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종합편집부 부국장 정충교(사학·77) 동문

  마감이 30분밖에 남지 않은 오후 5시 30분의 <국민일보> 편집부. 그곳엔 웃음소리 하나 없었다. 오직 터질듯한 긴장감만이 편집부를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긴장 속에서 편집부원들은 각자 원고를 앞에두고 최종 마감을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현장 속에 데스크에 앉아 편집부를 지휘하며 내일 나갈국민일보 1면을 최종 검토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숭대시보>의 전신인 <숭전대학신문>의 23번째편집국장이자 현 국민일보 종합편집부 부국장인 정충교(사학·77) 동문이었다.

  감각과 경험이 버무려진 편집 실력

  그는 2002년 대통령 선거 특집 레이아웃 부문 편집상, 2002년 한국 편집 기자협회 월드컵 사진편집 우수상, 2003년 한국 편집 기자협회 레이아웃 부문 한국편집상, 2005년 한국 편집 기자협회 제목부문 이달의 편집상, 그리고 지난해에는 런던올림픽 때 1초 오심으로 아쉽게 준결승에서 패배한 신아람 펜싱 선수의 기사인 "4년을 삼켜버린 1초"라는 레이아웃으로 한국편집 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대단한 상은 아닌데, 허허 쑥스럽네.” 화려한 수상 경력에 비해 그의 웃음은 소박했다.

  “신문 편집에 대해 따로 공부한 적은 없습니다. 그냥 ‘이것을 여기에 배치하면 어떨까’하며 느낌 가는 대로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독자가 편하게 읽을까’, ‘어떻게 하면 더 기사에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까’ 역시 중요하게 고려하고요.” 하지만 과연 정말 느낌만으로 신문의 훌륭한 레이아웃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30년이 넘는 편집 경험도 많은 편집상 수상의 토대가 된 것 같네요. 1979년도에 숭전대학신문 편집국장을 하면서 신문 편집을 시작했고, 1984년에 <교육신문>에 입사해 편집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3년 후에 국민일보 편집부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쭉 편집을 담당했네요.” 그랬다. 그의 편집 능력은 30년이 넘는 편집 경험과 편집에 대한 뛰어난 감각이 합쳐져 생겨난 것이다.

  어두운 시대 속에서 학보사 펜을 잡다

  격동기와 함께한 <숭전대학신문> 그의 기자 생활은 1977년 <숭전대학신문> 22기 기자로 입사한 해부터시작된다. 그리고 2년 후인 1979년 8월에 편집국장을 맡아 1980년 8월까지 학보사를 이끌었다. 그런데 1979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당한 10·26사건이 있었고 1980년은 억눌려 있던 민주화의 요구가 분출되던 해였다. 그는 이렇게 격동의 시기에 편집국장을 맡았다. “1979년은, 말하자면 어둠의 시대였지요. 대학생이든 사회인이든 모두 다 패배감에 젖어 지내던 시대였습니다. 유신 헌법 때문에 그 누구도 독재 정권이 잘못됐다고 말을 하지 못했으니까요. 정부에 가장 비판적인 운동권 학생들 역시 공공연히 활동하지 못하고 지하로 들어갔고요.” 그는 1979년의 사회를 이렇게 진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문을 발행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지요. 당시 학교에 출입하는 중앙정보부 직원이 있었는데, 조판 날이면 신문 방송부에 상주하면서 기사를 검토하는 거예요. 학교 직원들은 이에 대해 찍소리도 못하고요. 이러다 보니 정치 얘기를 신문에 쓰는 것은 꿈도 못 꿨습니다.” 그의 이야기처럼 1979년도의 본보에는 정치와 사회에 대한 글은 실려 있지 않았다. 단지 학교 소식이나 학술 문예, 그리고 고대사 관련 기사만 실려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해가 바뀌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사회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어두울 때10·26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다들 깜짝놀랐죠. 그리고 1980년이 되니 누구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자유가 생겼어요. 그때부터 우리 학보에서도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얘기를 마음껏 실었지요.”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빙그레 웃었다. 아마 그렇게 자유를 가질 수 있었던, 그리고 그 자유를 목 놓아 외칠 수 있었던 그때가 그리운 것이리라. 그의 말처럼 1980년의 본보에는 1979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기사들이 실려 있었는데, 1980년 1월 17일자의 "민주주의는 민중주도로 성취돼야" 기사나 1980년 4월 17일자의 "4·19 학생혁명의유산과 계승" 등의 기사들이 그것이다.

  좌절의 80년 5월, 그리고 <숭대시보>의 위기

  하지만 민주화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0년 5월 15일, 민주화를 외치며 서울역에 모였던 수십만의 대학생이 아무런 소득 없이 다시 귀가한 이른바 ‘서울역 회군’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대학생들을 돌려보낸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시키고 그때까지 유일하게 대학생 시위가 계속되던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한다. 이렇게 민주화는 좌절되고 <숭전대학신문> 역시 위기를 맞는다. “이제 신문을 좀 자유롭게 쓸 수 있나 싶었는데 서울역 회군 이후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고 그곳에서 신문을 매주 검열 받았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일일이 간섭하고 문제가 되는 문단을 잘랐지요. 조금이라도 정부에 비판적이면 바로 빼 버려서 나중에는 아예 그 칸이 비워져 내보내지기도 했어요.” 그의표정은 다시 어두워졌다. “간섭이 점점 심해지고결국 전국 대학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더 이상 신문을 내보내는 것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휴간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참 아쉽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네요. 민주화를 이뤄내지 못했다는 역사적인 아쉬움, 그리고 신문을 끝까지 발행하지 못했던 개인적인 아쉬움들이 그렇습니다.”

  결국 신문은 1980년 5월 8일을 끝으로 휴간됐다. 그리고 4개월 후인 9월 11일에 가서야 복간된다. 공백의시기에 그는 신문을 더 이상 내지 못하고 편집국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쉬웠습니다. 휴교령이 어서 풀리고 제 손으로 신문을 발간하고 싶었죠. 하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다시 말을 이었다. “5월 전국 휴교령 이후 학생들 모두 집으로 돌아가 신문을 읽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학보 상황도 역시 내부적으로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학생 운동에 깊숙이 관여한 78학번 후배들을 검거하려고 노량진 경찰서에서 형사들이 나와 우리 신문사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때 저도 학교 앞의 식당에 숨어서 며칠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경찰이 들이닥친 이후 모두 다 같은 자리에 모이기는 어려워졌어요.”

나의 훈장, 학보사 기자

  그때 우리 신문의 위상은 어땠을까? 우울한 얘기를 하며 침울해 있던 그는 이제야 웃어 보였다. “그 당시 우리 학보의 위상은 대단했습니다. 신문을 6천 부 정도 찍었는데 이를 가판대에 갖다놓기만 하면 하루 만에 없어질 정도로 독자가 많았지요.” 그리고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렇게 관심이 높았던 학내 유일 언론이었으니 교수님들도 학보 기자를 인정해 줬습니다. 대학 4년 동안 수업에 들어간 적이 거의 없어요. 시험기간에만 가서 시험만 보고 나왔죠. 근데 기자한다고 A학점을 많이들 주셨어요. 그래서 수업을 거의 안 들어갔지만 졸업할 때 평점 3점은 넘겨 졸업을 했습니다.”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단순히 A학점 때문이 아니라, 그 당시 누구에게나 인정받았던 학보사 기자 생활이 뿌듯해서다.

  그는 학보사 기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학교 여기저기를 거침없이 쏘다니기도 했다. “총장실에 대뜸 찾아가서 총장하고 둘이서 얘기도 많이 했어요.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염치없지만, 매일 아침에 여기저기 부서 찾아가서 커피도 얻어먹고, 점심도 얻어먹고 그랬어요. 총장 여비서가 저한테 고생한다고 밥이랑 옷이랑 사 줬던 게 기억나네요.”

  그리고 그는 어디서든 당당한 학생이었다. “그때 ‘학도호국단’이라고 지금의 총학생회를 대신하는 학생 자치 기구가 있었어요. 하지만 사실 정부에서 통제하는 단체였어요. 그러다 보니 호국단에서는 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운동권 학생들을 협박했죠. 결국 제가 그들에게 학생들끼리 그래서 되겠냐’며 큰소리쳤어요. 호국단원들은 저보다 나이도 많고 군대도 제대한 복학생들이었지만 제가 학교 기자라고 별 소리 못했지요.”

기자가 되는 길…‘네 멋대로 해라’

  “기자 될래? 그럼 좋아하는 걸 해”

  이렇게 대학 생활을 기자로 거침없이 보낸 그는 학교를 졸업한 지금도 기자를 하고 있다. 20살에 학보사기자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총 37년간을 기자로 보낸 것이다. 이렇게 오랜 기자 생활을 한 그가 기자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말이 있었다. “기자는 단순히 글만 잘 써서는 안 됩니다. 자신만의 전문성을 키워야 그에 관련된 특집 기사를 쓸 때나 어떤 코너를 기획할때 개성이 돋보일 수 있어요.” 그는 눈을 번뜩이며 전문성이라는 말에 대해 설명했다. “전문성이라는 게 꼭 자신의 대학에서 배우는 학문을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자신이 끌리는 것에 전문성을 키울 수도 있지요. 예를 들면 여행을 좋아한다면 여행을 다니고 경험하면서 저절로 그에 대해 전문가가 되는 거죠.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그 점을 키우세요.” 그의 마지막 말은 매일같이 전공 공부에만 매달리는 우리에게 통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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