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미군기지 공사 현장을 다녀오다

 

최근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사업을 둘러싼 논란이 화두다. 그런데 이 문제가 왜인지 익숙하다. 기지 건설로 인한 정부와 주민들의 끊임없는 싸움. 평택 미군기지 이전 사업이 떠오른다. 2004년 12월, 용산 미군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하기 위한 비준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 2007년 11월 중순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에서 착공식과 함께 공사가 시작됐다. 현재에도 기지는 건설중에 있다. 공사현장과 대추리 주민들의 삶을 돌아보고자 평택을 찾아갔다.

편집자

 

 

△미군기지 건설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주민들이 이곳 이주마을에 옮겨와 살고 있다. 

 

 

집은 있는데, 주소가 없는 곳
노와리에 있는 대추리 이주단지. 대추리에서 6〜7km 떨어진 곳이다. 내비게이션이 불통이다. 이곳 주민들에게 집은 있지만 주소는 없다. 대추리 주민들은 이곳 이주단지로 오면서 정부와 협상을 했다. 이곳을 대추리로 만들겠다고. 그런데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들에게는 주소가없다.


이주단지로 들어가야 하는데 길을 아는 사람이 없다. 택시를 타고 헤매다 겨우 찾았다. 도착한 이주단지에는 마지막까지 기지 건설 투쟁을 한 100여 명의 주민들이 43가구에서 살고 있다. 주황색의 아기자기한 집들이 줄지어 있다. 마치 동화 속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주변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정말 아무런 기척이 없다.

갑자기 70대 정도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경계하며 집밖으로 나왔다“. 송아리에서 3년 살고, 여기서 2년째 살고 있어. 이곳 넓고 괜찮아 다 좋아. 그때 일은 잊고 살고 있어, 그런 난리가 어디 있겠어. 이따 저녁에 작은 아들이 일 끝나고 장 봐올 거야.”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리 둘러봐도 슈퍼마켓은 없었다“. 예전에 대추리에서 살 때에는 슈퍼마켓이 3개나 있었어. 근데 이곳에는 딱 집 짓고 살 땅밖에 없어. 슈퍼마켓이 어디 있겠어.”

 


강정은 대추리의 연장선인가?
제주도 강정마을에 있는 시민단체와 대부분 사람은 미군기지 이전 논란 당시 대추리를 방문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기지 건설 사업에 대한 주민들의 반대’라는 측면에서 비슷하게 본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대추리와 강정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주민들에게 별다른 설명 없이 사업이 일방적으로 진행된 점은 똑같다. 주민 설명회날, 대추리 주민들은 그곳에 초대되지 않은 불청객이었다. 그들은 주민 설명회가 있는지 몰랐다. 주민들을 제외한 평택시의 공무원들, 경찰들, 그리고 노인회에서 동원된 사람들만이 대추리의 주민이었다. 평택대학교 강당에서 열렸던 설명회 도중 대추리 주민들이 들어가서 반대를 했다. 하지만 이후 미군기지 건설을 위한 주민들과의 협상은 끝났고, 사업은 시작됐다. 설명회가 끝났으니, 주민과의 타협도 끝난 것이란다. 강정도 마찬가지로 소수에게만 의견을 물어보고 주민 설명회를 마쳤다. 그리고 주민들의 의견은 이것으로 수렴됐다.


대추리와 강정마을 사건은 근본이 다르다. 대추리는 마을 전체 주민들이 다 떠나야만 했다. 미군기지가 주민들의 집을 포함해서 건설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강정마을 주민들은 그곳에 계속 산다. 해군기지가 밭의 일부, 그리고 해안가와 바닷가쪽에 지어지기 때문이다.


대추리의 주민들은 원래 140가구 정도 됐다. 그런데 지금은 마지막 투쟁까지 함께한 43가구만 남아 이곳 이주단지에서 살고 있다. 3분의 2 이상은 마지막까지 함께하지 않은 것이다. 대추리 신종원 이장은“옛날 분들 만나면 수십 년 동안 한 마을에 살았으니깐‘, 아이고 반갑습니다.’라고 하지요. 하지만 내면에는 반갑지만은 않아요. 나를, 그리고 끝까지 투쟁한 우리를 배신하고 나간 거잖아요.”서로 이전 일을 잊고 살자고 했지만, 그의 내면에는 아직도 응어리가 남아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한편, 평택 평화센터 강성원 소장은“제주도가 거리가 멀어 사람들이 자주 오가지는 못하지만, 대추리 때보다 강정마을 때가 참여하는 폭과 깊이가 더넓어졌죠.”라고 했다“. 방식이 한층더다양해졌어요. 가장큰이점은 SNS에 있는것같아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실시간으로 상황이 전파가 되요. 직접 현장에 오지 않아도 소식을 빠르게 전할 수 있는 거죠. 제가 보기에 진보한 측면도 있다고 생각해요. 발전된 형태의 운동 모습들이 확인된 것 같아요.”

 


“강정에는 해 뜰 날이 없었어요.”
신 이장은 강정마을 기지 건설 초창기때, 대추리의 경험담을 얘기해 달라는 부탁으로 강연회에 갔다.“ 그 당시에 강정마을 주민들에게 해줄 말이 없었어요. 주민들이 보상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에 너무 많이 치우쳐 있었어요. 공신력이 있다는 정부 관계자들 말을 믿으며, 그쪽으로 다 너무 움직여져 있어서 그런 사업에 찬성을 많이 하더라는 거죠. 그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그사람들을 되돌릴 수 있는 시기는 늦은 거예요.”“자본주의 국가에서 돈이라는 것에 대해 사람이 단맛을 한번 보게 되면, 그것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되 버리
죠. 그래서 아 저분들은 이제 틀렸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동물이었다.”
대추리는 국가·경찰·군인들의 폭력에 고립됐다. 힘의 논리에 의해 무자비하게 말이다. 주민들은 폭력의 삼각지대 속에서 몇 년 동안 투쟁했다. 그들은 자신의 집을 마음대로 볼 수 없다. 검문을 받아야 한다. 들어오는 입구를 다 막고, 수로에다 물을 가둬 철망을 쳐 놨다.


국방부가 땅을 수용해서 미군에게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토지주는 국방부다. 하지만 실제 모든 관리의 권한은 모두 미군에 있다. 그래서 미군이 승낙하지 않으면 대통령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미군기지라 했다.


예전에는 주민들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안에 사람이 없다고 했단다.“ 우리는 대추리라는 울타리 안에 갇힌 동물들이었어요.”

 


마을을 지키고자 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우리에게‘빨갱이 새끼’라고 해요. 주한미군은 종전 이후 북한을 막기 위한 주한 주둔군이었다. 그런데 미군을 평택 미군기지로 재배치하는 것은, 북을 막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동북아를 겨냥한 새로운 기지로 재편하기 위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대추리 주민들이 시위를 하러 다닐 때, 국방사업을 반대한다고‘빨갱이 새끼, 반미주의자, 저 불순세력자다.’라고 대추리 사람들을 상당히 매도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북한만 지키면 됐다. 정작 대한민국은 북한만 지키는 것이 아닌 동북아를 지켜야 하는 임무를 지니게 된 것이다.

 


‘보상’이란 말은 없었다.
신 이장은“나는 보상이란 말이 가장 싫어요. 보상이라는 것은 충분한 값, 그 이상을 주는 것인데 그런 것은 전혀 없었어요.”라고 했다. 주민들에게는 이주마을에 있는 집이 전부다. 심지어 43가구 중 11가구는 빚이 있다. 집들이 잘 지어져 있어, 정부의 지원을 받았냐고 묻는다. 심지어 싸움을 같이 했던 사람들까지도…. 개인들이 산 땅에 개인 돈으로 집을 짓고, 부족하면 자식들에게 돈을 빌리거나 융자도 얻었다.


대부분 70~80대 연령층인 이곳 주민들은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분들이 사회적으로 어디 가서 취업을 하거나 무엇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 막말로 이곳에 와서 죽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상황이다. 생계를 유지할 유일한 터전을 힘의 논리에 의해 이렇게 다 빼앗기고 나왔다. 국가가 그냥 이주단지에 방치를 해 놓은 것이다. 주민들의 생계수단이 없다. 그것이 가장 위험한 상황이다.

 


사라진 옛 마을
대추리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서로 어디에 사는지 모른다. 대추리에는 더 이상 옛날 마을 형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정부가 100년 가는 기지를 짓겠다며 성토작업을 2m에서 3m 정도 높여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에 산에 흙을 깎아다가 성토작업을 하는 바람에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가 아는 상식선에서는 그것이 평화를 지키고, 내 고향을 지키는 일이었기 때문에 했던 거지 다른 이유는 없어요. 이제 이런 얘기를 자꾸 하고 싶지도 않아요. 한다고 한들 도움이 안되니까요….”


임지혜 수습기자 luft420@s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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