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 동문(철학·64)은 어린 나이에 6·25 전쟁으로 고아가 됐고, 두 눈의 시력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참된 리더가 되기 위해 배움의 필요성을 느껴 숭실 중·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했다. 박사과정의 공부를 마치고 명예박사 학위까지 수여받았으며, 호암상·막사이사이상·국민 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했다. 이후 다른 이들의 눈이 되어주고자 실로암 안과병원을 설립해 현재까지 3만 7천여명의 시각장애인들에게 시력을 되찾아 주었으며, 리무진에 움직이는 안과 병원을 만들어 전국 각지, 나아가 세계 여러 나라의 소외된 지역에 의료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서면과 전화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삶 이야기를 들어봤다.
 

  6·25 전쟁으로 인해 부모님을 잃고 두 눈을 실명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상황이 어땠나요?
  전쟁으로 인해 당시 서울 시내는 피난을 가다 버려진 아이들이 수없이 많았고, 배가 고파 우는 아이들, 남의 집 앞마당에 구덩이를 파고 그 곳에 아이를 넣어 버리고 간 부모도 있었어요.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가기 위해 끊어진 한강다리를 건너다 밀려서 강물에 빠져 죽는 끔찍하고 비참한 일들도 빈번했죠. 저도 친구들과 놀다 배가 고파 집에 오니, 집이 폭격으로 인해 무너져 있었어요. 부모님을 목메어 부르며 온 동네를 찾아다녔지만 어디에도 부모님은 없었어요. 저는 부모님을 잃어 고아가 됐고, 참외와 수박을 따 먹으러 뚝섬으로 간 날 두 눈을 잃었어요. 함께 있었던 친구 7명은 수류탄이 터져 모두 목숨을 잃었고, 저만 살아남았어요. 혼자 살아남은 저는 하루 아침에 실명을 하게 돼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어요. 목이 말라 땅을 기어 다니며 논바닥에 고인 흙탕물을 마시고, 배가 고파 풀을 뜯어먹고, 많은 인파속에서 사람들에게 짓밟히기도 했어요. 그러던 중 어렵게 찾아간 고모 집에서는 앞을 보지 못해 도움이 안 된다며 푸대접을 받고, 학대와 핍박을 당했어요. 이를 견디지 못해 도망 나와 전국을 헤매며 2년 반 동안 거지생활을 했는데, 얼어 죽고 병들어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기고 선배 거지들로부터 매를 맞기도 했어요.

 

숭실에서 희망을 얻다

 

  목사님의 학창시절이었던 1960년대는 시각장애인들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 있지 않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보통 시각 장애인들은 맹학교에서 공부하는데, 일반 학교인 숭실 중·고등학교를 다닌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실명이 된 후 부산에 위치한 맹학교를 다녔어요. 당시 그 학교는 빈부 격차에 따른 차별대우와 교사들의 횡포가 심했어요. 뿐만 아니라 맹학교를 다니면 결국에는 안마사와 같은 직업을 갖게 되는 것이 현실이었죠.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맹학교가 아닌 일반학교를 다니게 해 달라고 매일 새벽마다 부산 바닷가에 나가 파도소리를 들으며 기도했어요.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 왔을 때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숭실 재단과 관련이 있는 옥호열 선교사님이 학비에 도움을 주셔서 일반 중·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됐어요. 한편 제가 공부할 당시에는 시각장애인이 공부할 수 있는 점자 교과서나 환경이 마련돼 있지 않았어요. 그러나 저는 공부를 해야 지도자가 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죠. 당시 저를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의 가르침과 친구들의 도움이 저에게 큰 힘이 됐어요. 선생님께서 판서하신 것을 친구들이 일일이 불러 줘 노트에 점자로 필기했고, 방과 후에는 교과서를 일일이 점자로 찍기 위해 친구들이 읽어주는 대로 받아 적었어요. 친구들과 함께 영어단어를 외우고 수학 문제를 풀면서 밤 1시까지 공부했지요. 성실하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유일한 시각장애 학생으로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숭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본교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거지 생활 당시 살려만 주시면 열심히 공부하여 목사가 되겠다고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목사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우선 철학을 전공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또한 넓은 통찰력과 깊은 생각을 하고, 다양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공부해야 무게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철학을 전공하게 됐어요. 철학을 사고함으로써 신학을 하는데 큰 힘이 됐고, 연구하면 할수록 진주와 같은 알찬 진리를 발견하게 됐어요. 모든 학문의 기초는 철학에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겪은 어려움과 고난, 절망을 통해 얻은 교훈들이 철학을 사고하는데 밑거름이 됐어요. 지금도 철학 관련 서적은 자주 읽고 있어요.  

  본교에서 생활하면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대학시절의 추억은 너무나도 많아요. 저녁 식사 후에는 친구들과 함께 뒷산을 산책하며 합창도 하고, 연중 2회 진행되는 운동회에 참여해 100m 달리기도 해 보고 공도 던져 보고 캠퍼스의 잔디밭에 누워 강렬한 햇볕을 쬐며 우리의 희망은 저 하늘의 태양처럼 밝을 것이라며 대화하던 날들이 아직도 선해요. 뒷산에 올라 밤도 따고 도토리도 줍고, 신입생 환영회 때는 개그맨 역할도 하고 하모니카 연주도 했던 아름다운 추억이 지금도남아있어요.  힘들었던 기억도 있어요. 일반인들과 달리 저는 앞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체육 수업은 저에겐 매우 힘든 과목이었어요. 당시 숭실대학교는 후암동에 있어 남산 한 바퀴를 돌며 마라톤을 했는데 저는 친구의 도움으로 그의 팔을 잡고 달려 완주할 수 있었어요. 농구공 넣기 시험이 있을 때는 다른 이들이 10번 연습할 때 저는 100번 연습하여 만점을 받았어요. 물론 다른 학생들과 동등하게 넣을 수는 없었지만, 시험 전 몇 개 이상 성공을 시키면 좋은 점수를 주겠다고 선생님과 약속을 해 열심히노력해 이뤄냈죠.

 

장애를 뛰어넘은 삶

 

  목사님은 본교 졸업 후 목회학 박사·명예철학 박사·명예신학 박사의 3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의 남성 헬렌 켈러라 불리고 있습니다.힘든 상황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자 한 동기가 무엇인가요?
  초등학교 4학년 국어책을 통해 헬렌 켈러를 처음 알게 됐어요. 그녀는 앞을 보지 못했고, 듣지 못하고 말도 할 수 없는 세 가지의 장애를 갖고 있어요. 그런데도 열심히 노력해 세 개의 박사학위를 따냈고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다는 글을 본 후하나님께기도했어요. ‘하나님, 그녀는 세 가지의 장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세 개의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가지의 장애만 있을 뿐입니다. 저에게도 그와 같은 은혜를 내려주옵소서.’ 이렇게 매일 쉬지 않고 근 60년간을 꾸준히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그기도를들어주셨어요.

  명예 박사 학위를 받은 것 뿐만 아니라, 호암상·막사이사이상·국민 훈장 모란장 등 많은 상을 받으셨습니다. 어떤 일을 하셨기에 이렇게 큰 상을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시각장애인 사회가 발전하려면 시각장애인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중·고등학생, 대학생, 대학원생 등 천여 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고, 현재도 이러한 장학 사업은 진행 중이에요. 또한 실로암 안과병원을 세워 수만 명에게 개안수술을 통해 빛을 찾아 주었고, 수십 만 명에게는 사랑의 무료안과 진료를 통해 실명 예방을 해 줬어요. 그리고 복지관을 세워 수술 후에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에게 재활 훈련을 통해 일상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고, 노인들을 위한 요양원도 세웠어요. 또한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회를 만들고 점자성경과 찬송가를 10만부를 후원했어요. 이는 제가 부유해서가 아니라 도움을 주시는 많은 분들의 기도와 헌금 덕분에 가능했어요.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상들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해요.

  현재 목사님은 실로암 안과병원 병원장으로어려운 이들의 개안수술을 돕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개안수술을 하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전쟁으로 눈을 다쳤을 당시 바로 치료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시간이 흘러 수술을 해도 큰 효과가 없을 가능성이 컸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만약 수술울 통해 눈이 밝아진다면, 지금 하는 일을 못할 것 같아요. 저와 같이 보지 못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대변하고, 희망을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세상을 보고 싶었지만 저는 포기했어요. 보고 싶은 욕망을 버리고, 시각장애인들의 선교, 장학사업 등 복지사업에 삶을 바쳤어요. 그래서 지금까지수술을하지않았어요.

  앞으로의 꿈과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지 말씀해주세요.   
  작게는 물질의 축복이 허락된다면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 기도와 후원을 하며 용기와 희망을주는 삶을 계속 살고 싶어요. 그리고 더 열심히 노력하여 하나님의 뜻이라면 노벨상까지도 받았으면하는꿈과목표가있어요. 그리고 숭실대학교에서 세상을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고, 바른 마음을 갖고 열심히 공부해 불안한 세상을 평화의 세상으로 바꿔놓는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라요. 그러기 위해서는 젊음을 낭비하지 않고, 순교의 정신을 갖고 공부해 실력 있는 학생들이 되었으면 해요. 독립 운동가인 조만식 선생과 숭실의 역사인 한경직 목사님보다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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