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광주, 민주주의 역사 속으로

1979년 10·26 사태 이후 비상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이에 1980년 5월 18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계엄군과 시민군의 충돌로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올해로 32년째를 맞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며, 자신의 고향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힘썼던 광주 시민의 숭고한 역사를 돌이켜보고자 16일(수)에 광주로 향했다.  

 

   “도청 안에서 총알 세 방을 맞았어요. 몸에 들어오면 깨져 버리는 납탄으로된총알에 맞아서 제거를못한대요. 그래서 내 몸속에는 수백 개의 총알 조각이 있어요.”5·18부상자회 부회장 조시형 씨는 32년 묵은 통증을 전화로 쏟아냈다.“이것 때문에 몸이 안 좋아요.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지요.”
  당시 시민군이었던 조 씨는 참혹했던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15분의 기억을 더듬었다.“도청을 향하는 여러 길목에서 총을 쉬지 않고 쏴대며 밀려 들어왔어요. 동기들이 하나둘씩 총에 맞고 쓰러져 갔지요.‘우리는 살아 나가서 증인이 되자.’동기 한 명과 함께 브리사k303 자동차 문짝 사이사이에 방패를 다 박은 후, 계엄군의 한가운데를 향해 돌진했어요.”총알은 한 치의 자비 없이 자동차를 후벼 팠다.“다행히 개죽음은 면했어요.”그날 도청 안에는 약 500명의 시민군이 있었지만, 그 중 137명은 잡혀 갔고 나머지는 전부 죽었다.
  “전화라서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할 수가 없네요. 워낙 어마어마해서….”
  5월의 전남대학교(이하 전남대) 캠퍼스는 시원스레 쭉뻗은 포플러 나무의 초록빛 생기로 가득했다. 전공서적을 허리춤에 끼고 바쁜 걸음을 옮기는 학생들, 혹은 푸른 잔디밭 위에 앉아 늦봄의 정취를 즐기는 학생들 사이로 멀리 전남대 정문이 보인다. 전남대 정문은 5·18 민주항쟁 사적 1번이다. 정문 옆 한쪽에 고요히서있는 사적비가그사실을 증명해 준다.“17일 밤, 계엄군이 갑자기 들이닥쳤어요. 그때부터 무자비한 시민 탄압이 시작되었죠. 군대에서 참나무로 특수제작된 몽둥이로, 사람들의 머리를 무차별적으로 때렸어요.”18일 오전 10시, 민주화의 불씨가 전남대 정문에서 시작됐다. 정문은 출입을 막는 계엄군과, 비상계엄에 맞서 거리로 진출하려는 학생들의 분노가 엉켜 있었다. 32년 전, 전남대의 5월 캠퍼스는 핏빛으로 완전히 얼룩져 갔다.
  금남로는 5·18 당시 시민군이 공수부대에 맞서 민주화 시위를 벌이던 장소다. 광주 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참혹한 광경을 본 시민들은 금남로로 쏟아져 나왔고, 200여 대의 택시가 경적을 울리며 계엄군의 과잉 진압에 항의했다. “전쟁이었어요….”조 씨는 통탄해했다.“대검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쳐서 죽이고. 가족이 눈앞에서 죽어 가니까, 광주 60만 시민이 다 밖으로 나왔습니다.”“민간인을 아무나 죽였어. 임신한 여자들도 쑤시고, 할머니들 머리를 내리치고…”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 모 아주머니는 3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생생한 당시의 정황을 되뇌며 몸서리쳤다.“자신의 어머니 아버지의 피를 보고, 광주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어.”
  금남로 일대는 현재 은행·카페·학원 등 세련된 건물들이 빽빽이 즐비해 있다. 스쳐가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골목 사이사이 곳곳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몇 개의 사적비만이 과거 이곳에 있었던 항쟁의 역사를홀로 알리고 있었다.
  금남로 주변으로 멀지 않은 곳에는 전남대병원ㆍ조선대병원ㆍ가톨릭대병원 등 대학 병원과 민간 병원이 모여 있다. 지금은 깨끗이 단장해 과거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사적비를 통해 당시는 생과 사를 다투었던 아비규환의 현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모든 병원 영안실에 주검을 놔둘 공간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병원 앞에 쌓아 두었는데, 시체들로 빽빽했죠. 시체 놓을 곳이 없어서 길가에까지 눕혀 뒀어요.”계엄군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사실을 은폐하고자 시체를 수습하기에 급급했다“. 소태동뒷산에 시체를 묻어 부렀는데, 우리가 가서 파 보니까 지문 못 찾게 손을 칼로 다 잘라 놔 부렀대요. 얼굴도 못 알아보게 페인트를 칠하고요.”조 씨의 한숨 사이로 말이 삐져 나왔다.“어떻게 시민들에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무기가 없는 시민들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광주 일대를 털어 칼빈총, 엠원소총, 기관총, 수류탄전부 싹 모았지. 그리고 방어를 위해 무장을 했어.”이때부터 조 씨는 시민군에 합류했다. 위험한 무기를 지닌 상태였지만, 광주 시내 전체에서 강도·절도 사건이 단 한 건도 없었다.“광주 시민 모두 단결을 한 거지요.”
  광주를 관통하는 영산강 옆으로 삐져나와 흐르는 광주천이 있다. 광주천 가운데에는 광주에서 가장 유명한 재래시장인‘양동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아줌마들이 시장에서 주먹밥이고, 김밥이고 전부 말아서 시민군들한테 다 갖다 줬지. 길거리에 솥단지를 갖다 놓고 밥 해다가 전부 먹였어.”약 열흘 동안 광주 시민들은민주화의 자매이자 형제로서 서로를 도우며 의지했다. 김 모 아주머니는 떨리는 눈동자를 바로  잡고서는 다시 말을 꺼냈다. “통신마저 끊긴 그 상황에서, 광주 시민은 전부 하나였어.”
  머리 위로 쏟아지는 5월의 햇살은 계엄군의 총알 마냥 무척 따가웠다. 피와 눈물 자국으로 얼룩져 있는 시민군의 마지막 격전지인 구 도청은 화려한 건물로 뒤덮인 금남로 끝에 위치했다. 32년 전 시민군이 남긴 핏빛 발자국을 따라 행진을 했다.
  멀리 시민군이 한데 모였던 동그란 분수가 보였지만, 눈 앞에 보이는 구 도청건물은 철근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공사 안내판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든 국기 게양대는 건물외관을 알리는 지표였다“. 외관은 남기고 나머지 건물은 국립 아시아문화전당으로 짓고 있습니다.”구 도청 자리에 있는 문화전당역 관계자는 한창 공사중인 구 도청건물을 바라보며 말을이었다.“이 공사 때문에 구 도청 앞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솔직히 5월 축제 기간에는 보수공사를 하면 안 되죠.”5월 18일 하루 전날까지도, 구 도청은 굴착기의 둔탁한 소리에 싸여 국립 아시아문화전당으로 리모델링되고 있었다.
  작년 5월, 세계는 광주의 민주운동을 주목했다. 25일(수) 유네스코는 5·18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등재된 4271권의 기록 문서와 2017개의 필름은 5·18 당시 시민들의 절박했던 상황과 미국의 비밀해제 문서 등이다. 세계는 이것을 자유를 얻기 위한 광주시민들의 처절했던 사투와 국가권력 남용의 비극성과 반인권성을 보여 주는 민주주의 교육의 도구로써 인정했다.
  반면 한국에서의 광주 사정은 다르다. 5·18 관련 행사는 갈수록 축소되고 있는 실정이다. 문화전당역 관계자는 “원래 5월의 금남로 일대는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축제 규모와 수가 모두 축소됐습니다.”라고 전했다.
  518번 버스를 타고 동네를 한참 벗어나다보면 형형색색의 수많은 깃발과 태극기가 사정없이 나부끼는 지점이 있다.‘그날의 함성, 다시 한 번’,‘되살려요 평화의 광주’아카시아 향기가 코를 찌르는 가로수길 사이로 버스가 국립 5·18 묘지를 향해 시원하게 달렸다.
  하늘을 뚫고 높이 솟은 추모탑 아래는 저마다의 사연이 구구절절 적힌 묘비와 봉분이 사진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교복 모자를 쓴 남학생, 양복 입은 남자, 젖살이 빠지지 않은 여학생, 심지어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기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시신을 찾지 못해 봉분없이 평평한 묘, 시신은 있지만 신원이 불분명한 묘 등이 널따란 국립묘지를 지키고 있었다.
  하얀 아카시아 꽃이 눈처럼 우수수 내리고 있었다. 민주화의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그곳, 낙하하는 아카시아 꽃은 광주의 상처 위에 살포시 앉으며 5월의 대기를 감싸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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