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들인 렘브란트, 프란스 할스, 얀 베르메르,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생각만으로도 난 고속열차 안에서부터 손목 위의 시계를 초조하게 쳐다보았다. 시속 300km가 훨씬 넘는 초고속으로 열차가 달리고 있는데도 더 빨리 이곳 암스테르담에 도착하고 싶었다. 사실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나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보다 암스테르담의 라익스 뮤지엄(Rijks Museum)을 더 가고 싶었던 나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미술책에 나왔던 렘브란트의 ‘야경(Night Watch)’을 언젠가는 직접 보고야 말겠다는 나의 염원이 더 큰 초조와 안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멋진 디자인의 중앙역을 빠져나오자마자 눈앞에 펼쳐지는 운하가 ‘해수면보다 낮은 나라’ 네덜란드를 시각적으로 인지시켰다면, 코 안을 자극하는 강한 마리화나 냄새는 자유로워도 너무 자유로운 영혼들의 천국 암스테르담을 후각적으로 각인(刻印)시킨다. 다른 나라에서는 소지한 것만으로도 큰 죄가 되는 마리화나가 이곳에서는 합법이라니 말문이 막힌다.


 암스테르담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자전거 행렬 사이를 뚫고 도시 안으로 쭉 내려가는 가운데분홍빛 전등이 하나둘씩 켜지고, 곧이어 운하 뒤편으로 펼쳐지는 홍등가의 광경이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이런 곳에서 시인들이 시를 쓴다면 엄청난 ‘시적 허용’을 남발하지 않을까. 그러나 마리화나 냄새와 홍등가의 야릇함이 이 도시의 품격을 떨어뜨리지는 못한다. 이곳 사람들은 우리가 숨기려고 하는 것을 드러내 놓고 각자의 판단과 선택에 맡긴다. 오히려 천하고 창피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숨기려고 노력해도 숨겨지지 않는 우리나라 사회가 더 잘못된 것으로 그려지는 것은 왜일까.


 렘브란트의 ‘야경’ 앞에 서서 30분 동안이나 움직이지 못했고,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앞에서는 콧등이 시려 눈물이 났다. 빈자(貧者)들의 고달프지만 소박한 표정에 완전히 몰입했다. 그리고 프란스 할스의 ‘유쾌한 술고래(The Merry Drinker)’ 안에서는 애주가인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 그림 속에 내가 들어앉아 있었다니 웃음이 절로 난다. 술을 먹고 행복해하는 표정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그림은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암스테르담은 화가들의 자유로운 영혼을 태동시킨 요람이었으며 자유로운 영혼을 부여받은 예술가들은 이렇게 세계 최고의 작품들로 보답했다. 나아가 이런 자유는 암스테르담에 세계 최초의 주식 거래소와 주식회사를 만들었고, 네덜란드를 혁신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1600년대 세계를 주름잡는 강대국으로 탄생시켰다.


 누가 도시의 품격을 말하는가. 그렇다면 암스테르담을 여행하며 사람들의 표정을 보라. 품격이란 좋고 나쁨이 아니고 크고 작음도 아니며, 고귀하고 비천함의 문제도 아닌 스스로의 이성과 의지로 선택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곧 혁신이며 번영이다. 그리고 공존하는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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