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일(수) 제23회 호암상 부분별 수상자 여섯 명의 명단이 발표됐다. 호암상은 삼성그룹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 선생의 인재제일주의와 사회공인정신을 기려 만든 상이다. 올해 수상자 명단에는 소설가 신경숙 씨와 미국에서 교수로 활동 중인 세 명의 박사들의 이름이 올랐다. 그 가운데 호암상 사회봉사상 수상자로 김현숙(사회복지대학원·07졸) 직업재활교사가 선정됐다. 김 교사는 남편인 이종만 유은복지재단원장과 함께 최초 부부 수상자가 됐다. 유은복지재단에서 가슴으로 낳은 장애인 가족들과 함께하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유은복지재단은 어떤 단체인가요?
  2002년 6월 11일에 설립한 사회복지법인이에요. 현재 법인에서 장애인근로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경상북도에서는 최초예요. 장애인 근로사업장은 사회로부터 일방적인 도움을 받거나 시설에 수용되어 보호만 받던 장애인들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땀 흘려 일해서 최저임금 이상의 수입을 얻도록 도와주는 사업장이에요. 장애인들이 그 정당한 대가를 누리며 비장애인들과 함께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통합되도록 돕는 것이 궁극적인목적이죠. 아울러 사회적 약자인 새터민, 고령자, 장기 미취업자들에게도 일자리를 제공하고 얻은 이익들을 다시 나눔으로써 더불어 살아가는 밝은 사회를 만드는 사회적 기업이기도 해요. 우리 부부가 죽은 후에도 누군가에 의해서 공동체의 운영이 계속 이어지도록 우리 부부의 개인 재산 7억 원을 출연하여 재단을 설립하게 됐어요.

 

내 몸 하나로 백 개의 행복을 만들 수 있다

 

  숭실대학교와는 어떤 인연이 있으신가요?
  숭실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동문회 부회장으로 활동했을 만큼 학교와 인연이 깊어요. 이효계, 김대근 전 총장님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적도 있고요. 이번에 호암상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 한헌수총장님과 배임호 사회복지대학원 원장님이 축하 화분도 보내주셨어요. 숭실대학교 대학원에서 제가 품었던 소중한 꿈들이 구체적으로 싹을 틔우기 위한 밑거름을 쌓는 시간들을 보냈어요. 다시는 오지 못할 유익하고 보람된 시간들이었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요.

  장애인들과 함께하기 시작한 동기가 있을까요?
  동기라는 표현보다는 왜 나는 말을 할 수 있게 태어났을까? 왜 나는 볼 수 있게 태어났을까? 왜 나는 정신이 온전하게 태어났을까? 하고 늘 생각했어요. 하나님께서 제게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혼자 향유하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장애인들처럼 저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라는 뜻이라고 믿어요. ‘내가 그렇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행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장애인 근로사업장을 직접 운영하게 된 이유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안동지역은 낙동강 자연보전을 이유로 공업관련 산업시설이 전무했어요. 비장애인도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웠죠. 해마다 졸업시즌이 되면 졸업을 맞은 농아인들의 구직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됐어요. 저는 안동농아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남편과 함께 서울, 대구, 부산 지역을 돌아다니며 농아인들의 취직을 도왔죠. 하지만 막상 취업을 시키고 난 후 심각한 문제들이 일어났어요. 농아인들이 의사소통이잘 안되다 보니 싸움이 일어나 형사사건으로 연루된 일도 있었고 월급을 못 받은 경우도 있었어요. 취직을 시켜놓고 나중에 방문했는데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동거를 하고 있었던 농아인도 있어요. 옥탑방에서 아기들과 간신히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건 도저히 사람의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서로 의지하며 오순도순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죠. 학교를 퇴직하고 받은 퇴직금에 우리 부부의 형제와 지인들의 도움을 더해 안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했어요.

  봉제공장을 운영했다고 들었는데요. 봉제공장은 어땠나요?
  제가 경영에 대해서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일터만 만들면 그만인 줄로 알았어요. 무식하니 용감하다는 말처럼오직 신앙과 열정만 가지고 시작했죠. 지금 돌이켜 보면 어떻게 그랬나 싶어요. 초기에는 일감도 구하기 어려웠고 작업에도 어려움이 있었어요. 농아인의 경우 수화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잖아요. 그런데 수화를 하려면 손과 눈이 필요해요. 의사소통하는 동안 작업이 느려져서 생산 목표를 달성하기가 어려웠어요. 한 달에 1700장의 옷을 생산하며 겨우 지탱하고 있었는데 1997년 IMF 경제 위기가 와서 일감이 3분의 1로 줄더군요. 앞이 캄캄했죠. 갑자기 다가온 큰 위기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편과 이탈리아로 야반도주할 생각까지 했었다니까요. 이후 눈물을 머금고 함께 일하던 86명 중 절반 가량을 구조조정으로 내보냈어요. 하루하루 뼈를깎는 듯한 고통의 나날들이었지만 그래도 버텨냈죠. 1999년도 초부터 놀랍게도 일거리가 몰려와서 위기를 넘겼어요.

 

고난 끝에 비로소 찾아온 행복

 

  새싹농장으로 업종을 바꾼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시 봉제 산업은 저임금의 개발도상국가들로 일거리가 옮겨가고 있었어요. 한마디로 사양산업이죠. 그리고 봉제공장 경영이 어려움에 빠지면서 더 이상 운영해갈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기 위해동분서주했어요. 마침내 일본에서 새싹사업의 아이디어를 얻어 친환경농산물 재배사업을 시작했죠.

  현재 새싹농장의 상황은 어떤가요?

  사업 초기에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지금은 꽤나 안정적이에요. 현재 재배하고 있는 각종 새싹, 어린잎 채소, 콩나물은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농산물 우수관리제도인 GAP 인증과 경상북도 우수농산물 인증을받았어요. 식품안전경영시스템인 ISO22000 인증도 받았어요. 직원도 많이 늘어서 현재 새터민을 포함한 비장애인들과 청각언어장애인 13명, 지적장애인 29명, 자폐성장애인 2명, 지체장애인 2명, 정신장애인 1명, 뇌병변장애인 1명, 총 79명이 함께 일하고 있어요. 매출도 2011년에 20억, 2012년도에 23억 3천만 원을 기록해서 1년 만에18%나 상승했어요.

  재단을 운영하면서 느끼는 보람은 무엇이 있을까요?

  한두 가지가 아니죠. 먼저 전국 어느 시설의 장애인들보다 저희 가족들이 해외여행을 많이했을 거예요. 이탈리아, 이집트, 이스라엘, 싱가포르, 태국, 홍콩, 일본, 러시아 등 많은 나라를 함께 다녀왔어요. 여행을 하면서 장애인들의 얼굴에 밝은 표정이 스며드는 것을 보면 보람을 느껴요. 장애인 가족들이 야간대학 졸업식을 맞이했을 때나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처음 공동체에 들어왔을 때는 어두웠던 장애인이 점점 활기를 찾는 모습을 볼 때도 벅찬 보람이 다가와요. 장애인 한 사람의 아픔은 삼대에 이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 장애인들의 부모님들은 흔히“내가 자녀보다 하루 늦게 죽는 것이 소원이다.”라는 말을 해요. 그랬던 부모님들이 장애인인 자녀가 열심히 일해서 저축한 돈으로 결혼을 할 때 감격해서 우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에요.

  호암상 수상소감이 궁금합니다.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두 눈에 이슬이 맺혔어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남편의 두 눈에도눈물이 핑 돌았죠. 아직도 꿈 같아요. 여러 모로 부족함이 많은 저희 부부가 이런 과분한 상을 받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있어요. 또 유은복지재단의 모든 가족들은 물론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고 있는 분들에게도 감사해요. 저에게 싹튼 소중한 꿈이 영글어 갈 수 있도록 귀한 가르침을 주신 숭실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의 교수님들을 비롯한 숭실대 모든 가족들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어요.

 

나보다 약한 이들을 위한 삶을 살아라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장애인 복지의 꽃을 직업재활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더 활성화시켜서 더 많은 장애인들, 그들의 부모님들과 자녀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주는 작업장을 만들고 싶어요. 장애인들이 당당히 세금을 내며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 떳떳하게 살아가는 데 밑거름이 되는 시설로 재단을 육성해 나가고 싶어요.유대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탈무드에 보면,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스스로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줘라’는 말이있어요. 보호와 수용일변도의 우리나라 장애인복지 정책이 하루빨리 바뀌어서 장애인들이 인간다운 삶의 누리며 스스로 사회의 소중한 이웃이 될 수 있게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싶어요.

  본교 학생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까요?

  저는 사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지만 정작 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쓰는 이가 없다고 생각해요. 저도 단순히 문제를 제기하는 한 사람으로 서성이다가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구체적으로 장애인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 하는 고민들을 많이 했어요. 기독교에 뿌리를 둔 숭실대학교는 하나님의 세워 주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재들을 위한 교육기관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숭실대학교의후배들의 삶이 누군가의 필요를 위해 준비하고 누군가의 필요로 존재하기를 부탁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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