중해 글씨를 써 내려가는 그의 모습을 보니, 집중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박사학위까지 받은 그이기에 마냥 길러진 집중력 같지는 않아 보였다.

 

열병이 앗아간 청력
 선천적 청각 장애는 아니었다. 그가 청력을 잃었던 때는 불과 1살. 당시 갓난아기였던 그에게 원인 불명의 열병이 찾아왔다. 이후 그는 완전히 청력을 상실했다. 부모님은 아직도 그때를 회상하면서 가슴 아파하신다고. “특히 아버지께서 아들과 의사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을까 염려하셨어요. 제 장애로 부자관계가 삐걱대진 않을까 하고요. 그때 아버지의 걱정과 달리, 지금 저와 아버진 아주 사이좋은 부자랍니다(웃음).”

 

책을 펴게 한 지적 호기심
 “사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청각 장애를 갖고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아요.” 오직 시각 정보에만 의존해 공부하다 보니 겪는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공부하는 습관을 들일 수 있었던 것은 호기심과 끈기 덕이었다.


 처음 그가 공부에 호기심을 갖게 된 건 형과 누나의 교재 때문이었다. 그는 공부하는 형, 누나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공부를 하고 싶다고 느꼈다. 결국 그는 형, 누나의 서랍에서 교재를 꺼내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나이 8살이었다. 그가 그림책을 넘어 글자 가득한 책을 읽게 된 것도 그로부터 1년 후였다.


 청각 장애인을 위한 서울농학교에 다녔던 시절에는 매일 도서관에 남아 공부를 하고 밤 늦게 집에 들어가곤 했단다. 그 누구도 시킨 일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한 일이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었을까. “그냥 공부라면 모든 게 재밌었어요. 주로 수학, 과학 서적을 읽었던 듯해요.”가 그의 대답이다.

 

남들은 생각지도 못한 박사의 꿈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대학교 진학을 결정했다. “요즘에는 청각장애 학생들도 일반 학생들처럼 대학 진학을 많이 결정하지만, 제가 고등학생 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많은 선배들이 공장 취직을 결정했고, 소수의 선배들만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죠.”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가져온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그는 대학을 가야만 했다. 그의 꿈은 다름 아닌 박사였다.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 친누나가 ‘넌 나중에 컴퓨터 박사가 되어 돈 많이 벌어라.’라고 말했던 게 시작이었다. 박사라는 단어를 그때 처음 알게 된 그는 이후 흰 가운을 입은 박사가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고. 그래서 그는 성공회대 정보통신학과에 진학했다. 당시에 그와 같은 청각 장애인이 우리나라 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드물었지만, 박사를 꿈꿨던 청각 장애인은 더더욱 없었다.

 

듣지 않고 공부한다는 것 
 서울농학교에서는 청각 장애 학생들과 그를 도와주는 선생님이 있었지만 대학교의 상황은 달랐다. 일반 학교에, 비장애인들 틈에 끼어 강의를 듣자니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교수가 말하는 내용을 전혀 듣지 못했기에 간간히 교수가 판서한 내용이나 교재를 통해 공부했다. 또 동료 학생들에게 강의에 대해 묻기도 하고, 강의가 끝난 후에는 동료 학생의 강의 노트를 복사해 공부했다. 동료 학생들보다 배로 노력해야만 그 강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위해 본교에서 공부하는 동안은 교수들의 배려로 연구실 후배들이 노트북으로 강의 내용을 대필해 줬다. “우리나라 대학들도 미국이나 유럽처럼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화 통역이나 노트 대필 서비스 등의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저와 같은 청각 장애인 박사들이 많이 탄생하지 않겠어요?”

 

박사의 꿈을 이뤄 준 ‘긍정’
 그는 인터뷰를 하는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다. 웃는 그의 모습에서 느껴지듯 그는 매사에 긍정적이었다. 때문에 한 번도 자신의 장애를 불행히 여기지 않았다고. “물론 장애가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많죠.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지도 못하고, TV나 전화기 등 소리를 통한 정보들을 얻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제 장애를 원망해 본 적은 없어요.”


 그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기자의 질문에 곧잘 답하다가 다음 질문에서 막혔다. “여태까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인가요?” 다른 질문에는 펜으로 주저 없이 답을 적어가던 그가 처음으로 고민에 빠졌다. 고민 끝에 적은 그의 답은 “없다.”였다. “힘들었던 시간은 없었어요. 다만 사람들이 청각 장애인에 대해 편견을 갖고 바라볼 때면 상처를 입었지요.” 그에겐 청각 장애인이 능력이 부족하거나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사람들의 편견이 가장 싫었다.


 청각 장애인인 박사가 한 명도 없는 우리나라에서 한 번쯤은 좌절을 하며 포기를 생각해 봤을 터. 그러나 그는 박사의 꿈도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해 왔다. 가족들이나 주변에서 언제나 그의 꿈을 격려해 줬고, 그도 자신을 믿었다. 긍정의 힘이었을까. 그는 정말 꿈에 그리던 박사가 됐다. 그것도 우리나라 최초의 청각 장애인 박사라는 이름으로.

 

경험을 자료로 한 박사논문
 그는 인생에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 중 하나로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던 때’를 꼽았다. 그에게 박사학위를 안겨 준 논문은 그와 같은 장애인들에게 더욱 편리한 실내 환경을 제공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자신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장애인의 불편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장애인들이 좀 더 편하게 실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많은 장애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이동, 신체 동작, 의사소통 문제로 생활 도우미 서비스를 받는다. 또 이 점은 장애인들에게 큰 경제적 부담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 사실들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그가 고안해 낸 것이 ‘장애인을 위한 다중 카메라기반 지능형 공간’이다. 그는 인간-컴퓨터 상호작용 기술(HCI)을 활용해 실내 환경의 장애 요인을 제거하고, 장애인의 실내 활동을 지원하고자 했다. 지난 4년간 카이스트 연구소에서 장애인을 위한 주거형 스마트 공간 연구 프로젝트를 했던 경험 역시 그의 논문이 탄생하는 데 도움을 줬다. 이어 그는 연구실 교수와 후배들에게도 논문을 쓰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연구실 교수님과 후배들에게 고맙고 또 고맙다고 얘기해 주고 싶어요.”

 

“장애인들의 불편함, 마음의 소리로 들을 것”
 앞으로 그는 삼성전자 DMC연구소에 책임 연구원으로 입사하여 삼성전자가 내준 프로젝트 과제를 수행할 계획이다. 박사가 되겠다는 꿈은 이뤄졌지만, 그에겐 다시 구체적인 꿈이 생겼다.
그는 장애인들의 불편함을 소리가 아닌 마음으로 듣고자 한다. 그가 농아청년회 등 여러 장애인 모임에 자주 가는 이유 역시 그러하다.

 

청각 장애 학생들에게
 “원하는 꿈이 있다면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장애를 원망하지 말고 나는 해낼 수 있다는 믿음과 끈기로 목표를 성취하시길 바랍니다. 저를 보면서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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