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와 사랑》을 읽고 나서

 

 헤르만 헤세는 다양하고 유명한 작품을 많이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처음으로 접한 헤세의 《지와 사랑》은 흥미로운 주인공들을 통해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냉철하며 통찰력 있고 이성적인 나르치스와 격정적이고 예민하며 섬세한 골트문트가 서로를 만나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공고한 유대를 쌓은 것이 인상적이다. 매우 다른 성향을 지녔으면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자극을 주며,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인식시켜 주는 둘의 모습을 보며 서로의 만남이 그들의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골트문트는 감성이 뛰어난 예술가지만 나르치스의 도움으로 자신의 본성을 자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의 감성적 본성이 너무나 강렬했던 나머지, 그는 여러 곳을 홀로 방랑하며 세속의 욕정과 쾌락에 몸을 맡겨 삶의 환희와 고통 등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맛본다. 그러나 골트문트는 나르치스의 곁을 떠나 있음에도 그에 대한 동경과 우애를 늘 간직하였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나르치스와 진정한 교감을 이루고, 자신의 예술의 완성을 느끼며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골트문트가 나르치스의 곁으로 돌아온 이유는 진정한 예술이란 성스러운 마음과 마음의 조화로써 구현됨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헤세는 이 책을 통해 이성, 즉 지를 상징하는 나르치스와 감성·사랑을 상징하는 골트문트를 통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인간의 영혼 속에 깃들인 정신적인 측면과 육체적인 측면을 어떻게 조화시키고 합일시킬 것인가를 시사하고 있다. 상반된 두 가지의 성향이 사실은 인간의 내면에 항상 공존하고 있다. 그 극단적인 양면성 속에서 인간은 양극의 어느 한쪽에만 위치할 수 없음에 고뇌하고 절망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한때의 골트문트처럼 오직 애욕을 추구하고 잠시의 쾌락에 자신을 바치는 것이 사회 풍조가 돼 버렸으며,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의 자신의 삶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가치를 찾아 그것을 어떻게 자신의 내면에서 조화롭게 실현시켜 나갈 것인가가 우리 앞에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황유민(평생교육·3)

 

황유민 양의 《지와 사랑》에 대한 멘토평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1930)의 원래 제목는 《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이다. 《지와 사랑》은 한국어로 번역할 때 이 작품의 등장인물인 신학자 나르치스와 조각가 골트문트의 성향을 은유적으로 상징한 것이다. 그런데 분량이나 비중을볼때, 이 작품의 주인공은 확실히 골트문트이다. 전체 스무장 중 처음과 마지막 5장에만 나르치스가 등장하고, 나머지는 골트문트가 수도원 학교를 떠나 혼자 방황하고 쾌락에 탐닉하며 위태롭게 살아가는 과정이다. 애초에 《골트문트 또는 죄의 예찬》이라는 제목을 고려했다는 점에서도이 작품의 주인공을 가늠할 수 있다. 지적이고 이상적인 나르치스가 조연이고, 현실적 쾌락에 젖어 고통 받는 골트문트가 주연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게다가 헤세는 골트문트의 방탕과 타락을 비난하는 대신 위대한 작품을 남기고 나르치스의 품에서 평화롭게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어 골트문트를 예찬하고 있다.

 황유민 양의 독후감은 나르치스와 골트문트의 서로 상이한 성향의 조화를 통해 저자 헤르만 헤세가 전하는 메시지를 잘 정리하고 있다. 냉철하며 통찰력 있는 나르치스와, 격정적이며 섬세한 골트문트의 운명적 만남이 두 인격의 만남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한인간 내면의 조화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 나아가 상이한 요소가 서로 조화를 이룰 때 하나의 예술과도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헤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황유민 양 스스로 내면의 상이한 요소들을 어떻게 잘 조화시킬 것인가 질문하며 마무리하고 있다.

 우리 내면은 늘 극단적인 두 갈림의 투쟁이다. 현실적 이익과 도덕적 가치, 동물적 충동과 영적인 이상 사이를 오가며 번민한다. 지금까지의 도덕 법칙이나 종교 율법은 이 중 하나만을 따르라고 지도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칫 자기 부정과 우울을 야기한다. 헤세 자신이 어린 시절 수도원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이후로 줄곧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것도그때문일지 모르겠다. 우리 내면의 갈등을 부정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을 긍정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 이상을 실현하고 신적인 합일에 이르는 유일한 길일 수 있다.

박연숙(베어드학부대학 교수)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