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남영동 1985>에서 김종태 역을 맡은 박원상(독문·88) 동문

관객들이“아…….”하는 작은 탄식과 함께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영화가 있다.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 1985>다. 이 작품은 전두환 군사정권이 극에 달했던 1985년,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故김근태 의원이 22일간 고 문 받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팩션 영화’다. 이 화제작과 함께 주목 받고 있는 이가 또 있다. CGV 무비꼴라쥬가 선정한‘이달의 배우’박원상 (독문·88) 동문이다. 그는 극중 김종태 역을 맡아 모든 고문 장면을 대역 없이 소화하는 열연을 펼쳤다. 그를 만나 촬영장에서의 이야기와 1980년대 그의 인생을 들어봤다.

 

만나게 돼서 반갑다. <남영동 1985>가 개봉하면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이 영화 외에도 <부러진 화살>의 박 준 변호사 역, <와이키키 브라더스> 정석 역 등 다수의 작품에서 개성 강한 연기를 보여 줬 다. 학창시절엔 숭대극회에서도 활동했더라. 영화와 연극을 처음 만난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중학생 시절 학교에서 연극 단체관람을 가면 늘 강제로 따라 갔다. 맨 뒷자리에 앉으면 무대가 잘 보이지도 않아서 늘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연극은 나랑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어느 날, 우연히 소극장 초대권이 생겼다. 그때 처음으로 큰 극장이 아닌 소극 장에 가서 <관객모독>이라는 연극을 봤다. 굉장히 새로운 세계를 만난 듯 했다. 그 후로 소극장에서 연극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수소문했다. 영화 사에서 레코드 가게에 초대권을 몇 장씩 놓고 간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동네 레코드 가게 주인 누나에게서 계속 초대권을 얻었다. 그렇게 연극 을 보러 다니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원래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극단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고3 5월에 대학을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겨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우리 학교에 합격하자마자 입학식도 하기 전에 학교에 가서 연극반을 수소문 하고 다녔다. 그리고 찾아간 것이‘숭대극회’였다. 1988년도 신입생 환 영 공연에서 재학생이 아닌 신입생 신분으로 스텝 활동을 했다(웃음). 거 기서 4년 동안 20편 가까이 참여했다.

‘대학 가요제’에 참가해 은상도 수상했다고 들었다.
 그 시절 모두가 그랬듯이 나도‘대학 가요제에 나가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다. 어느 날, 연극반 87학번 임경화 선배가 나와 자신의 목소리가 잘 어울린다며 듀엣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선배들이 결혼할 때 축가를 부르 는 것부터 시작했다. 1993년도‘강변가요제’에 듀엣으로 나갔지만 당시 2심에서 떨어졌다. 아쉽더라.‘대학 가요제까지만 나가보자.’고 생각했 다. 당시 같은 노래로‘홍대창작가요제’와‘MBC 대학가요제’에서 수상 했다. 상금도 받았지만 그때 받은 돈은 술을 사느라 적자였다(웃음).

88학번이다. 하필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85년이 그맘때인데, 암울한 시대 상황과 달리 즐거운 대학생활을 보낸 것 같다.
 당시에는 연극계에서‘운동권 연극’이 대세였다. 그런데 내게는 그 공연물들이 굉장히 생경했다. 내가 좋아하는 연극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 념적 지향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 내가 좋아했던 연극, 내가 하고 싶 은 연극과 너무 달랐다. 그때 어떤 동기는 시위 현장 앞에 있다가 구속되 서 풀려나기도 했다. 학교를 제적당한 친구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걸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고 연극반에 계속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하지 못 한 게 미안하고 후회된다. 하지만 만약 다시 그 시절로 간다 해도 선택을 바꿀 것 같지는 않다. 그게 나인 것 같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내가 1학년 때, 우리 학교 인문대 학생 회장이었던 박래전 선배가 독재 항거의 의미로 분신을 했다. 그날 학교는 데모로 한창이었다. 우리는 연극을 상연중이었는데, 총학생회가 극장 에 들어와 연극을 중단해 달라더라. 당시 극회장이“지금 관객이 있으니 까 다 같이 묵념을 하고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모두가 몇 분간 묵 념을 하고 공연을 다시 했다. 이후 나는 박래전 선배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세월이 한참 흘렀다. 최근 <남영동 1985> 촬영을 잘 끝내고 인사 를 하고자 김근태 의원이 계신 마석 모란공원에 갔다. 그런데 입구에 박 래전 선배의 묘가 있었다. 정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살아오면 서 선배의 존재에 대해 잊고 있었는데, 그 묘를 보면서 잊었던 기억들이 하나둘 생각나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속해 있는 극단인 ‘차이무’는 주로 사회 풍자 코미디를 한다. 아마도 학창 시절 동기들에게 빚진 것 같은 느낌을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연기를 통해서 갚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영화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처음에 <남영동 1985>의 김종태 역을 제의받고 고민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내가 이 역할을 해도 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밖에서 친구들 이 시위를 할 때, 좋아하는 연극만을 위해 달렸다. 내가 이 역을 맡아서 관객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정말 하고 싶은 역 이었다. 내 안에서의 싸움 끝에 어금니를 꽉 깨물고 했다.
 끝나고 나니 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영화 한 편을 했다고 해서 이미 살아 왔던 시간들이 복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대신 기억 해야 할 것들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개인적으로 <남영동1985> 는‘기억’에 관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나에게 잊고 있었던 기억을 회 상시켜 주는 영화였다. 배운 게 많았다. 작품에 고맙다.

고문 연기를 대역 없이 모두 소화했다. 그런데 영화 속 고문 장면은 너무 고통스러워 보였다. 가장 힘들었던 고문 장면은 무엇이었나?
 고문 촬영 당시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간도 많이 지났고, 그 사이에 자꾸 그때의 경험을 잊으려 하기도 했다. 촬영 중간에도 한 신 한 신 오케 이가 되면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지웠던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촬영이 힘드니까. 가장 힘들었던 고문 장면은 첫 물고문 장면이다. 감독님이나 배우나 다들 고문 신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까 남영동과 관련된 증언이나 기록에 의지해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고문을 그대로 해보는 수밖에 없 었다. 맨 처음 온몸이 묶인 채로 누워 있는데 얼굴에 물이 쏟아졌다. 바로 NG를 냈다. 내 몸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너무 당황스러웠다.
 고문을 받는 중에 감독이 OK 사인을 언제 내야 할지를 몰랐다. 그래서 내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다가 한계에 다다르면 고개를 흔들어 신 호를 보내겠다고 했다. 그런데 약속한 사인을 보냈는데도 고문이 멈추지 않고 점점 강하게 들어왔다. 감독과 가해자 역의 배우 모두 내 신호를 연기로 오해한 거다. 그때‘이거 사고구나’하고 느꼈다. 죽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의 공포를 잊을 수가 없다.
 이후부터는 촬영 신의 평균 시간을 계산해서 촬영할 때 원하는 장면이 안 나와도 일정한 시간이 되면 고문을 무조건 멈췄다. 그러면서 조금씩 나도 적응됐다. 가장 마지막에 찍은 고춧가루 고문은 롱테이크로 갈 수 있을 정도까지 됐다.

영화에서 성기 노출도 감행했다. 부담감은 없었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고문이 옷을 벗기는 것에서 시작한다.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하나하나 해체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문 신을 촬영할 때 뭔가 걸치고 있는 것이 관객들의 집중을 흐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 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수위가 있는데, 아직 한국 사회에서의 성기 노출은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는 것이라 고민이 많았다. <박쥐>나 <은교>처럼 작품의 메 인 이야기와 상관없이 노출만 이슈화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고문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인만큼 꼭 필요한 장면이라 고 생각했다. 찍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故김근태 의원의 수기를 보면, 고문을 받을 때“라디오에서 들리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죽이고 싶었다.”고 했다. 비록 연기이지만 가해자 역의 배우가 실제로 미워 보이진 않았나? 연기를 마치고 후유증도 상 당했을 것 같다.
 촬영 초반에 주변 사람들이 점점 미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한 장면 한 장면을 죽을 것처럼 찍는데, 저 사람들은 컷하면 모여서 휴대폰으로 게 임하고 낄낄대고 간식을 먹고 하는 게 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그래서 스스로를 소외시켰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나를 끄집어내 주려 고 했다. 결국 촬영 중반부터는 쉬는 시간에 수다도 떨었다. 그러다가 “촬영합시다.”하면“예.”하고 옷 훌렁 벗고 고문 침대에 눕고 그랬다(웃 음). 내가 처음 감정을 계속 가지고 갔다면 끝까지 촬영을 못했을 거다.
 작품이 끝나고 인물을 털어 내는 건 언제나 시간이 걸리지만, 이번에는 특히 오래 걸렸다. 오죽하면 프로듀서가 정신과 예약해 줄 테니까 가 보라고까지 했다. 작품을 끝내고 바로 다음 작품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민폐 아닌 민폐를 끼쳤다. 작품을 같이 했던 동갑내기 친구 류승룡과 오달수 선배가 “우리가 알던 박원상이 안 보인다.”고 하더라. 최근 <남영동 1985> 무대 인사를 다니면서 관객들을 만나니까 그때의 기억이 또 떠올랐다. 사람 기억이란 게 참 질기고 질기다.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
 잘 먹고 잘 사는 배우(웃음). 농담 같지만‘가늘고 길게’가 내 인생 모토다. 지금은 내가 직업 배우로 살지만 대학생 때만 해도‘연극을 해야 지.’가 내 목표였다. 지금도 그렇다. 나 혼자 이름 붙인내직업은‘이야기 꾼’이다.
 이 일은 입사 시험도 없고 자격증도 없다. 그래서 그만두는 것도 자기 가 결정해야 한다.‘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먹고 살려고’라는 이유로 이 일을 하지 말자고 계속 생각한다. 어느 날 극장에 가기도 싫고, 촬영장에 가서도 재미가 없어지면 직업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영화와 연극에 오랫동안 재미를 느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가 출연했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어렸을 때 밴드의 꿈을 가진 사람들이 밴드를 함께 만들려고 하다가, 현 실의 벽에 부딪혀 하나둘 떠나간다. 영화중 결국 자살을 하는 인물이 아 직도 삼류 밴드를 하는 친구에게 가서 이렇게 말한다.“넌 행복하니? 넌 행복하지? 하고 싶은 거 하니까.”이게 내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다. 꼭 넥타이를 매고 회사에 다니는 것만이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과 감하게 자신의 것을 할 수 있는 멋진 후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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