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1호 유학파 만돌린 연주자 김병규(전기·78) 동문

 

 자그마한 기타처럼 생겼으나 음악 소리는 마치 어린 아이의 목소리 같은 악기 만돌린. 이 악기를 배우기 위해 국내 최초로 이탈리아에 유학을 떠난 사람이 있다. 그 주인공은 국내 1호 유학파 만돌린 연주자 김병규(전기·78) 동문이다. 귀국 후 만돌린 음악회를 준비하기 위해 교회와 학교 등에 도움을 구하려 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던 그가 지금은 유명 지휘자들과 연주를 한다.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도 자선 연주회를 70회째 열고 있다는 그에게 만돌린 연주자로서의 음악 인생을 들어봤다.

 

만돌린은 쉽게 접할 수 있는 악기가 아닌데 어떻게 접하게 되셨나요?
 중학생 때부터 지금의 세시봉 때문에 기타를 좋아해서 대학 입학하자마자 기타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그래서‘스트링 하모니스’라는 고전 기타 동아리에 들어갔죠. 그러다가 제가 2학년 때인 1979년에 ‘여성 만돌린 오케스트라’ 동아리와 ‘스트링 하모니스’가 합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만돌린을 접하고 연주하게 됐어요.


 만돌린 연주는 채플을 듣는 건물에서 우연찮게 처음 들었어요. 어디선가 여자 어린이 합창단 소리가 들려오는 거예요. 궁금해서 보니까 어린이의 목소리가 아닌 만돌린 소리였다는 걸 알게 됐죠. 그 경험으로 사람 목소리가 악기에서도 나온다는 것을 그 때 알았어요. 처음 만돌린을 연주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 악기가 제 운명을 바꿀지는 상상도 못했어요. 음악을 취미로써 좋아하던 한 학생일 뿐이었으니까요.

 

만돌린을 배우러 유학을 떠나셨는데 만돌린에 대한 확신이 있으셨던 건가요?
 처음부터 이 길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유학을 떠난 것도 단순히 만돌린을 연주한다는 그 자체가 좋아서 택한 것이었고요. 더욱이 만돌린은 국내에서 생소한 악기라 연주회를 통해 생계 유지가 된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확신을 할 수가 없었죠.


 그래도 유학을 택하게 된 동기는 저한테서 기타를 배우던 시각장애인 후배 때문이었어요. 제가 당시에 기타를 잘 쳐서 동아리실에서 후배들에게 기타를 가르쳤었어요. 후배들 중에 시각장애인이 있었는데, 친구들이 악보를 읽어 불러주면 이 후배가 점자 악보에 받아 적어서 연습을 하더라고요. 일주일에 한 번씩 그 후배에게 레슨을 해주면서 도왔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전철 2호선 철로에서 한 사람이 떨어져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어요. 신문을 보고 알게 됐는데 사망자가 그 시각장애인 후배더라고요. 잘 아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씁쓸했어요. 그 사고를 계기로 동아리 친구들에게 시각장애인을 돕는 행사를 해보자고 제안을 했어요. 그렇게 시작장애인을 위한 연주회 활동을 시작했어요. 연주회를 통해 모금한 돈으로 안구기증운동본부에 소속된 시각장애인 두명이 한 쪽 눈을 수술을 받게 될 수 있었죠. 그 후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연주회를 더 많이 열기 위해 만돌린을 더 배우고 싶었어요. 그래서 유학을 결정했죠.


 다른 동기는 아내의 조언이에요. 1997년에 모 대학 만돌린 동아리에서 강연을 부탁해 제가 가르치게 된 적이 있었어요. 그 학생들이 정기공연을 할 때 아내가 보러 왔었는데, 보고 나서 제 실력이 시원치 않은데 남을 어떻게 가르치겠냐고 지적했죠. 이럴거면 저에게 그만 두라고 했어요. 아내의 말에 자극받아 만돌린 유학을 알아보게 됐어요. 그런데 만돌린을 배우려면 한국에서는 안 되겠더라고요. 유학을 위해서 영국, 독일 등 여러 국가의 학교에 이메일을 보냈는데 이탈리아 ‘파도바 콘서바토리오’에서 연락이 왔죠. 그렇게 유학길을 떠나게 됐어요.

 

이탈리아에서의 유학생활은 어떠셨나요?
 이탈리아에서의 유학생활은 좌충우돌, 고난의 연속이었어요. 유학을 결정한 지 두 달 만에 떠난거라 재정적인 부분과 언어에 대한 어려움이 컸어요. 유학 비용도 남의 도움 없이 혼자 다 모았고, 이탈리어도 배우지도 않은 채 떠났거든요. 이탈리아 사람들이‘Buon giorno’라 하는데 그 뜻이 ‘안녕’ 인지도 모를 정도였어요. 그리고 제가 유학간 때가 1997년 4월이었는데, 11월쯤 우리나라에 IMF가 터진 거예요. 들고 간 한국 돈의 가치가 반으로 떨어져 버려서 너무 힘들었어요.

 

 이탈리아 파도바 콘서바토리오에 입학해서는 학생들과의 실력 차이로 마음고생을 했었죠. 18,19살인 젊고 힘찬 학생들 사이에 저는 나이가 40이 다 된 만학도라 학생들을 쫓아가기 벅찼어요. 진퇴양난의 상태에서 죽기 살기로 하루 15시간을 연주했어요. 젊은 학생들과의 실력 차이가 많이 나서 좌절도 했지만 절박함 때문에 살아 남아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었어요. 그래서 밤새워 연주하기도 하고, 한 교본을 500번 씩 연습했어요. 전공 책을 500번 씩 읽었다고 생각하면 돼요. 대학교 때라면 수석장학금을 탔겠죠?

 

국내 1호
만돌린 유학생의 길을 걷다

 

그렇다면 만돌린 연주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된 때는 언제인가요?
 파도바 콘서바토리오에서 세계적인 만돌린 연주자인 우고 오르란디 교수님을 만난 게 큰 행운이었어요. 브레시아란 도시에 만돌린 오케스트라가 있었는데, 만돌린 연주 경험을 쌓고 싶어서 합주단 활동을 시켜달라고 교수한테 부탁했어요. 감사하게도 우고 오르란디 교수님께서 도와주셨고, 덕분에 브레시아 만돌린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게 됐죠.


 처음에는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연주자들이 앉는 세컨드 만돌린 파트의 맨 뒷줄에서부터 연주를 시작했어요. 맨 뒷줄에 앉아 있다가 열심히 연습해서 한 줄 한 줄씩 앞으로 옮겨갔어요. 나중에는 세컨드 만돌린 파트 맨 앞 줄로, 결국에는 퍼스트 만돌린 파트 두 번째 줄까지 도달했고요. 브레시아 만돌린 오케스트라에서는 1년에 한두장의 CD를 발매하는데, 이들과 음반 작업을 함께 시작하면서 만돌린 연주자로서의 자신감을 갖게 됐어요. 음반 낼 때 제 이름이 들어가는걸 보고 ‘만돌린 연주가 정말 재미있고, 뭐든지 하면 되는거구나’를 느꼈어요.

 

유학을 갔다 온 후, 한국에서 힘든 과정을 보내셨다 들었습니다. 어떠셨나요?
 5년 유학길을 마치고 2001년 11월에 입국을 했는데, 한국에서 만돌린 강사 자리를 찾으려니 없더라고요. 일단 대부분이 만돌린을 모르니까 “과일 이름이냐, 패션브랜드냐?”고 많이들 물어보세요. 그래서 교회나 학교에 찾아가서 이런 악기가 있다고 설명을 해주고 만돌린을 배워보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면서 만돌린을 알리고 다녔죠. 대개는 문전박대 당하고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기도 했어요.


 한편으로는 시각장애인을 돕는‘기독교연합회관’의 안구기증운동본부에 기독교 사람들을 대상으로 음악회를 열고 수익금을 통해 시각장애인 수술비를 기부하는 활동을 시작했어요. 교회를 찾아가 시각장애인을 돕는 음악회를 하고 싶다고 목사님한테 제안을 했죠. 교회에서 만돌린 연주회를 열어 모금함을 통해 수술비를 모았어요. 그러다 연주회를 보신 분들이 만돌린을 배워서 연주회를 통해 기부활동을 하고 싶다며 점점 만돌린을 찾기 시작했어요. 나중에는 여러 오케스트라에서 연락이 오면서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게 됐고요. 이게 다 자선 음악회를 시작한 덕분이죠.

 

남을 돕는 즐거움으로 연주하다

 

 지금까지 가장 인상 깊었던 공연은 무엇이었나요?
 첫 공연은 부천필하모니오케스트라에서 말러 교향곡 7번을 만돌린 솔로로서 연주했어요. 이를 시작으로 정명훈 지휘자가 진행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함께 연주를 시작했고요. 기억에 남는 공연은 많이 있지만 정명훈 지휘자와의 말러 심포니 8번 공연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분은 다른 지휘자와는 달리 총보를 안 보세요. 대신에 연주자들을 직접 보면서 지휘하셔서 연주자가 틀리면 바로 아시죠. 그 분의 지휘가 깔끔하기도 했고 심포니 8번을 즐겁게 연주해서 정명훈 지휘자와의 공연이 가장 기억이 남네요.
 

앞으로 연주자로서 어떤 길을 나아가실 건가요?
 지금까지 시각장애인을 비롯한 불우한 이웃을 위해 자선 음악회를 70회까지 했어요. 앞으로는 시각장애인, 심장병 어린이, 집 없는 아이들을 돕기 위한 자선 음악회를 200회까지 하는 게 소원이에요. 주변에서는 돈 버는 것도 없는데 왜 계속 남을 도와주냐고들 많이 하세요. 하지만 저는 자선 음악회를 하며 도움을 주는 것이 도움을 다시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요. 또 기부한 모금액을 통해서 몇 명이 눈 수술하게 됐다는 얘기를 들을 때 가장 행복함을 느껴요. 남을 돕는 즐거움 때문에 자선음악회를 여는 거죠.

 

본교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우선 겸손할 줄 알아야 해요. 제가 이탈리아에 가기 전 강의했던 모 대학에서 바이올린 전공자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음악을 하면 집에 돈이 많아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음악을 하게 되면 절대로 남을 무시하는 태도는 갖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또한 뭐든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해요. 학생들 대부분이 하고 싶은 일은 못하고 사회적인 분위기나 주위의 권유 때문에 돈이 되는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나중에는 회사에 입사하겠지만, 경쟁에서 뒤처지기 마련이에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는 거잖아요. 반면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면 재미있기 때문에 밤새서 할 수 있는 힘이 있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마지막에 이기게 돼 있고요. 하지만 많은학생들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해요. 책은 간접 경험을 할 수 있게 하잖아요. 저는 그동안 읽었던 책들이 만돌린 연주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단순히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 속 깊은 감정이 악기를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사랑을 연주한다고 하면 듣는 사람이 음악을 통해 사랑의 감정을 받을 수 있도록 연주해야 해요. 이전에 읽었던 시, 소설들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악기를 통해서 표현할 수 있었죠. 후배 분들도 책을 꼭 많이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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