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주 교수의 <성의 담론과 이해>

 

학생들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을 하나 던진다.“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나요?”모두들 생뚱맞은 질문에 고개만 갸웃거린다. 단순하게 답하면 좋으련만, 자아실현이니 인류 평화니하는 거창한 답변으로 포장을 하려니 생각만 복잡해진다. 더구나 이 수업은 ‹@성의 담론과 이해›아닌가. 답변을

기다리기 지루할 즈음 한마디 한다. “굳이 밥을 먹어야 살지, 밥심.”피식, 여기저기서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인다.“먹는 것도 먹는 것이지만 섹스(sex)를 해야 살지.”학생들의 웃음에 살짝 부끄러운 기운이 돈다. 이제부터 성 담론이 시작되는 것이다.

‘식욕’은 생존과 관련된 중요한 인간의 욕구이다. 먹지 않으면 살수없으니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자아실현이나 인류평화도 좋지만 그것도 살아 있어야 가능한 것이리라. 그런데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다. 그것은 바로‘성욕’이다. 발정기에만 교미를 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1

년 365일 1분 1초도 쉬지 않고 섹스를 생각한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발뺌하고 싶겠지만, 굳이 프로이드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의식의 저편에서는 끊임없이 성욕이 불끈거린다. 다만 동물과 달리 부끄러움을 아는지라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은 채 성욕을 채우지는 않을 뿐이다. 그래도 밥을 먹을때배고파서 먹기도 하지만 맛있는 것을 음미하려고 먹을 때도 있다. 마찬가지로 섹스도 종족 보존이라는 인류사적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하기도 하지만 즐거움과 유희로서 즐기기 위해 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에게 식욕과 성욕은 똑같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먹는 것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섹스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

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성을 공적인 장소에서 화젯거리로 꺼내려하면 다들 움찔하거나 얼굴을 붉힌다. 음담패설이나 늘어놓는 못된 아이로 비춰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기

존의 고지식한 성 의식이 깨지고 있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성 문화가 유행하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성에 대한 이야기는 부끄럽거나 껄끄러운 것일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성은 혼자 가지고 있어야 할 거리이지 남들과 나누어서는 안 되는 것인가? 혹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고대 그리

스의 성 의식은 남성 끼리의 동성애나 미소년과의 소년애도 허용하는 자유로운 성이 허용되는 시기였다고 한다. 특히 신화를 통해 신들이 즐기는 자유로운 성 문화는 당시 그리스인들의 성

적 쾌락과 욕구를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과거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신라시대에는 화랑들 간의 동성애가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자유연애가 성행하였다고 한다. 다만 정도가 지나쳤던 모양인지 조선에 들어서면서는 엄격하게 성문화를 단속시켰다. 성을 제대로 알고 행하도록 뭐든 가르

치려 했다면 좋았을 텐데, 여성에게는 순결의식을 강조하여 열녀문 세우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알게 하는 반쪽짜리 성문화가 자리 잡았고, 결국은 성이 음지로 내몰리게 됐다. 햇빛을 받아

야 보송보송하고 튼실한 열매를 맺을텐데, 음지로 내몰렸으니 제대로 된 성문화가 자리잡았을 리 만무하다.

 음지로 내몰린 우리의 성문화를 햇살 좋은 양지로 끌어내 제자리에 놓아두지 않으면 인간은 성을 지배하기보다는 성에 지배당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본성가운데 하나가 성이고 우리 삶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임을 안다면, 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꿔야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올바른 삶을 위해서, 그리고 올바른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성에 대한 인식이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자연스러운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좀 더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성에 대한 담론이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성, 혹은 섹스를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이 쉽지는 않다. 처음 이 강의를 시작했을 때 섹스와 마스터베이션(masturbation)이란 단어가 입에 붙질 않아 한 번 내뱉을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고 어떻게 순화시켜 말해야 할지를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쉽게 꺼내면 될 성 담론을 어렵게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고 했던 것이다. 선생이 그런데 하물며 학생들이야 오죽했으랴. 한해 한 해 강의를 진행하면서 그 단어들을 내뱉는 데 익숙해져갔다. 이러한 내변화가 학생들에게도 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매 학기 강의를 시작한다. 그

변화의 시작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의식이 어떠한 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첫 시간은 늘 그렇듯 성 의식에 관한 간단한 설문으로 시작한다.

 해를 거듭할수록 느끼는 것은 성에 대한 학생들의 의식이 점점 개방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없어도 성행위를 할 수 있다는 응답이 68%, 혼전 성 관계도 79%가 가능하다고 답했다. 예전에는 80여 명의 수강생 가운데 1명이 나올까 말까 했던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느꼈다는 학생들도 16%나 되는 것을 보면 성에 관련된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야동과 같은 좋지 못한 성문화를 통해 성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현 상황은 다양한 기능을 가진 스마트폰을 가지고 전화통화만 하는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만큼 올바른 성의 담론과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20대의 혈기 왕성한 학생들 앞에서 고지식한 성 이론만을 늘어놓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성욕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 생기는 갖가지 문제들-성폭력이나 성

매매, 변태 성욕-을 다룸으로써 무절제한 성욕이 자신을 어떻게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알고, 스스로 제어할 힘을 갖도록 도와주는 것이 낫다. 자유로운 담론의 장에서 성을 올바르게 이야기 하고 이해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 담론이 음담패설의 야한 수다가 아니라는 것, 감춰 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 붙지 않는 그 단어들에 점점 익숙해지는 것, 그래서 강의가 끌날 때쯤에는 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한 봄 햇살 같아졌으면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저 내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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