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의 정형돈, ‘라인업’의 윤정수, 개그콘서트 ‘까다로운 변선생’의 이종훈.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다들 그 프로그램 내에서 ‘존재감’이 없는 캐릭터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존재’가 그들을 프로그램 내에서 살아있게 만든다. 시청자들은 이들 캐릭터를 보며 ‘뭐 저런 사람들이 다 있지?’라고 생각하기보다 ‘맞아, 저런 일이 있지’라며 공감한다.

 

왜 '존재감' 인가


존재감은 현 시대를 읽는 하나의 키워드다. 인터넷의 고민상담 게시판에는 자신의 존재감이 없어서 고민이란 내용을 자주 찾을 수 있다. 영화, 드라마, 혹은 그룹가수 내에서 존재감 없는 사람을 찾아보자고 하면 수많은 댓글이 달린다. 그 댓글 밑에는 종종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라는 고백이 달리기도 한다. 최근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쓰이는 이 ‘존재감’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는 '사람, 사물, 느낌 따위가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느낌'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 뜻은 추상적이고 현학적이라 일상생활과는 멀리 떨어져있을 것만 같은데, 왜 이토록 우리의 현실과 가까운 단어가 된 것일까?


삶은 곧 존재감과의 싸움


실제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면 그 답을 쉽게 알 수 있다. 학창시절부터 사회인이 될 때까지 우리의 삶은 곧 존재감과의 싸움이다. ‘까다로운 변선생’ 이종훈 캐릭터를 보는 우리는 공감하는 한편으로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는 의식을 이면에 품고 있다. 혹은 존재감과의 싸움에서 실패한 그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장 우리의 학창시절을 떠올려보자. 중고생의 생활 반경이 가정과 학교로 매우 좁다. 그 안에서 입지를 찾지 못할 때의 불감은 상당한 스트레스다. 친구들로부터 ‘소외’를 당하지는 않을까 두려워 끊임없이 사교성을 키운다. 웃기는 캐릭터든 자조하는 캐릭터든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경우가 많아지는 대학생의 경우에는 상황이 조금 유연해진다. 그렇다고 마냥 편한 것은 아니다.

 

▲ KBS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개그콘서트 '까다로운 변선생'의 이종훈.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존재감 없는 캐릭터가 그의 존재감을 부각시킨다.

친구들이 많든 적든 ‘존재감’에 대한 공포는 여전하다. 인맥이 넓어도 사람들의 관계가 피상적이라 느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잦다고 한다. 미니홈피처럼 각종 수치를 통해 인기도를 판단할 수 있는 요즘은 더욱 그렇다.


나는 남들에게 어떤 존재인가


이는 주부도 마찬가지다. 특히 주부의 경우에는 일상 생활에 자신이 매몰돼 존재감을 잃는데서 큰 스트레스를 느끼는 경우가 잦다. 이제는 수많은 주부, 아줌마 중의 하나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일을 찾거나 집안일 외에도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일에 집중하려 한다. 소위 ‘미시족’ 아줌마들이 늘어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재는 자기성찰의 시대


과거에 비해 현재는 분명 ‘존재감’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남들과 다르지 않기’를 추구했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특별’하지 않으면 존재감이 쉽게 옅어진다. 게다가 젊은 세대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가정에서 더 많은 애정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존중받고자 하는 욕망이 더 강하다. 하지만 사회로 나오며 그 욕구는 충분히 채워지지 않게 되는데, 이 또한 존재감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나에게 나를 묻자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존재감에 대한 고민이 넘쳐나는 현재를 이해하려면 자기의식(self-consciosness)의 개념을 알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자기의식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스스로의 행동, 성격 등을 이해하는 과정이며 사적(private) 자기의식과 공적(public) 자기의식으로 나뉜다. 전자는 타인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욕구에 모든 사고의 초점을 맞추는 유형을, 후자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없이 늘 타인의 반응을 살피는 유형이다. 자기의식 유형 이론에 따르면 존재감이 없는 사람은 전형적인 공적 자기의식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공적 자기의식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적극 권장되는 편에 가까웠다. 지도자보다는 관료가 필요했던 시기였던만큼 개성을 강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사회가 원하는 상에 맞추는 편이 긍정적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사회 자체가 다원화된 지금, 더 이상 사회가 원하는 상은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 지금은 누군가에게 나를 묻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나를 물을 때다. 존재감 있는 자신을 원한다면 타인보다는 자신에 초점을 맞추고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의 나를 표현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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