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평양 숭실인가

 

 예부터“사람은 태어나면 한양으로 보내고, 말은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라”고 했다. 한양, 곧 서울은 예나지금이나 모든 것의 중심이다. 정치·경제·문화·교육 등 우리 사회 전반을 움직이는 중심지가 한양이라ㄴ,는 말이다. 19세기 말 서양 선교사들 역시 각지에서 선교활동을 펼쳤지만, ‘선교 본부’는 당연히 한양에 두었다.
 그런데 숭실대학을 설립한 윌리엄 베어드는 이 땅 최초의 대학이 될 학당을 한양이 아니라 평양에 세운 것이다. 우연한 선택일까. 단지 기독교가 다른 지방에서와는 달리 서북지방에서 빠른 성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평양을 선택한 것일까.
 구한말 조선은 유교(주자학) 사회였다. 1392년,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창건하고 주자학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그 후 지배 엘리트들은 정치·경제·문화·교육 등 모든 분야를 주자학에 더해 재구성했다. ‘유교화’된 이 사회에서는 주자학을 공부하고 과거시험을 쳐서 관직에 오르는 것이 학문과 교육의 목표였다. 바로이런 풍토를 비판하고 나선 것이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다. 그들은 관리가 되기 위한 주자학 교육과 학문을허학이라 부르며, 실사구시의 학문과 교육을 추구하였다. 그러니까 한양은 주자학 질서의 중심이자 양반지배체제의 중심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인문학적 상상력을 한번 발휘해 보자. 이 주자학 지배질서의 변방이 바로 평양이 있는 서북지방이었다. 그렇다면 윌리엄 베어드가 평양을 숭실의 터로 삼은 것은 주자학에 맞서 기독교를 좀 더 자유롭게 전하고, 관리지향 교육에 맞서 섬김의 리더를 펼치기 위함이 아닌가. 남 위에 군림하고 으스대며 뻐기는 관리가 아니라, 참으로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 줄 아는‘삶의 지식인’을 길러내려는 뜻으로 평양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역사는 기억이고 기록이지만, 또한 해석 작업이기도 하다. ‘평양숭실’을 해석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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