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 바이오 및 뇌 공학과의 정재승 교수

진중권 교수님과 함께 쓴《크로스》라는 책의 저자 소개를 보니 ‘과학 천재이자 글쓰기의 천재’라고 써 있던데요.

저도 책이 나온 뒤에 봤는데, 저자를 ‘천재’라고 설명한책은 아마 전 세계에서 처음일 거예요(웃음). 민망하지만 재미있죠. 다음 쇄부터는 바꿔 달라고 요청했는데,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겠네요. 당연히 저는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과학하는 사람들이 글을 쓰는 데 경험이 많지 않다 보니 제가 도드라진 것 같아요.

과학자에게 글 쓰는 경험이 생소할 것 같기도 한데, 글쓰기를 배워 본 적이 있나요?
학창시절부터 글 쓰는 것을 즐겼어요. 글짓기 대회 나가서 수상도 해보고, 문학반에도 있었어요. 근데 당시에는 좋은 글을 써서 상을 받았다기보다는, 상을 받기 위한 글 쓰는 법을 알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대학에 입학해 학교 신문에 글을 연재하기도 했고,《과학 동아》에도 글을 게재했죠. 처음에는 기자들이 저의 글을 많이 고치더라고요. 그래서“일방적으로 고치지 말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알려 주면 내가 고치겠다.”라고 말했죠. 그렇게 수많은 기자들의 첨삭지도를 받다 보니 자연스레 글쓰기 능력이 향상된 것 같아요.

학부 시절에 방학이 되면 도서관에서 전공과 다른 분야들의 책들을 많이 읽었다고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추리 소설을 몰입해 읽거나, 학교에서내주는 과제할 때를 제외하고는 독서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어요. 대학에 와서 독서에 눈을 떴죠. 늦게 부뚜막에 올라간고양이 형국이 된 것이죠. 저에게는 전작주의 욕망이 있어서, 책을 읽다 보면 더 읽
고 싶은 책들이 더 많아져요. 그래서 읽어야 할 도서목록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죠.

책도 읽고, 공부도 열심히 하다 보면 연애할 시간도 없었을 것 같아요.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여성들 앞에서 한 마디의 말을 임팩트 있게 하기 위함이에요. 이 모든 것이 당시의 여학생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죠(웃음).

 

박사 과정을 하던 시절을 가장 행복했던 때로 꼽으셨는데, 이유가 무엇인가요?
일은 항상 몰아서 오는 것 같아요. 하나의 일이 딱 발생하거나, 순차적으로 일이 하나씩 오기보다는 여러 기회가 한꺼번에 저의 삶으로 들어오죠.박사과정을 하던 시절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저의 첫번째 책이 출판됐고, 첫 번째 박사 논문을 썼고, 학위도 받았죠. 잠을 잘 시간이 없을 정도로 정말 숨 가쁜 삶의 변화들을 경험했어요. 그런 하나하나의 경험들이 저에게는 설레고 떨리는 좋은 경험들이었어요.
실험실에서 혼자가 아닌 여러 친구들과 함께 밤을 새며 프로그램을 돌리던 경험. 실험 결과가 생각대로 안 나오기도 하지만, 변수를 수정하면 생각한 결과가 나오기도 하고. 그렇게 실험 결과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했죠. 공부 이외에 다른 고민들을 하지 않아도 됐어요.
물론 보통 20대 중반의 학생이라면,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해서 뭐가 될까라는 고민을 할 법도 하죠. 하지만 당시 저에게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논문으로 졸업을 하는 것이 가장중요한 일이었어요.
지금은 학생들도 여럿이고, 동시에 진행되는 논문 주제들도 다양하고, 가정도 있고, 생각할 것들,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아요. 그때는 공부라는 하나의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니 행복했던 시절이죠.

첫 번째 저서인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이후 2001년, 두 번째 책인 《과학 콘서트》가 출판됩니다. 책을 낼 당시 호응이 좋을 거라 예상했나요?
당연히 예상하지는 못했어요. 미국에서 박사후과정을할 때 쓴 책인데, 당시 주말마다 글을 하나씩 썼어요. 아주 천천히 오래오래 생각하면서 썼고, 이것들을 묶어서 한 권의 책으로 내려 했어요. 누구의 요청에서가 아니라‘내가 읽고 싶은 책을 내가 쓰자.’라는 마음으로 쓰다 보니 즐거웠죠.
처음에는‘복잡계 과학이 우리의 삶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라는 묵직한 주제를 담은 과학 전공 서적으로 쓰려 했어요. 그래서《네이처》와《사이언스》에 실린 당시 최근의 내용들을 담았죠. 대신‘조금 딱딱하지 않게 쓰자.’라는 정도로 썼어요. 그런데 그 책이 본의 아니게 중·고등학교 추천도서로 선정됐더라고요(웃음).

 

《과학 콘서트》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나요?
출판사 사장님이 지은 제목이에요. 처음에는 너무 경박스럽다고 생각해서 반대했어요. 제가 지은 제목은《세상은 얼마나 복잡한가?》였어요. 그런데 아마 그렇게 제목을 지었다면 망했을 거예요(웃음). 출판사 사장님의 혜안이 돋보였죠.

《과학 콘서트》라는 책이 50만부 넘게 팔렸는데, 당시 기분이 어땠나요?
굉장히 좋았죠. <TV 책을 말하다>와 같은 프로그램에 소개되고, 신문의 북 섹션을 장식하고, 당시‘올해의 책’으로도 선정됐죠. 모두가 첫 경험이다 보니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고 너무 좋았어요. <느낌표>프로그램의 선정도서로까지 됐을 때에는‘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죠. 그때에는 이미 저의 손을 떠난 책이었고, 이 책의 운명은 어디까지인가가궁금해지더라고요. 그렇지만 가장 감사한 것은 10년이라는긴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꾸준히 주목을 받았다는 거예요.
출간 직후 화제가 된 것보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사람에게 사랑받았다는 것이 정말 감사해요. 그것에 보답하기 위해 개정판도 낸 것이고요.

그럼 독자들의 기대가 계속 이어진다면,《과학 콘서트》의 후속작도 나오는 것인가요?
《과학 콘서트 2》요? 많은 사람들이 원하고 있어요. 아마도 언젠가는 나올 것 같아요.《과학 콘서트 2》의 핵심은《과학콘서트》가 세상에 던진 질문의 그 신선함을 간직한 또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하는 거예요. 그것은 출판사의 요청도, 원고 청탁도 아닌 저의 마음에서 나오는 내적 질문에 의해 쓰여야 하겠죠.
사람들이“책을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책을 쓰고 싶냐?”라고 물어보거든요. 정말 어리석은 질문이죠. 제일 중요한 것은‘내가 왜 책을 쓰고 싶냐?’라는 질문이에요. 세상을 향해 던질 수 있는 내적 이야기가 있어야 해요. 이야기를 남들이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쓴다거나, 재미있게 예제를 넣어서 혹은 비유를 들거나 인용을 하면서 쓰는 방법적인 부분은 중요한 게 아니죠. 아직 누구도 세상에 내놓지않은 목소리를 당신이 낼 수 있느냐, 당신의 그 책을 사람들이 돈을 주고사 볼 가치 있는 질문과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죠. 그것이 있으면 책을 쓰면 되고, 없으면 책을 쓰면 안되죠.

신문 칼럼들도 그런 마음으로 쓰는 것인가요?
물론이죠. 그러다 보니 칼럼을 많이 못 써요. 그렇게 세상을 향해 할 얘기가 많지 않은 거죠(웃음).

미학자 진중권,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김 호, 소설가 김탁환…《과학 콘서트》이후로 나온 책들이 모두 공동 저서더군요. 그분들과 함께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2001년에 《과학 콘서트》를 낸 이후로 8년 동안 책을 내지 않았어요. 공부할 시간도 필요하다 보니, 책을 쓸 시간이없었죠. 그런데 또 책을 쓰려고 하니 글이 안 써지더라고요.《과학 콘서트》를 뛰어넘는 책을 써야겠다는 마음 때문이었죠. 그래서《과학 콘서트》보다 좋은 책을 쓰기 위해 공부하는 마음으로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해서, 저와 다른 분야에 계시면서 제가 배우고 싶은 분들께 먼저 제안을 했죠. 모두 열려 있는 분들이어서 충돌 없이 재미있게 글을 썼고, 그분들께 많은 것을 배웠죠.

그렇다면 원작을 뛰어넘는《과학 콘서트 2》를 기대할 수있을까요?
그런 책이 나와야 하겠죠. 그 책은 아마 저의 분야에 관한 책이 돼야 할 것이고요.

그는“훌륭한 과학자들이 많지만 누군가 한 명을 닮기보다는 세상에 나오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학교에 속한 교수, 연구소에 속한 연구원이라는 직책보다‘물리학자’로 불리길 원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는 ‘물리학자 정재승’인 것이다. 마지막 말은 그가 지난 3월 29일 (목) 본교에서 열린 특강에서 학생들에게 남긴 말이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지도 읽는 법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너는 이제 지도 읽는 법을 배웠으니 세상에 나가면 길을 잃지 않을 거야.”하고 내보냅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세상에 나가서 마주치는 문제는 이전 과학자들이 수백년간 풀어 놓은 예제들이 아닙니다. 처음 보게 되는 새로운 문제들이죠. 자신이 새로운 지도를 그려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들을 누가 어디서 풀고 있고,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한 방법은 스스로가 알아내야 합니다. 남이 보여 주는 그림으로만 세상을 이해하지 않고, 나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만‘내가 그린 지도를 통해 어느지역이 좋은 곳이다.’혹은‘어디에 사람들이 몰려 있구나.’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겠죠. 나만의 지도를 그리십시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