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 회 의 사 당 이 있 는 신 타 그 마(Sintagma) 광장에서 연일 계속되는 시위대의 농성을 보고 있노라면 참담한 느낌이 든다. 서양 문명의 발상지에 사는 자존심이 아주 높은 사람들이 단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거리로 몰려나와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은 상상이 안 된다. 아니 상상하기도 싫다. 그러나 저 높이 신을 영접하기 위해 서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시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한 모습을 보고 울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던 그들의 선조에게 현재의 아테네 시민들은 뭐라고 말할 수 있을 까.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그들의 대표자는 모든 구성원들이 만족할 만한 정책을 의결했던 장소가 이제는 직장을 잃은 사람들의 구호로 가득차 버렸다. 내가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하루 종일을 보냈던 파르테논 신전은 애처로운 표정으로 도시의 암울한 분위기를 삼킨다.

  터키의 국경을 넘어 긴 기차 여행의종착점이었던 그리스 아테네.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헤라클레스의 후예처럼 보였고, 노천카페에 앉아 있는 여자들은 다들 아프로디테 여신의 딸 같이 우아했었다. 언덕이 많은 아테네를 황급히 걸었을 때, 하늘에서는 인간의 모습을 한 신들이 인간을 징벌하기 위한 회의를 하고, 땅에서는 신에게 대적하기 위해 전략을 짜는 강인한 인간들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시민 소통의 장 아고라, 올림픽 경기장, 제우스 신전을 거쳐 리카비토스(Lykavittos) 언덕에 오른 나는 서양사학 내지는 고고학 박사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버렸다.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누구에게라도 여기서 눈으로 본 것을 내 방식대로 표현하고 싶게 만드는 도시가 아테네다. 아테네는 모든 것이 처음인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돈 잘 벌고 악랄하기로 유명한 유대인 상인마저 그리스 상인과 악수를 하고나서는 악수한 손이 아직 몸에 달려있는지를 확인한다는 우스갯소리가 경제적으로 너무 안 좋은 지금의 그리스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것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리스가 당면한 이런 경제적 어려움이 무분별한 포퓰리즘의 결과라는 사회과학적 판단과는 전혀 상관없이 19년 전의 아테네는 내 인문학 공부의 시작이었으며 신의 영역까지 나의 상상력을 확대시켜 준 무대였다.

  그리스 국기 안에 있는 하얀 십자가는 마치 내 상상력을 동서남북으로 실어 날라주는 통로같이 보일 정도였다. 물론 나중에 그 하얀 십자가는 이슬람국가 터키로부터 독립한 기독교 국가 그리스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언젠가 아테네에 다시 가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주 천천히 걸어보고 싶다. 하나라도 놓치는 것이 아까워 숨가쁘게 걸었던 예전과는 다르게. 오랫동안 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동반자가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나 또한 동반자의 이야기를 오래 들어줄 것이다. 아테네는 혼자보다는 둘이 다니면 더 좋은 도시다.

  스토리텔링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아테네를 권한다. 곳곳에 서린 문명의 그림자가 상상력의 융단을 깔아줄 것이다. 아테네는 이야기의 발원지가 될 것이고, 그 이야기는 계속 살이 붙어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할 것이다. 마치 무수한 신과 인간이 벌이는 신화보다 더 멋진 작품이 나올 지도 모른다. 그리스가 겪고 있는 지금의 아픔은 거만한 인간들에게 화가 난 신들의 일시적인 질투였으면 좋겠다. 문명의 유산 파르테논 신전에서 아테네 시내를 바라다보며 이제는 문명이 아닌 활력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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