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식집 아줌마의 9전 10기 도전, 그리고‘봄, 바람’소통
분식집 아줌마의 9전 10기 도전, 그리고‘봄, 바람’소통
  • 이지은 수습기자
  • 승인 2013.03.04 23: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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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식집 아줌마가 사법 고시생이 되기까지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을 보면 여러 전환점, 즉 터닝포인트가 있다. 그 터닝 포인트라는 것은 갑자기 요란 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고 조용하게 천 천히 다가올 수도 있다. 나도 인생을 살면서 전환점이 몇 번 있었다. 평범한 가정 주부에서 분식집 아줌마로, 분식 집 아줌마에서 사법시험 최고령 합격 자를 거쳐서 변호사로, 그리고 변호사 에서 다시 구청장으로.
 나는 경상도 시골 출신이다. 시골 학교는 공부를 조금 잘하면 모든 것을 다 시킨다. 그래서 웅변대회까지 나가게 됐는데 상을 받았다. 어른들이 “춘희 너는 커서 제2의 박순천이 될거야.”라 고 하셨다. 박순천 여사는 우리 세대에 유명한 여성 정치인이었다. 어렸을 때 에는 누군지 잘 몰랐지만, 그처럼 훌륭 한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마음속에 품고 자랐다.
 그러다 생활에 치여 꿈을 잊고 결혼을 했다.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던 중 경제적 어려움이 찾아왔다. 그래서 서 울로 올라와 모 대학교 앞에서 분식집 을 했다. 직업에 귀천은 없지만 예전엔 똑똑하고 유망한 아이로 평가받던 내 가 앞치마 두르고 분식 파는 걸 본 학 교 친구가 안타까워하고, 아버지도  딸의 이런 모습을 보기 싫다며 눈물을 흘리시곤 하는 모습을 봤다. 하지만 나는 당시 장사가 너무 잘됐다(웃음). 앞치 마에 받는 대로 돈을 넣었는데, 나중에 는 그게 수북히 쌓여서 땅에 떨어졌는 데 그것도 모르고 밟고 다닐 정도로 장 사가 잘됐다. 하지만 계속 바쁘다 보니 아이들을 챙길 수 없어서 부산에 있는 남편에게 아이들을 보냈다. 그랬더니 돈을 버는 의미가 없어지더라. 장사를 정리하고‘뭘 해야 할까’하는 생각을 하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어렵고 권 위 있는 시험이었던 사법시험에 도전 했다. 스스로가 얼마만큼의 능력을 갖 고 있는지 시험해 보자는 마음이 생겼 다. 당시 오빠도 변호사였고, 주변에서 비교적 쉽게 사법 고시에 합격한 사람 들을 많이 봤다. 그래서 겁 없이 사법 시험에 도전했다.

9전10기의 고시 공부, 결국 성공을 맛보다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만약 미래를 안다고 생각해 봐라. 내 미래가 행복할 거라는 것을 안다면 열심히, 성실하게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불행할 것을 알면 처음 부터 굉장히 불행한 삶을 살 것이다. 그래서 나는 미래를 모르는 게 행복이 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미래를 알았 다면, 그러니까 사법시험을 통과하는 데 십 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 다면 나는 도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 데 빨리 합격할 거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은 해냈다.
 당시 고시의 메카로 불리던 신림동 고시원에 들어갔다. 그리곤 삼박자 공부를 했다. 삼박자 공부란, 하나님 보 시기에 최선을 다하자,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내가 정말 열심히 했다는 객관 적 인정을 받자, 박춘희 스스로 보기에 후회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자는 거 였다. 그렇게 공부하고 시험을 보니 다 섯 번째 만에 1차에 합격했다. 2차에는 총 두 번의 기회가 있는데 첫 번째는 떨어졌다. 두 번째 시험을 치르기 전 날, 다섯 번의 도전으로 얻은 기회라는 생각에 잠을 못잤다. 결국 건강이 급속 도로 나빠졌다. 어느 날 고시원 식당에 서 반찬하고 국을 받다가 갑자기 쓰러 졌다. 온몸에 반찬을 뒤집어쓰고 그 자 리에서 기절했다. 한참 있다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은 다 편하게 잘 사는데 왜 나만 이렇게 고통스런 삶을 사는가.’하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그 후 2차까지 갔다가 다시 1차만 세 번을 더 떨어졌다. 정말 포기하려 했다. 그런데 사람이 포기를 하려고 하면 포기 못할 이유가 꼭 생기더라. 지금은 없어졌는데 당시에 사법시험 응시 횟수에 제한이 있었다. 우수한 인재들이 고시에 몰입하는 폐단을 없애고자, 1차를 연달아 4회 불합격하면 응시를 못하게 하는 제도다. 그때 나에게는 딱 한 번 기회가 남았었다. 마지막 기회를 포기하면 일생 동안 후회할 것 같더라. 다시 수험 공부를 했다. 결국 높은 점 수로 1차에 합격했다. 2차는 정말 마지 막 기회였다. 마지막 한 과목을 치르는 데 세 문제 중 두 문제에 답을 쓰고 나 니 온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하늘이 노래지고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라는 느 낌이 들었다. 그런데 만약 이 자리에서 쓰러지면 이제까지의 노력이 모두 물 거품이 된다고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 려고 물 한 잔 마시고 답을 썼다. 그리 고 신림동 생활을 청산했다. 합격자 발 표는 5시였는데 3시쯤 되니까 핸드폰 이 울리더라. 어느 신문사 기자였다. 내가 44회 사법시험에서 최고령 합격 자라고 하더라.

구청장이 되어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다
 그후 사법 연수원을 거쳐 2005년에 변호사로 개업했다. 그러던 중 2010년 에 기초자치단체장을 선출하는 지방 선거가 있었다. 당시 나는 한나라당의 공천 감시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송파구가 한나라당의 여성 전략 공천 지역으로 지정돼 있었는데 송파구에 출마한 여성 후보가 없었다. 당시 위원 장이 나보고 송파구청장에 나가라고 하더라. 우스갯소리로 넘겼는데, 그뒤 에도 몇 번이나 추천하더니 결국 인재 영입위원장에게 나를 추천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부랴부랴 자기소개 서와 이력서를 만들었다. 면접을 봤는 데 경력이 전무하니 반대 여론도 있었 다. 누군가는“행정 무경험에 지지기 반도 없어서 안 된다.”고 했고 또 누군 가는“9전 10기의 의지의 한국인이라 는 것을 높이 샀다. 행정 경험은 주변 관료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면 된다.”고 말했다. 상대당 후보와 여론조사를 했 더니 내가 근소한 차이로 앞섰더라. 결 국 후보로 공천을 받고, 선거에서 이겨 송파구청장으로 당선됐다.

바라는 것을 보는‘봄 바람’소통
 변호사 생활과 다르게 구청장직은 폐쇄적이고 딱딱했다. 직원들이 예의 바르고 깍듯했지만 도무지 속을 알 수 가 없었다. 또한 69만 명의 주민들을 좀 더 행복하고 신바람 나게 만들기 위 해서 뭘 해야 될까에 대한 고민도 있었 다. 내가 찾은 답은‘소통’이었다.
 주민들과 원활히 소통하기 위해 첫 번째로 저소득층 주민들의 애로사항, 건의사항을 들었다. 또한 주민들끼리 소통을 위해 전국에서 최초로‘트위터 반상회’를 시도했다. 최근에는‘오후의 수다’라는 이름으로 각 동을 돌며 자치회관의 문화 프로그램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직원과의 다양한 소 통을 위해‘밥상머리 소통’이라는 이 름으로 1400명의 송파구 공무원들과 모두 돌아가면서 식사했다.
 나의 책 <춘희의 봄, 바람 소통>의 제목에 있는 ‘봄’은 보다의 명사고 ‘바람’은 바라다의 명사다. 진정한 소통 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바람, 욕 구, 희망을 제대로 보고 소통해야 한다 는 의미다. 이솝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바람과 태양이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 을 벗기는 시합을 한다. 강하게 바람 을 불었더니 나그네는 오히려 옷깃을 더 세게 여몄다. 반면 태양이 따뜻하 게 내리쬐니까 나그네는 스스로 옷을 벗었다. 강한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 다. 따뜻함이 때로는 강함을 이길 수 있다. 이게 바로 부드러운 소통의 리 더십이다. 만사형통하길 원하면 만사 소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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