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 시대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시작하던 주전 13세기부터 약 300년간 계속된 부족연맹체 시절이었다. 이스라엘은 12지파라고 불리는 부족연합체를 의미했다. 각 지파는 인접 지역에 강력한 무장력과 선진화된 관료 체계를 갖춘 왕국들이나, 기동성이 강한 외부 침략자들에게 늘 노략을 당했다. 사사기 10~12장에는 요단 동쪽 지역 중 가장 윗지방에 터 잡고 사는 암몬 족속에 시달림을 당하는 이스라엘 지파(에브라임과 길르앗)의 곤경을 다룬다. 에브라임과 길르앗은 물론이요 이스라엘 전체에서 암몬 족속의 침략과 노략질로부터 동포를 구할 구국 영웅은 출현하지 않았다.


  이 때, 기생의 아들로서 힘깨나 쓰는 사회적 부랑아처럼 살던‘입다’라는 인물에게 국난을 타개할 기회가 주어졌다. 암몬을 물리치면 나라의 장관급 영도자로 추대하겠다는 민중적 열망을 담보 삼아 입다는 암몬을 격퇴하는 전선에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런데 어느날 암몬과의 전선에 나간 입다는 전세가 격렬해지자 하나님을 향해 기습적인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하나님께서 암몬족속을 자신의 손에 넘겨 자신을 개선장군으로 귀국하게 하시면, 자신의 개선행렬을 축하하기 위해 가장 먼저 나오는 자(사람이든 짐승이든!)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는 서원을 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전쟁은 입다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보다 더 큰 갈등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자신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소고를 치며 아버지의 개선행렬을 맞이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을 향해 서원한 것은 해가 되더라도 갚아야 한다는 고대적인 서원의 엄숙성 때문에, 입다는 자신의 딸을 하나님께 감사 번제로 바쳐야 했다. 이 사정을 들은 딸은 아버지를 위로하되, 2개월 동안 자신의 처녀시절의 삶을 만끽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암몬의 잦은 침략으로 괴롭힘 당하던 동포를 위하여 치른 전쟁에서 아버지가 내뱉은 절박한 서원을 이해한 것이다. 딸은 친구들과 함께 두 달 동안 꽃다운 나이에 생애를 마감하는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슬퍼하며 애곡하다가 돌아와 아버지가 마련한 번제단에서 제물로 불태워졌다.


  사사기는 입다의 딸 사건을 한편으로 역사의식과 공민의식이 철저한 처녀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듯하지만, 또 한편 자신의 자녀를 불태워가면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감사를 표하는 입다의 이교도적인 행태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모든 희생양의 운명에는 이런 빛과 어둠이 뒤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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