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된 사학과 최병현 교수

지난 7월 13일(금) 본교 한국기독교박물관장인 사학과 최병현 교수가 대한민국학술원(이하 학술원)의 신임 회원으로 선출됐다. 최 교수는 故조요한 전 총장 이후 본교에서 두 번째로 배출된 학술원 회원이다. 대학 때 유적을 발굴하고 고고학 연구를 시작했던 시절부터 진정한 학자로 거듭나기까지 그의 학문 인생을 따라가 보자.

 

학술원 회원이 되신 지 거의 두 달이 돼갑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지난 8월 1일(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증 수여식에 참여했습니다. 회원으로서의 활동은 아직 이것뿐이네요. 아무래도 선출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니까 여기저기서 축하해주는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저 역시 저의 은사님, 스승님들께 인사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학술원에 대해 잘 모르는 학생들도 많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일반 국민들도 모르고 교수들도 모르는 분 많아요. 극소수만이 들어가는 자리라서 회원이 되겠다고 막 노력하는 것도 불가능하죠. 학술원은 학술발전에 현저한 공적이 있는 학자를 우대 지원하고 국가가 대우해주는 곳입니다. 쉽게 말하면 학자를 국가 유공자처럼 대우하고 학술활동을 지원하는 단체예요. 국가의 학술기능에 대한 정책 자문과 건의, 그리고 학술연구와 지원이 주요업무입니다.
 학술원은 인문사회과학부와 자연과학부가 있고, 분과마다 여러 분야의 학문으로 나눠지는데, 정원이 150명으로 정해져 있습니다.한번 회원이 되면 죽을 때까지 회원으로 있기 때문에 자리가 잘 안 나요. 학술원이 1954년도에 생겼는데, 현재 회원을 다 합쳐도 400명이 안 됩니다. 저는 3분과에 소속돼 있는데, 3분과는 △고고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사학 △인문지리학의 다섯 개 학문분야로 이뤄집니다. 사학을 제외하곤 다 자리가 하나씩이에요. 저로서는 예상치 못했던 영광을 차지하게 된 거죠.

어떻게 보면 학자로선 마지막에 얻게 되는 가장 큰 명예입니다. 회원이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나요? 어떻게 해서 뽑히셨는지 궁금합니다.
 대한민국학술원법에 의하면 회원으로 추천되는 과정은 두 가지로 규정됩니다. 기존의 회원들이 후임 회원들을 추천하는 방식이 있고, 학술 원에서 학회에 추천을 의뢰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현재 학술원법상으론 두 가지 경우가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학회의 추천을 받아서 심사해서 결정하도록 돼 있어요. 학술원의 분과 중 정원에 미달되는 분야에서 그 분야의 중심 학회에 요청을 해요. 저는 고고학 분야에 자리가 생겨서 들어오게 된 거죠. 고고학 단체가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 한국고고학을 대표하는 게 한국고고학회입니다. 한국고고학회에 3배수, 즉 세 사람을 추천 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요. 제가 그 3배수 중 한 사람으로 추천이 됐고 학술원의 심사를 거쳐 회원으로 뽑힌 거죠.

회원으로 선출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회원으로 선출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문적인 업적이겠죠. 그 외에도 학회 활동 같은 학술발전을 위한 노력들이 있어야 해요. 저를 추천해주는 사람은 저도, 선배도 아니고 후배들입니다. 학계의 후배들이 봤을 때 학문적으로 훌륭한 업적을 갖고 있고 한국고고학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사람일 경우에만 추천받을 수 있는 거겠죠. 덧붙이자면 운도 있어야 할 거예요. 회원 정원이 고정돼 있기 때문이죠. 타이밍이 잘 맞는 것도 운이에요.

어렵게 얻은 자리인만큼 선출됐을 때 소감도 남다르셨을 것 같아요.
 첫째로 3월에 학회에서 추천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참 기뻤습니다. 그 기쁨이란 이런 거예요.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논문을 써낸 후 직장 문제나 사회적 현실에 부딪힘에도 학계의 흐름에서 동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저는 국가기관인 문화재청이라는 곳에서 문화재위원으로 위촉받았습니다. 철저한 문화재 조사와 보존을 위해 소리 높여 주장을 펼쳤어요. 이후 한국고고학회 회장직을 맡게 되죠. 최근에 와서 한국고고학이 커졌지만 그만큼의 내실이나 위상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위상을 높이고 학문적 내실을 다지기 위해 한국고고학개설서를 만들고 학보를 발간했어요. 이렇게 제 자신의 공부와 학문의 발전을 위한 노력들을 나름대로 해왔습니다. 학회에서 제가 추천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동안의 공부와 노력들이 학계 후배들에게 평가받았다는 점에서 대단히 기뻤습니다.
 둘째로 최종 확정됐다는 통지를 받고서는 학문인생을 살아오면서 만났던 스승님들께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선 숭실대 사학과 이재 룡 교수님과 김문겸 교수님이 계시고요. 고고학을 가르쳐주신 선생님으 로는 한국기독교박물관의 설립자이신 매산 김양선 선생과 제 지도교수였던 임병태 교수님이 계시죠. 학문적인 지도뿐만 아니라 인생의 항로를 정해주신 분들이십니다. 사회에 나가서도 여러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 중 특별히‘스승님’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몇 분 있어요. 국립문화재연구소 초대소장을 하셨던 김정기 박사가 계십니다. 서울대에 계셨던 김원룡 교수님은 한국고고학의 태두라고 할 만큼 한국고고학 발전의 원동력이 되 신 분이에요. 학계에 등장할 때부터 작고하실 때까지 줄곧 제게 애정을 주셨습니다. 여러 스승님들께서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데 길잡이를 해 주셔서 감사해요.

고고학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학생 때부터 고고학에 관심이 있어서 고고학 수업도 들었고 유적 발굴 조사에도 참여를 했어요. 그것부터 따지면 고고학을 시작한 지 무척 오 래됐죠. 67학번이니까 45년 정도 됐네요.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고고학에 몰두하여 전공이 되기 시작한 것은 1973년부터입니다. 그해 봄에 시작된 경주 천마총 발굴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고고학의 길에 들어선 거죠. 사실 대학 입학 때는 목회자가 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러다 목회자 의 꿈을 멀리하고, 막연하게 학문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 중에 임병태 선생님으로부터 경주의 중요한 발굴에 참여하겠냐는 연락이 왔어요. 천마총•황남대총•안압지• 황룡사지 등 굉장히 크고 중요한 발굴 이 10년 동안 계속됐습니다. 그게 충실한 고고학 훈련이 된 거에요. 처음엔 비정규직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학예연구사, 즉 학예직 공무원이 됐죠.

이후 학문 활동은 어떻게 이어가셨나요?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김정기 박사나 학교의 은사님들이 대학원에 와서 공부하도록 권유하셨습니다. 그에 따라 석사학위 과정을 밟고 논문을 썼는데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김원룡 선생님이 당시 한국고고학 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분이셨는데, 그분이 제 논문을 칭찬하셔서 저는 일약 스타가 됐죠. 바로 선생님들이 유도해주셔서 박사 과정과정까지 들어왔고요. 석사논문을 낸 지 얼마 안 돼서 교직으로 오게 됐습니다. 경주 발굴 시절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는 발굴도 공부도 참 열심히 했어요.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 노력들 이 스승님들 눈에‘학문을 할 사람’이라 비쳐진 거죠. 그래서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하도록 유도해주신 거예요.
 저는 스스로를 ‘토종 숭실인’이라 해요. 학사•석사•박사과정을 숭 실대에서 마쳤고, 교수일도 숭실대에서 하고 있으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학교의 사랑을 듬뿍 입었어요. 좋은 스승님들을 만나서 인생이 이렇게 펼쳐져 온 것을 생각하면, 학교에 무한한 감사를 하죠. 결국 학술원 회원 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숭실고고학이고 숭실대학교인 겁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숭실인에게 감사해요.

‘토종 숭실인’인만큼 숭실의 고고학에 대한 자부심도 있다고요?
 물론이죠. 대부분의 근대학문은 서양에서 수입이 됐어요. 그리고 국내 상황을 보면 대체로 선발대학의 근대학문이 후발대학으로 전수됐습니다. 예를 들면 일제강점기의 대학들이 있고 해방 이후에 생겨난 대학들이 있어서, 선발대학에서 후발대학으로 전수된 거죠. 우리나라 고고학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수입 및 전수됐습니다.
 우리 학교의 경우 평양숭실에선 고고학교육이 있을 수 없었고, 서울숭실에서 고고학 교육이 시작됐습니다. 숭실의 고고학교육은 자생적으로 시작됐습니다. 매산 김양선 선생이 유물을 수집하다가 학문으로 발전해 독자적으로 고고학을 시작하셨어요. 그분의 수제자가 임병태 교수님이 십니다. 매산 김양선 선생이 일찍 작고하셔서 저는 실질적으로 임병태 교수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강의 때 가끔 제가 숭실 고고학의 3대 교수라는 얘기를 해요. 매산 선생이 독자적으로 시작한 고고학이 점점 넓혀져서 숭실의 고고학 전공자들을 많이 배출한 셈입니다. 저는 3대를 잇는 고고학자라는 데 대한 자부심과 함께 숭실 고고학을 더 성장 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어요.

앞으로 교육자 겸 학자로서 이루려는 목표가 있으신가요?
 이제 정년이 일 년밖에 안 남았어요. 학술원 회원들은 현직에 있는 경우가 드뭅니다. 저는 특별한 경우죠. 곧 학교를 떠나야 하지만, 아직 ‘안방 늙은이’할 만큼 늙지 않았으니 하던 공부를 계속할 거예요. 요즘에도 논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학자는 논문이나 저서로 학문인생을 표현하기 때문이죠. 젊어서 바쁜 일 때문에 미뤄뒀던 것들이 이제는 정리할 때가 된 겁니다. 요즘은 오히려 부지런히 공부하는 중이에요. 건강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학문 활동을 계속하려 합니다. 그러면서 제가 지도교수로 돼 있는 석박사 대학원생과 수료생들을 계속 지도해야겠죠. 또 이젠 학생들 뿐만 아니라 한국고고학계에도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서 할 것입니다.

숭실 구성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제가 학술원 회원이 된 것이 숭실 구성원들에게, 특히 동문들에게 격려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후배나 숭실대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제가 살아보니 자신이 노력한 만큼 세상이 갚아준다는 겁니다. 숭실대 학생들이나 후배들이 큰 희망을 갖고 열심히 노력해줬으면 좋겠어요. 그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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