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화우 대표 변호사 박영립(법학·74)동문

  전남 담양의 작은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무작정 상경 길에 올랐다. 서울을 꿈꿨던 그에게 도시는 냉정했고 식당 종업원, 여관 심부름꾼, 의류 공장 공원 등 변변치 못한 직업을 전전했다. 하지만 그는 빈곤을 숙명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 그 돈으로 검정고시를 치르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장을 받았다. 그 후 본교 법학과에 입학한 그는 제23회 사법고시에 합격하게 된다. 이런 그에게 사람들은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한다. 이제는 어엿한 대형 로펌의 대표 변호사로 ‘용’이 된 그는 바로 박영립(법학·74) 동문이다.

 

혹독했던 나의 도시, 서울
  그는 1967년 2월, 14살의 나이로 추운 겨울날 서울로 올라왔다. 아메리칸 드림으로 많은 한국인이 미국으로 떠났듯이, 그 역시 부푼 꿈을 안고 상경했다. 하지만 도시는 그에게 쉽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서울에 가면 일자리도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진 사람이 많았어. 나 역시도 그런 꿈을 안고 서울행 열차를 탔지. 그런데 막상 와보니 자리 잡는 일이 쉽지 않은 거야. 할 만한 직업은 거의 없었고. 초등학교 졸업장만 가지고 와서 생활을 하다 보니 노숙도 하게 됐지. 음식점 배달원부터 여관 심부름꾼, 공장 시다까지 안 해본 게 없을 정도였어.” 힘들게 들어간 공장의 노동 환경은 최악이었다. 보름에 500원, 한 달에 천 원으로 의식주를 모두 해결해야 했다. 공장은 난로 하나 없는 추운 다다미방으로 어깨를 필 수 있는 공간조차 없었다.

  “지금은 어디든지 ‘아르바이트 구함’, ‘종업원구함’이라는 구인 광고가 많잖아. 그런 광고를 보면 마음이 왠지 푸근해져서 한참 보게 돼. 몇 십년 전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 할지 모르지만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풍족한 거지.”
 

월 7천 원을 바치고
연필을 잡았다


우연이었던 검정고시, 필연이 된 대학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시절, 그에게 가장 크게 보였던 사람은 세무공무원이었다. 양복점 점원으로 일할 때 동대문 시장에 세무공무원이 감사를 오는 날이면 양복점 사장들은 너도나도 접대를 했다. “가게 주인아저씨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세무공무원이더라고. 그런데 우리 양복점 사장님은 남들 다 하는 접대를 안 하는 거야. 어린 마음에 ‘사장님, 사장님도 저런 분들 데리고 다방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물어봤지. 그런데 사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 난 안 해도 돼. 그냥 장부 잘 쓰고 세금 내면 되지.’라고 하시는 거야. 그 때 ‘아, 장부를 잘 쓰면 저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 그는 그 이유 하나로 경리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리를 배우기 위해서 학원에 들른 그는 우연히 검정고시 전단지를 보게 됐다. 그는 그 때의 상황을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다고 회상했다.

  그 당시 검정고시 학원의 한 달 수강료는 약 9천 원 사이였다. 하지만 그의 한 달 월급은 7천 원. 월급을 모두 할애해야만 겨우 학원을 다닐 수 있었다. 그저 중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고민도 하지 않고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했다. 그리고 그는 9개월의 노력 끝에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시험을 대구에서 봤는데 제일 성적이 좋았다고 그러더라고. 대구지역 수석을 한 거지. 정말 열심히 죽기 살기로 했던 것 같아. 아마 내 인생에서 검정고시를 치르는 그 과정이 제일 치열했고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시기였지.” 하지만 중학교 졸업장을 손에 쥔 그에게 오는 것은 합격증 하나뿐이었다. 어떠한 신분 상승도 없었고, 그렇다고 수입이 많아지지도 않았다. 또 다른 도전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마침 검정고시 학원 원장님이 나보고 고등학교 과정을 추천하는 거야. 수석도 했으니까 무료로 다니게 해주겠다고. 당연히 난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학원을 다녔지.” 그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얻기 위해 9개월의 과정을 다시 시작했다. 고등학교 과정 역시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그는 대학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대입 시험은 쉽지 않았다. 단순히 국어,영어, 수학으로 나뉜 검정고시와 달리 대입 시험은 물리, 화학, 지리 등 과목이 세분화 되었고 제 2외국어도 선택해야 했다. “그 때 아마 고려대학교에 지원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떨어졌더라고. 내가 생각해도 연필 굴려서 찍었을 정도였으니까 합격하지 못했지. 그렇게 실패하고 위축돼 있을 때 나랑 검정고시 학원을 같이 다녔던 한 여학생이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어. 그 편지에 나를 격려하는 말과 대학에 대한 정보를 써놨더라고. 그 여학생이 알려준 대학교 중에 성균관대,외대, 숭전대가 있었어. 내 집이 당시 상도동이었는데 앞에 두 개의 대학들은 내 집과 너무 멀었고 숭전대가 우리 집과 가까웠지. 거기다 숭전대가 컴퓨터 도입을 시작했는데 재학생이면 누구든지 컴퓨터로 수업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러더라고. 그리고 난 그 때 대학교에도 장학생이라는 시스템이 있는지 몰랐지. 그 여학생이 내 성적 정도면 숭전대 장학생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줘서 그 때서야 알게 됐지.” 그렇게 대입 시험을 치른 그는 숭전대학교 법학과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모두가 평범하게 보냈을 6년을 단 2년 만에 마침표를 찍은 그는 남들과 다른 노력을 해야 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6년 과정을 검정고시로 2년 만에 패스했으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남들이 한 시간하면 두 시간하고 세 시간하면 네 시간을 했어. 그렇게하니까 사법고시에도 합격하게 되더라고.”

 

받은 만큼 돌려주는 삶
  그는 변호사가 된지 21년 후인 2004년부터 한센인권변호단장으로 일해 왔다. 국내 대표적인 공익소송으로 손꼽히는 ‘소록도 한센병 보상청구소송’에서 한센병력자들을 대리하여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일본은 1907년 '나(나병) 예방에 관한 건' 제정으로 부랑자와 걸식 환자를 주 대상으로 한 격리수용을 시작했으며 1915년 이래 행해진 이른바 '우생 수술'에 의한 낙태와 단종을 실시했다. 한센병 환자 격리수용 조치로 일본은 식민지 한국의 1916년 소록도에 자혜병원을 세우고 한센병 환자들의 격리 수용시설로 이용했다. 소송 결과 현재까지 총 595명의 청구자 중 561명에게 보상이 이루어졌다. 이 소송은 일제강점기 때 우리 국민이 입은 피해에 대해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받아낸 거의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는 한센인들을 돕게 된 계기가 굉장히 부끄럽다고 말했다. “일본 변호사들이 대한변호사협회에 한센병 병력자들을 위해 도움을 요청했어. 내가 맡겠다고 했는데 이게 참 자괴감이 드는 거야. 나름대로 대한변호사협회가 독재정권 시절에 투옥됐던 분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해서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수자인 한센인에 대해 일찍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더구나 우리나라 변호사도 아닌 일본 변호사들이 그들에 대해 먼저 관심을 갖고 도와주고 있었던 점에서 굉장히 부끄러웠어. 그래서 더 많이 돕고 최대한 열심히 변호를 했지. 1년이면 될 것 같던 재판이 현재 10년째 이어지고 있고 아마 올해 안으로는 모두 마무리가 될 것 같아.”

  한센인은 사회적 차별뿐만 아니라 국가에 의해 강제로 단종 수술과 낙태 수술을 받아야 했다. 한센병이 감염률이 높고 유전병이라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었다. 그는 이들을 위해 또 다른 재판을 진행 중이다. “당시 강제로 단종 수술, 낙태 수술을 당한 분들은 개인의 행복과 신체의 자유를 침해당한 거야. 이분들을 위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하고 있지.” 그가 이렇게 끊임없이 사회 소수자를 돕고 그들의 인권을 위해 힘쓰는 이유는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뿐이란다. “검정고시를 볼 때부터 원장님께 도움을 받았고 대학교를 다닐 때도 학교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다녔잖아. 난 단지 사회가 나를 도와준 만큼 나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더군다나 내 재능이 누군가를 돕는 데 쓰이는 것만큼 뿌듯한 일은 없지.” 이외에도 그는 △노동인권변호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상담위원 △대한변협 인권위원장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을 역임하며 인권 변호에 앞장서고있다.
 

“한계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라”
 

“나는 내 길을 묵묵히 걸었을 뿐”
  학교마저 서열을 나누는 시대에 숭실대가 가지는 자리는 크지 않다. 일명 ‘명문대’ 대열에 들기 위해 본교를 포함한 모든 학교들은 저마다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갖고 있는 대학교의 이미지는 모두 똑같다. 사회가 학교에 등수를 매기고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할 때 그는 사회의 틀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다. “나에게 대학교를 간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어. 그래서 명문대든 아니든 그런 건 상관없었지. 내가 학교 다닐 때 내 동기들은 다른 학교로 편입한다 어쩐다 해서 학과 공부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지. 그 때 나는 도서관을 다니면서 앞으로 내가 가야할 길에 대해서 생각했었어. 아무래도 그런 시간들이 나를 만들어준 것 같아. 만약 나도 편입 시험 준비한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그랬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야.”

  그는 스스로의 한계를 짓는 것이 현대인의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내가 사법고시를 준비할 때 누군가 그러더라. ‘사법고시는 하루에 10시간 공부해서 3년을 해야 한다’고. 이 말 자체가 스스로의 한계를 정하는 거야. 남들 1시간 할 때 난 2시간 하고 남들 10시간 할 때 나는 15시간을 했지. 자신이 처한 위치를 본인의 한계라고 생각하고 그 안에 가두면 난 영원히 그런 사람 밖에 되지 않는 거야. 주위의 시선이나 환경에 휘둘리지 말고 그저 내가 갈 길을 묵묵히 걷다 보면 목표에 도달하게 돼 있어. 그러니까 지금 숭실대 학생들도 ‘내가 숭실대니까 이정도 밖에 안 되겠다.’라는 생각은 말고 그 시간에 다른 사람의 몇 배의 노력을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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