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공동모금회 교육원장 김누리(사회복지·90)동문

  하얀색 셔츠와 넥타이가 잘 어울렸던, 단정한 인상과 온화한 미소를 가진 그는 긴장하고 있는 기자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이른 시간에 약속을 잡았음에도 기자를 대하는 그의 행동에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배려가 느껴졌다. 사랑의열매로 통하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교육원장을 맡고 있는 김누리(사회복지•90) 씨는 13년째 어려운 이들의 동반자를 자청하고 있다. 종합복지회관의 현장 업무에서부터 대형복지재단의 교육원장까지, 세상을 온정으로 채우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교육계의 격동기에 사회복지를 꿈꾸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89년. 때는 이른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1세대가 등장해 활동하던 교육계의 격동기였다. 고등교육은 불안했고 그 피해는 학생들에게 그대로 전가됐다. “제 또래들이 고등학생일 때 교육계가 엄청나게 불안했어요. 전교조 활동도 많았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와 같은 영화들도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나온 거예요. 그러다보니 모두 세상에 대한 고민이 많았죠. 자살률도 엄청 높았고요.” 주위에서 힘들어하는 친구들을 보며 고등학생 김누리는 사회복지를 꿈꿨다. “주위에서 자살하는 친구들도 보게 되고 경제적으로나 학업 때문에 힘들어 하는 또래들을 많이 봤어요. 과연 내가 어떻게 그 친구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을 했죠. 처음에는 심리학을 공부해서 상담을 통해 힘들어 하는 이들을 도울까도 생각해 봤는데, 사회복지가 조금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돕는 방법인 것 같아서 사회복지 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봉사의 전통, 숭실에 이끌리다
  90학번인 그는 학력고사를 쳤다. 지원할 대학교와 학과를 먼저 선택하고 시험을 치는 학력고사는 자신이 선택한 단 하나의 학교에, 단 하나의 학과에 합격해야 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그는 숭실대 사회복지학부를 선택했다. “점수를 보고 눈치 지원을 하는 요즘보다 학력고사 시절에는 자신의 소신껏 대학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중요했어요. 전 100% 제 소신으로 숭실대를 선택했죠. 사실 저는 기독교인은 아닌데 숭실대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대외공헌사업에 전통이 깊더라고요. 그 전통이 제게 매력으로 다가왔어요. 다른 학교에도 사회복지학부가 있긴 했지만 전통 때문에 숭실대를 선택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어요.” 시험 결과에 대해서 그는 운이 좋았다며 웃었다. “당시 경쟁률이 제 기억에 9.8대 1이었어요. 400명 넘게 지원해서 40명이 뽑혔으니까. 정말 경쟁률이 어마어마했었는데 다행히도 붙었더라고요.”

 
  꿈을 접고 방황한 대학 2년
  고등학생일 때부터 사회복지를 하고 싶었던 그였지만 대학에서 만난 사회복지는 멀게만 느껴졌다. “전공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어요. 적성에 맞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사회복지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에 대한 고민이었죠. 복지를 하려면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는데, 저는 어려움을 겪어 본 적이 없으니까요. 결국 전 사회복지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학교생활도 망가졌어요. 학점도 1.5에서 1.8 정도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수업도 많이 빠졌고요. 수업에 들어갈 이유가 없었거든요. 제가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는 대학 2학년까지를 방황의 시기라 표현했다.

  그러던 2학년 겨울방학, 그의 방황을 끝낼 기회가 찾아왔다. 1991년 지금의 국가정보원에 해당하는 안전기획부는 학생 운동을 막기 위해 대학교 학생회 간부와 학보사 기자들을 대상으로 반공연수를 실시했다. “제가 학생회의 일원으로 안기부 반공연수에 가게 됐어요. 방대한 러시아도 보고 프랑스, 독일을 15일 동안 둘러보니까 ‘이런 큰 세상에서 내가 얼마나 하찮은 고민들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연수에서 돌아오자마자 우선 미뤄뒀던 군대에 갔어요. 군대에서 정신 많이 차렸죠.”


결국은 나의 길이었던
사회복지사

 
  사회복지에 새로 눈뜨게 해준 명강의
  복학 후 3학년까지도 사회복지와 거리가 멀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역사학이나 철학이나 동양학에 관심이 있어서 그쪽으로 공부했어요. 사회복지에는 관심이 없었죠.” 그런데 그때 그를 사회복지사의 길로 이끌어준 사람들이 나타났다. “3학년 2학기 때 전공필수 수업을 듣고 있는데 마치 마약을 한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당시에 막 부임하셨던 노혜령 교수님의 수업이었는데, 사회복지를 바라보는 관점이 너무 새로운 거예요. 사회복지사는 보통 사회문제, 고통, 빈곤과 장애 등 부정적인 면들만 계속 쳐다보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괴리감을 느꼈던 거였고요. 그런데 교수님의 수업에서는 인간의 장점이나 능력에 대해 얘기를 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였죠. 그때부터 사회복지가 다르게 보였어요. ‘나와 가까운 곳에 사회복지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독일에서 공부하신 김미원 강사님이 계셨는데 유럽식 복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어요. 첫 수업을 듣고 ‘이거다. 이걸 우리나라에서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유럽은 약자들이 충분히 즐겁게 살 수 있도록 복지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거든요.” 이후 그는 3학년 2학기부터 본격적으로 사회복지를 공부했다. 학부 졸업 후 캐나다로 1년간 유학간 그는 1997년 IMF때 한국으로 돌아와 본교 사회복지대학원에 진학했다. “환율이 너무 올라서 귀국 했는데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1990년도에 입학에서 2000년도에 대학원을 졸업했으니 숭실대를 10년간 다녔네요.”

 
   사회복지의 백화점을 가다
  그는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중곡종합사회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종합복지관은 가장 일반적인 복지시설로, 나이나 성별 등 특정조건을 가리지 않고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어떤 일이라도 종합적으로 돕는 시설이다. “종합복지관은 사회복지의 백화점이에요. 다양한 현장을 경험하고 싶어서 종합복지관을 첫 직장으로 선택했죠. 3년을 일했는데 처음 1년 반은 홀몸노인 가정에 방문해서 보살펴드리는 일을 했어요. 매주 뵙던 홀몸 할머님들의 얼굴은 아직도 생생해요. 지금은 대부분 돌아가셨겠지만…. 그 외 기간에는 사업기획서를 작성하고 복지재단들에게 돈을 지원받는 일도 했어요. 시장 없는 경영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실천 없는 복지정책은 존재하지 않아요. 종합복지회관은 그 실천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곳이었어요.” 10년이 지난 아직까지 그는 그때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우리 복지관이 광진구에 있었는데 당시 광진구에 3개의 복지관이 있었어요. 우리는 천주교 복지관이었고 다른 곳은 기독교 복지관과 불교 복지관이었죠.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세 개의 복지관이 뭉쳐 많은 활동을 했어요. 설문지도 함께 돌리고 학생들 직업 교육도 한 번에 같이 했죠.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더 넓은 세상을
사랑의열매로 채우고 싶어서


  새로운 둥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종합복지관에서 3년을 일한 후 그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로 직장을 옮겼다. 사랑의열매로 유명한 공동모금회는 전국 16개 시·도에 지역분회를 갖추고 연 4천억 원이 넘는 모금액을 수천 개의 복지사업에 지원하는 대형 단체이다. “처음부터 종합복지관에서는 3년만 활동할 계획이었어요. 제 직업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고 현장을 경험하고 싶었던 거였죠. 퇴사하고 나서 제가 복지정책이나 행정 쪽을 공부했으니까 모금회 본부에 입사했어요.” 그는 모금회에서 모금한 돈을 각 복지사업에 배분하는 일을 3년간 맡았다. 이후 기획조정실에서도 6년 반 동안 일했다. “돈을 배분하는 일은 좋았는데 기획조정이 힘들었죠. 저는 사회복지를하는 사람인데 경영에 관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던 중 그는 제주지역회로도 발령이 났다. 2011년 그는 모금회의 제주지역회에서 전략기획과 모금액을 배분하는 일을 총괄하게 됐다. “본부는 너무 큰 사업 단위이다 보니 현장과는 동떨어진 느낌이 있는데, 제주도에 있을 때는 정말 현장과 아주 가까이에서 신나게 일했어요. 매일 현장 사람들하고 현장을 누비면서 직접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을 주다 보니 ‘아 내가 이래서 사회복지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현장에 힘을 실어주는 일

  현재 그는 공동모금회의의 교육원장은 맡으며 복지교육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사회복지라는 것이 국민들의 관심은 많지만 재정이 부족한 분야에요. 기획재정부의 예산 순위에서도 뒤로 밀려있는 상태고요. 그런데 열악한 현실에서도 복지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거든요. 저는 그 분들을 재정적으로나 교육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 모금회가 갖는 큰 의미라고 생각해요. 우리만큼 많은 돈을 모아 복지사업에 지원할 수 있는 단체가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제게 이 단체는 너무 소중해요.”

  그는 모금회의 역사를 책으로 펴내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모금회에서 있었던 아주 작은 일부터 정책의 변화까지 모든 것을 담은 책을 쓰고 싶다는 것이다.


  돈은 행복의 조건이 아니다

  그는 대학생들이 직업을 찾을 때 돈보다는 행복을 찾을 것을 당부했다. “대학생들이 많이 힘들어 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사실 학생들의 탓은 아니죠. 경제 성장이 멈추고 성공할 기회는 예전보다 훨씬 줄었으니까요. 사회가 이렇다 보니 요즘 대학생들이 직장을 선택할 때 안정성과 돈에만 집중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제가 보기에 돈은 행복의 조건이 아니에요. 조금 부족해도 괜찮죠.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직업들이 있고 그 안에 얼마나 즐거운 일들이 많이 있는데…. 시야를 좀 넓혀서 세상을 바라봐야 해요. 사회복지사도 당시에는 정말 인기 없고 급여도 적은 직업으로 유명했어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제게 행복을 만들어 주고 있잖아요? 각자에게 보람이 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직업을 찾아봤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더 쉽고 넓은 길이 보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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