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국경을 넘어 긴 기차 여행의종착점이었던 그리스 아테네.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헤라클레스의 후예처럼 보였고, 노천카페에 앉아 있는 여자들은 다들 아프로디테 여신의 딸 같이 우아했었다. 언덕이 많은 아테네를 황급히 걸었을 때, 하늘에서는 인간의 모습을 한 신들이 인간을 징벌하기 위한 회의를 하고, 땅에서는 신에게 대적하기 위해 전략을 짜는 강인한 인간들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시민 소통의 장 아고라, 올림픽 경기장, 제우스 신전을 거쳐 리카비토스(Lykavittos) 언덕에 오른 나는 서양사학 내지는 고고학 박사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버렸다.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누구에게라도 여기서 눈으로 본 것을 내 방식대로 표현하고 싶게 만드는 도시가 아테네다. 아테네는 모든 것이 처음인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돈 잘 벌고 악랄하기로 유명한 유대인 상인마저 그리스 상인과 악수를 하고나서는 악수한 손이 아직 몸에 달려있는지를 확인한다는 우스갯소리가 경제적으로 너무 안 좋은 지금의 그리스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것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리스가 당면한 이런 경제적 어려움이 무분별한 포퓰리즘의 결과라는 사회과학적 판단과는 전혀 상관없이 19년 전의 아테네는 내 인문학 공부의 시작이었으며 신의 영역까지 나의 상상력을 확대시켜 준 무대였다.
그리스 국기 안에 있는 하얀 십자가는 마치 내 상상력을 동서남북으로 실어 날라주는 통로같이 보일 정도였다. 물론 나중에 그 하얀 십자가는 이슬람국가 터키로부터 독립한 기독교 국가 그리스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언젠가 아테네에 다시 가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주 천천히 걸어보고 싶다. 하나라도 놓치는 것이 아까워 숨가쁘게 걸었던 예전과는 다르게. 오랫동안 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동반자가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나 또한 동반자의 이야기를 오래 들어줄 것이다. 아테네는 혼자보다는 둘이 다니면 더 좋은 도시다.
스토리텔링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아테네를 권한다. 곳곳에 서린 문명의 그림자가 상상력의 융단을 깔아줄 것이다. 아테네는 이야기의 발원지가 될 것이고, 그 이야기는 계속 살이 붙어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할 것이다. 마치 무수한 신과 인간이 벌이는 신화보다 더 멋진 작품이 나올 지도 모른다. 그리스가 겪고 있는 지금의 아픔은 거만한 인간들에게 화가 난 신들의 일시적인 질투였으면 좋겠다. 문명의 유산 파르테논 신전에서 아테네 시내를 바라다보며 이제는 문명이 아닌 활력을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