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대시보는 한국 최초의 대학신문으로서 1919년 4월 4일에 창간됐다. 이후 학교가 폐교와 재건을 겪은 뒤 본보는 1956년에 ‘숭대월보’라는 제호로 다시 간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숭대학보 △숭전대학신문 △숭실대학신문 △숭대시보 순으로 제호를 바꾸며 한국 현대사와 함께 많은 변천을 겪었다. 본보 제1100호를 맞아 현대사를 글로만 배웠을 본교 학우들을 위해 당시 숭전대학신문 기자였던 19기 기자 곽신환 동문과 25기 기자 김대원 동문을 만나 역사 속 숭실과 숭대시보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편 집 자

  
  70, 80년대에는 교내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했다고 들었어요. 그 시절, 학교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곽신환 동문(이하 곽) 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거의 매학기 학생 데모가 있었지. 그래서 경찰과 군대의 학교 출입이 잦았어. 국가에서 우리에게 학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치르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였고. 그런 학기에는 레포트나 과제로 시험을 대체했지. 또 강의실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드나들기도 했어. 학교 곳곳에 중앙정보부에서 심어 놓은 사람들이 있어서 ‘언제 어디에 학생들이 모인다’는 얘기만 들리면 곧바로 보고가 되곤 했지.
  우리 때는 총학생회도 없었어. 대신 나라에서 강제로 만든 학도호국단이라는 것이 있었지. 총학생회장을 학도호국단 단장이라고 했어. 학도호국단은 학생들을 대변하기보다는 국가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국가의 입장에서 학생들을 통제했지. 당시에는 대통령 선거도 직접 선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장을 뽑는 일도 직접 선거가 불가능했어. 반정부 데모를 주도했던 건 주로 인문대학이었고 학도호군단은 아니었어.

  김대원 동문(이하 김) 비상계엄령이 전국계엄령으로 확대된 날이었어. 아침에 학교를 가니까 공수부대가 학교를 점령하고 있더라고. 철야 시위를 하던 학생들은 이미 연행되거나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고. 이미 전국의 대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미리 모이자고 약속한 장소에 갔지. 그런데 글쎄 편집국장한테 “수습기자를 포함한 학보사 전 기자에게 수배령이 내려졌다. 빠른 시일 내에 다른 곳으로 피신하라.”는 연락이 왔다고 하더라고. 다행히 대구에 사는 친구가 있어서 일주일 정도 서울을 떠나 대구에서 머무를 수 있었어.

  
  당시 숭전대학신문이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70년대 그 시절은 학교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읽을거리가 거의 없었어.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지. 당시 한국 사회에는 사람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한 상품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종이에 활자로 쓰인 것은 그 자체로 굉장한 권위를 지녔어. 종이에 글씨가 쓰여 있기만 해도 너도나도 보려고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학교의 여론을 주도하거나 의사소통을 하는 신문은 중요한 위치에 있었지. 그 당시 편집국장이나 주간교수의 권위는 대단할 수밖에 없었고.

  영향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기자 모집에 지원하는 학생들은 많았어. 강의실을 빌려 시험을 치러야 할 정도였으니까. 당시 수습기자를 희망하는 학생들은 시험과 면접을 봤는데 주로 2, 3학년 기자들이 문제를 내고 채점도 했어. 수습기자 합격자 명단을 작성해서 학교에 크게 붙이기도 했지.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봐도 학생들이 학보사를 어떻게 생각했고 학보사가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거지.

 
   학보사 활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이 있었나요?

  시대 상황이 언론·출판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어. 주간교수나 편집국장에게 압력이 들어오기도 했고 중간에 신문을 탈취해 아예 배포를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 당시에는 신문을 한 번 찍어내는 일이 요즘처럼 간단치 않았어. 원고를 손으로 일일이 다 쓰고 편집·제작도 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겨우 고생해서 찍었는데 배포도 하지 못하고 파쇄되거나 불에 태워질 때면 정말 속상했어. 학보사를 하면서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신문이 배포도 되지 못할까 봐 어떤 기사를 어떻게 써야 하나 항상 고민을 했지.

  
  숭전대학신문에 대한 언론 탄압이 심했는지 궁금해요.

  내가 직접 받은 억압은 없었지만 편집국장은 꽤 많은 압력을 받았다고 해. 학교는 학교대로 ‘싣지 말라’, 학생은 학생대로 ‘왜 실어주지 않느냐’며 학보사에 건의하기도 했고. 우리는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했지.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 학기에 한두 번은 인쇄된 신문을 배포하지도 못하고 버렸던 것 같아.

  그때는 신문을 인쇄하려면 보안사령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어. 지금의 서울시청 본관 2층이 보안사령부였지. 그 곳에 들어가면 보안사령관들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우리의 신문을 한 면 한 면 읽기 시작했어. 그리고 그들이 기사에 빨간 사인펜으로 표시를 하면 그 기사는 빼야했지. 하루아침에 백지가 돼버리는 상태에서 뭐든지 채워 넣어야 했기 때문에 잘릴 것 같은 기사를 대체할 기사도 미리 써놨었어. 아니나 다를까 기사가 잘릴 때는 미리 준비해 둔 기사로 바꾸곤 했지.

  
  신문을 만들면서 생겼던 일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신문을 완성하기 위해선 조선일보 인쇄국에 가서 하루 종일 있어야 했어. 보통 토요일에 교정이 끝나는데 하루 전인 금요일에 가서 신문이 일부분씩 나올 때마다 교정을 해야 했지. 추운 겨울날에는 신문 교정이 끝나길 기다리면서 조선일보 사옥 뒤에 있는 중국 음식점의 자장면을 먹었어. 동기와 선배들과 함께 먹었던 그 맛이 아직도 잊히질 않아.
  또 애써 만든 신문을 학교에 가지고 갔는데 총장이 애처롭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 신문은 배포되지 못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어. 그때는 왜 그렇게 총장이 비겁하게 느껴지고 미웠는지 몰라. 하지만 이제 세월이 지나니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해. 그 시절에는 우리가 모든 일에서 옳고 정의롭다고 생각했으니까 총장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지.

  우리 때는 요즘처럼 놀러 나갈 곳이 많지 않았어. 그래서 평일이든 주말이든 항상 신문사에 나왔지. 그럴 때면 선배나 동기들하고 얘기도 나누고 기타도 치고 신문도 만들었던 기억이나. 또 내가 일했던 80년부터 82년은 숭전대학교라고 해서 숭실대와 대전대가 통합했던 시절이었어. 그렇기 때문에 한 주는 숭실대에서, 한 주는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와 신문을 만들었어. 서로 자신의 캠퍼스 소식을 1면에 싣겠다고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지. 그리고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때는 신문사 때문에 강의에 참여하지 못해도 출석을 인정해 줬어. 워낙에 결석이 많은 터라 학과 교수님이 “너는 전공이 신문이고 우리 과는 부전공이냐.”고 말씀하시기도 했을 정도였어.

  
  당시의 숭전대학신문은 학교에서 어떤 역할을 했나요?

  ‘과연 우리는 대학에 중점을 둘 것인가, 일반 사회 보도에 중점을 둘 것인가’ 하는 고민이 많았어. 하지만 우리는 대학신문이 기성 신문과 같은 성격을 지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 또 한편으로는 대학도 사회의 일부이기 때문에 사회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을 때는 공동체의 문제로 여기고 대학이 선구적인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어.

  70년대까지만 해도 학보사 기자는 엘리트 학생이 주로 했어. 학과 수석이나 차석이 많이 했으니까. 하지만 80년대 들어서 우리는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시대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선 다양하고 많은 학생들의 참여가 필요했거든. 그래서 학보사가 더 이상 특권층이 행동하는 집단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 다시 말해 학보사는 시대의 요구와 학생들의 목소리가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거야. 또 재밌는 문화가 있었는데 각 대학교 신문을 친구들에게 우편으로 보내주는 일종의 안부 인사 차원이었지. 요즘 같이 SNS가 있는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보를 통해서 자신의 학교 소식도 알리고 본인 안부도 전해주는 역할을 했던 거야.

  
  앞으로의 숭대시보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오늘날의 대학신문이라면 대학 사회 안에 있는 구성원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거야. 학보사가 학교 밖의 사회에 대한 이슈를 제기하거나 목소리를 내는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 같아. 그보다 학보사의 주인공인 학생들의 목소리를 결집해 그들의 의견을 대변하거나 학생들을 위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어느 교수가 소설가 조정래 선생님께 “선생님, 요즘 학생들은 책도 잘 보지 않고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대. 조정래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우리가 바로 이런 세상을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운 것이 아니냐. 그럼 요즘 학생들이 연애하고 공부하는 것이 정상이지 과거 우리처럼 싸우고 죽는 것이 정상이겠냐.”라는 거야.
  조정래 선생님의 말씀처럼 난 오히려 학생들이 신문을 잘 보지 않고 사회 이슈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해. 자신의 스펙을 쌓기 위해 공부를 하고, 한창 청춘일 때 연애를 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우리 세대가 낳은 결과라면 꽤 만족스럽다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초조해 할 필요도 없고 걱정할 이유도 없어. 물론 많은 학생들이 학보사에 의견을 표출하고 다양한 문제를 함께 의논하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다고 봐. 숭전대학신문 기자 시절에 우리가 만든 신문을 어떤 학생이 찢고 있더라고. 너무 화가 나서 따지면서 싸웠던 적이 있었어. 그 모습을 보고 당시 주간 교수님이 “우리는 신문을 만들 뿐 신문을 가져가는 사람이 신문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순전히 그들의 몫이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 그러니까 지금의 숭대시보도 학생들이 신문을 어떻게 읽고 사용하는가에 연연하지 말고 묵묵히 신문을 만드는 일에 열중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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