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남성학회 회원 한지환(사학·04) 동문


한국남성학회 회원 한지환(사학·04) 동문

 소년은 부모님께 십자수 등을 하는 수예부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수예부에 들어갈 거예요.” 소년은 부모님께 혼이 났다. “남자가 수예부가 웬 말이냐.” 그렇다. 그는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아이였다. 그의 그런 성격을 친구들과 부모님은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마초적임, 권위, 강인함을 요구했다. 시간이 흘러 소년은 어른이 되었고, 사회가 남자들에게 강요하는 남성성을 타개하고, 남성 여성이 진정으로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연구자이자 운동가가 되었다. 한국남성학회 회원이자 남녀공동병역의무추진위원회의 대표를 역임했던 남성운동가 한지환(사학·04) 동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숭실대는 그에게 학문의 터였다

 한지환 동문은 2004년 숭실대 법학과에 들어왔다. 1년 후 그는 여느 남학생들처럼 병역 의무를 위해 휴학했다. 하지만 휴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그는 법학이 아닌 사학을 공부하기 위해 과를 옮겼다. “공익요원으로 근무하면서 앞으로의 삶의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사실 그는 어려서부터 역사학과 남성학에 관심이 많았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역사학을 공부하는 것을 꿈꾸고 있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저는 남성운동에도 힘을 실어주고 싶었죠. 그러기 위해선 법률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법학과로 진학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는 1년 간 법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진로와 이상 사이에서 괴리를 느꼈다. 남성문제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남성운동에 도움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법률적 지식이 아니라 인문학적 고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학부시절 동안 역사학이 라는 인문학적 소양을 쌓음으로써 남성성의 관념에 가깝게 다가가려 했다.
 2011년 그는 그렇게 학사과정을 마치고 본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그러나 그는 본교를 떠나지 않고 본교 대학원 사학과에 들어갔고 지금은 사학과 서양사를 전공하며 중세 유럽의 사상사와 문화사, 기사도 문화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엔 바쁜 일정 탓에 젠더(gender) 분야에 대한 글을 쓰고, 자료를 모으고, 온·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사람들과 열띤 논쟁을 하는 등 학부시절 때만큼 뚜렷하게 활동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보통 대학원생들과 같이 도서관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는 역사학도예요. 한 10시간 정도 공부할 걸요? 이것도 예전에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던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과연 평범한 학생들이 경악할 노릇이다.

 자신을 폭행한 여성에게 사회는 관대했다
 남녀평등, 성해방과 같은 개념은 그에게 먼 나라 얘기가 아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우유부단했다. 한국 사회가 남자들에게 요구하는 남성성을 그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중고등학교 때부터 고민이 많았어요. 선생님, 부모님, 친구들, 모든 사람들은 저에게 남자다움을 원했지만 저는 저를 그들이 원하는 ‘남자다운’ 사람으로 탈바꿈하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하기도 어려웠어요.”
 이런 그의 성격 때문이었는지 친구들은 그를 싫어했다. 왕따를 당하기도 했고, 온갖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심지어 여학생들도 그를 싫어했고, 때리기까지 했다. “여자들이 때리는 게 더 무서워요. 소위 말하는 여자 일진들 있죠? 오히려 남자보다 심하고 잔인하게 때리는 경우도 많아요."그는 온갖 수치심과 괴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단순히 맞았다는 사실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남학생들에게 맞았을 때는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피해자의 입장도 자세히 들어보고, 공정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그런데 여학생들에게 맞았을 때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지 않거나 남자는 여자한테 좀 맞아도 된다는 등의 이상한 반응을 보였죠. 폭력의 피해자였다는 점에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가해자가 여자인가 남자인가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과 반응은 180도 달라졌어요.” 그는 자신이 가진 능력과 적성에 관계없이 소설과 영화 그리고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강인함, 대범함 같은 남성상을 강요하는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졌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젠더 문제는 호주제 폐지 논란으로 인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고 그는 곧 ‘남녀공동병역의무추진위원회’라는 Daum 카페의 공동 운영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2004년 초에는 친여권적 남성단체인 <딸사랑 아버지 모임>에서 남성학자로 유명한 故정채기 교수를 만나게 됐고 본격적으로 남성학에 뛰어들었다.

 남녀가 같이 병역의 의무를?
 
“사실 ‘남녀공동병역의무추진위원회’는 지금 유명무실해졌어요. 또 2004년 초에 호주제 폐지와 관련해 카페 회원들과의 의견충돌 때문에 공동운영자 자리를 내놓았어요.” 자유주의적 관점으로 남성운동을 표방했던 그와는 달리 많은 회원들은 보수주의적 관점, 즉 남성이 예전에 가졌던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루려고 하는 목표는 남녀공동 병역으로 똑같았지만 목표에 도달하려고 하는 동기가 처음부터 달랐던 것이었다.
 노르웨이에서는 올해 6월부터 남녀공동병역이 도입됐다. 국내에서도 서울대 양현아 교수, 성주인터내셔널 김성주 사장 등이 이에 대한 지지를 표해 왔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흔히 남녀공동병역 주장을 ‘여성에 대한 감정적인 분풀이’로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남성 징병제는 ‘남성은 여성을 지배하고 보호해야 한다.’라는 전통적인 성별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하나의 제도라고 봐야 해요.” 이미 수천 년 동안 거의 모든 사회에서 구성원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은 남성의 책임으로여겨져 왔고, 이것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와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재미난 건 많은 여성계 관계자들이 이러한 남성의 지위는 거부하면서 남녀공동병역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거나 이를 반대해요. 이는 모순이죠.”
 그는 또 삼군사관학교와 학생군사교육단(ROTC)이 여성에게 문을 열었다는 사실은 여성이 체력적인 측면에서 군복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의 효력을 잃게 했다고 주장했다. “일반 여성들보다 체력이 더 약한 남성 신체 허약자들이나 지병환자들도 보충역이나 제2국민역으로 병역의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건강한 여성들이 병역의무를 전혀 부담하지 않는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여성들이 현역으로 가야한다는 것은 아니에요. 여성들도 보충역이나 제2국민역 등 부담이 적은 병역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남녀가 동등하게 병역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국내 남성학의 토대를 다지다
 한지환 동문이 몸 담고 있는 한국남성학연구회는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아우르는 매스큘리즘(masculism) 전문가들의 학술 소모임이다. “2000년대 초에 故정채기 교수님께서 여러 분야에 진출해 계셨던 남성운동 및 아버지운동 관계자 분들과 함께 손 잡고 결성한 단체입니다. 비록 공식적인 학술 연구단체는 아니지만 남성학 자체가 교육학, 심리학, 역사학, 신학 등의 인문학과 사회과학 등 여러 분야와 필연적으로 연계될 수밖에 없다 보니 다양한 연구자들이 소속돼 있습니다.”
 그는 연구회 구성원 일부와 함께 2007년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학과 남성운동>이라는 책을 펴냈고, 집필한 책은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 학술 도서로 선정됐다. “책이 출간될 당시 학부생에 불과했던 제가 공동으로 집필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큰 영광이었습니다. 특히 학회 연구자들이 남성학의 불모지였던 한국사회에 남성학과 남성운동의 이론적 근거와 연구 방법을 처음으로 제시한 분들이기에 저를 한 단계 더 성장시켜 준 계기가 되었죠.” 하지만 순수한 학술 소모임이니만큼 실제로 사회에 변혁을 일으키는 가시적인 성과는 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힘찬 목소리를 통해 짐작컨대 그는 한국남성학연구회가 남성학과 남성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고 사회적인 관심을 촉구했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순탄치 않은 남성주의자의 길
 한지환 동문은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연구하는 동시에 중앙일보 디지털 국회 등 인터넷 논객으로도 활동했다. 페미니즘 관련 사이트에서 여성할당제, 남녀공동병역 등에 대해 토론하다 보면 온갖 악플과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곤 했다.  “악플, 정말 장난 아니었죠.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어야 할 때도 있었어요.” 또한 그는 자유주의 남성운동은 여성주의자들에게도, 과거 남성의 지위를 되찾자는 남성주의자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힘든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힘들다기보다 아쉬웠죠.”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현재 한국사회가 남성과 여성 간의 소모적인 감정 싸움만 반복하고 있는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페미니즘이 국내 사회에서 독주를 일삼는 바람에 사람들은 처음부터 매스큘리즘에 대해 많이 오해하고 있어요. 여성주의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인정해야 건설적이고 의미 있는 논의가 진행될 것 같네요.” 그는 국내에서 사람들에게 남성학, 남성운동이 페미니즘에 대한 감정적 대항이나 사회적 반동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끝까지 이상을 포기 않는 남자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 사회는 그가 주장한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변하지 않았다. 그는 이성과도 성격과 생각의 차이로 몇 차례 이별을 맞이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렵죠. 어렵지만 저는 아직 젊었을 때 가지고 있던 성해방과 양성평등에 대한 꿈과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물론 제가 원래의 제 모습을 포기하고 사회에 굴복하는 게 편하겠죠.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면 제 주장의 진실성이 사라지는 거잖아요. 더 열심히 학업에 증진해 끊임없이 제가 꿈꾸는 이상을 향해 달려갈 겁니다.” 편안함 대신 불편함, 타협 대신 전진을 택한 그는 남성운동가 한지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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