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대학이 우리나라 고등교육의 선두주자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지 1897년에 학당 문을 열고 1905년 대학부를 설치해 1908년 대한제국 학부의 인가를 받은 첫 번째 대학이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여느 대학이나 전문학교와 달리, 1938년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 문을 닫기까지, 이 땅에서 최고의 교수진과 최고의 시설, 무엇보다도 학생들을 섬기는 대학으로, 다른 후발 대학들의 본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1910년 초에 이르면 3층 벽돌 양옥건물을 중심으로 체육관, 강당, 기숙사, 기상대, 박물관과 도서관, 음악미술관, 기계창, 교수사택, 과학관이 즐비하게 들어선 최고 대학 캠퍼스를 자랑하였다. 필수인 성서를 비롯하여역사학, 경제학, 철학, 사회학, 생물학, 화학, 법학, 심리학 등을 설립자윌리엄 베어드를 비롯, 사무엘 마펫, 그래함 리와 같은 당대 최고의 교수진이 가르쳤다. 이들은 하노버나 파크대를 졸업한 후 맥코빅이나 유니온 또한 예일대에서 대학원 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다. 1920년대에 이르면 미국과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한국인 교수들도 등장한다. 김효연(화학)과 이종희(역사학, 사회학)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숭실 교수가 되었고, 조만식, 이용규, 김항복 등이 일본 등지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숭실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숭실은 학생 중심 대학이었다. 이를테면, 1927년 5월 통계에 따르면 학생 1인당 경상비가 연희(현 연세대)가 561원, 이화가 363원, 보성(현 고려대)가 971원인데 숭실은 1,050원이었다. 이처럼 학생들을 중심에 두고 그들을 섬긴 대학이었다. 학생 한 사람을 위해 쓴 재정이 다른 학교와 큰 차이로 높게 나온 것은 숭실의 교육이 양이 아니라 질에중점을 두었다는 증거다. 우리의 숭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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