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게 길을 묻다 ①
<연극>





▲ 박연숙 교수(교양 특성화 대학)
국가의 명령과 신의 뜻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경우라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국가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끔찍한 죽음이, 신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양심이 괴로울 테지요. 양심이 괴로운 것은 당장 벌어지는 재앙이 아니므로 죽음을 피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혹여 누군가가 국가의 명령에 저항하고서라도 신의 뜻을 따르겠다면 그는 대단한 용기와 믿음의 소유자일 것입니다. 여기 그런 용기와 믿음을 지닌 사람이 있습니다. “꺾이지 않는” 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안티고네’가 그 주인공입니다.


안티고네는 권력 싸움으로 서로를 찔러 죽인 두 오빠들의 시신 중 둘째 오빠의 시신에 대해 매장을 금지하는 명령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명령은 죽은 오빠들을 대신하여 왕이 된 외삼촌 크레온이 내린 것입니다. 크레온은 테베를 통치하다 죽은 큰오빠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주지만 적국과 합세하여 테베를 공격하다 죽은 둘째 오빠의 시신은 국가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여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이 뭉개진 채 그대로 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내버려두게 한 것입니다.


안티고네는 이것이 국가의 명령이라고는 하지만 신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불문법에 따르면 죽은 자의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죽은 자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신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오빠의 시신을 매장하겠다는 안티고네의 결심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죽은 자를 묻기 위해 살아 있는 자가 생명을 내 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 학전 블루에서 공연하는 국민 레파토리 보레나비 공연
결국 안티고네는 묻어서는 안 될 시신을 묻으려다 붙잡혀 크레온에게로 끌려옵니다. 크레온은 귀여운 조카이자 장차 며느리가 될 그녀를 살려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또 다시 시신을 묻겠다고 저항합니다. 이 저항은 국가의 기강과 권력을 뒤흔드는 대단히 위태로운 것입니다. 안티고네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자 크레온은 어쩔 수 없이 안티고네를 돌무덤에 가둬 굶어 죽도록 명령하지요.


기원전 441년의 비극,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을 묘사하며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작품입니다. 최근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는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파리에서 공연되면서 당시 독일 지배에 타협하기를 거부하는 ‘저항적’ 인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면 현재의 우리에게 안티고네는 어떤 인물일까요? 고도의 물질문명에 적응하며 사는 사람들은 신의 뜻에 따르기보다 현실적 이익을 추종하고 권력에 저항하기보다 순응하는 편이지요. 신에 대한 믿음도 정의를 위한 용기도 생존과 풍요 앞에서는 하찮은 것이 되고 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안티고네보다는 크레온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라 할 수 있어요. 현실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신의 뜻에 거역하기도 하고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외면하기도 합니다. 크레온 같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생존하는 것이며 더 잘 사는 것뿐 이지요.


안티고네는 단지 ‘살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깨달은 인물입니다. 깨달음을 실천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 자신을 내놓을 만큼 용기 있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그녀의 용기는 그녀가 아직 어리고 철이 없어서도, 남달리 죽음이 두렵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차이는 오로지 해야 할 바를 하도록 명령하는 마음 속 소리에 귀기우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그 소리에 따르기 위해 생명까지 내놓는 용기는 그 만큼 순결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리석을 만큼 반항적인 그녀의 이름을 떠 올리면 가슴 저린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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