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철학 시간에 배운 경험론이 생각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누군가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의 차이를 물어본다면 나는 대답을 하기 위해 오랜 생각에 잠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이런 답을 만들어낼 것 같다. “런던에 가서 템스 강가를 천천히 거닐다 보면 점잖은 남색 코트를 입은 신사가 당신에게 설명해줄 거예요. 처음 본 당신이지만 그 신사는 오랫동안 당신에게 친절함을 잃지 않고 질문에 대답해 줄 것입니다.”


   대영제국의 심장, 산업혁명의 발원지, 의회정치의 모범답안. 런던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경험론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007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더해지면 런던은 대륙과는 정말 다른 모습으로 스스로를 색칠한다.


   템스 강 위의 타워 브리지는 단순히 강의 양쪽이 아니라 영국과 대륙을 잇는 것처럼 보인다. 빅벤의 시계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나침반이 되고, 국회의사당의 웅장한 모습은 민의를 반영하려는 현명한 정치인들의 건장한 등뼈 조각처럼 느껴진다. 위대한 정치인의 작은 뼛조각을 하나씩 맞추어 세운 건물처럼 섬세하다. 트라팔가 광장(Trafalga Square)의 네 마리 사자상은 넬슨 제독을 호위하고 피카딜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의 인파는 영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것 같다. 어디서 이리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색깔로 거리에 밀려나온 것일까. 사람들의 옷차림은 검소한 사치가 만든 개성의 충만함을 뿜어낸다.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규정한다면 이곳은 민주주의가 만든 색감이 아닐 수 없다. 그 역사가 150년이나 되었다는 런던 지하철 안에서 들리는 영국 영어의 강한 악센트는 버터를 바른 빵의 맛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대패로 나무를 깎는 소리로 들린다.


   영국 신사로부터 경험론에 대한 답을 받은 당신은 이야기 할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경험은 신이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오감(五感)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주 한정적입니다. 인간의 단순한 경험으로 위대한 대영제국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이 아름다운 런던을 건설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경험이란 인간의 능력이 아닌 결국 신이 주신 통찰이고 어쩌면 대륙이 말한 합리에 더 가까운 것이라 해야 옳은 것이겠죠.”


   런던은 걷는 도시다. 걷다가 힘들면 우리에겐 이국적인 이층 버스를 타도 좋다. 하지만 걷다 보면 막혔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주는 도시가 런던이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건물이라고 할지라도 런던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역사가 된다. 런던의 일부가 되는 것이 역사의 일부가 된다는 것. 나에겐 이것이 해답이었다. 도시의 품격에 대한 답을 런던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런던이 만든 불행했던 역사의 오답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런던이 가진 역사의 무게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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